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0)
머릿속은 청명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아니, 문제는 아니다. 또다시 선택과 결정이 남았을 뿐.
일단 세 가지 문제 중 두 가지는 확실히 해결했다.
난 촉천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후의 경지도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게 될 것이다.
남은 건 세 번째 문제다.
전생과 동화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생각하지 말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들의 아들로 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자연스레 아버지, 어머니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그 소란에 가장 먼저 어머니가 걱정되지 않았는가.
그걸로 됐다.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
개천지보 오보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미루지 않는다.
상단에 연락하여 렌을 불러들였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락에 왔다.
이번 토벌전에서 얻은 마나석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이건…….”
그에게 이번에 획득한 마나석을 건네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작님에게 처분을 부탁한 것과…….”
그리고 물끄러미 날 본다.
“그걸 어디에 숨겼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데, 이건 다른 거다.”
“의심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어쩌다가 한 개를 더 손에 넣었어. 토벌대가 얻은 것과는 별개의 획득물이긴 하지만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
“처분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상관없다. 필요한 데 알아서 쓰고 내 계획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 아! 그리고 물 속성이 담긴 마법 검 한 자루도 부탁해야 할 것 같군.”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마나석을 품에 넣는 렌을 보고 물었다.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올 초에 갱신된 새로운 지도입니다. 계획보다 너무 일러 비싸게라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야. 벌써 생색을 내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알아야 할 건 부탁한 것이 정확히 내 손에 들어왔느냐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계약이 성사되었는지는 몰라도, 총기가 있던 초반과 달리 지금은 그냥 일반적인 상인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를 직시하며 다시 말했다.
“난 말보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믿었으니 맡겼고, 그 믿음만 배신하지 않으면 된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 넘기든가.”
“아닙니다. 충분히 처리 가능합니다.”
화들짝 놀라는 렌을 보며 말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했으면 좋겠군. 내 생각을 알고 있으니 알아서. 번천을 통하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가 건넨 것을 살폈다.
경각심을 주긴 했지만, 꼼꼼하니 일 처리를 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어찌 나가지?’
준비는 했는데 나갈 명분이 부족하다.
가족들이 알아서 안 되는 건 둘째 치고, 그냥 나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금방 해결 방법이 생각났다.
“요새 상단 수레가 자주 오가지?”
“네. 건설자재도 그렇고, 토벌전이 막 끝난 시기이니까요. 앞으로 더 많아질 겁니다. 이번에 영지에서 받은 주문량이 엄청 납니다.”
오랜만에, 아니 영지 역사상 가장 큰 돈을 만질 것이다.
곧 겨울임에도 재정을 맡은 드리블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영지민들도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수레 한 대만 빼 줘. 돈 될 만한 것도 좀 쌓아 주고.”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
렌은 뭔가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괜찮아. 그리고 우리의 계약은 그대와 나밖에 모르니, 내가 죽으면 혼자 꿀꺽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가벼운 농담에 렌이 정색하며 말했다.
“전 물건을 사고팔아서 이득을 취하는 장사꾼입니다. 다른 건 관심 없습니다.”
“해 본 말이야. 걱정할 건 없으니까 준비해 줘. 가능하지?”
“가능이야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잔뜩 걱정한 표정의 그를 보며 미소로 대답했다.
* * *
“호위?”
“네, 아버지. 이번에 들어온 용병들을 죄다 고용했음에도 사람이 모자란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서 인원을 차출해 그쪽을 좀 도우려고 상의 중이다.”
“그럼 더 잘됐습니다. 차출 인원에 저도 포함시켜 주십시오.”
“굳이 네가 나설 필요가 있느냐?”
“아버님에게 포스와 검을 배우고, 아이언 센터에서도 수련을 했지만 실전은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 나가서 새로운 걸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고민하는 아버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저도 제 한 몸 지킬 자신이 있고, 에르자일과 번천도 있으니까요.”
“네 실력이야 알지만…….”
쉽게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애정을 듬뿍 받는다는 것. 무척 좋은 일이나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는 확실히 장애물이 된다.
“허락해 주십시오. 저도 내년이면 스물입니다, 아버지.”
“흐음…… 알면서도 내보내기 쉽지 않은 게 아비 마음이구나.”
아버지는 나를 뚫어지게 보며 말을 이었다.
“좋아. 해 봐야지. 하지만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 실력이야 알지만 세상은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영리하게 행동하겠습니다.”
“시그탑에게 부탁해서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만.”
“그건 안 됩니다. 영지에 그가 있어야만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수가 있으니까요.”
“네가 걱정할 만큼 아직 내가 그리 늙은 것은 아닌데 말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걱정하실 만큼 어리지 않아요..”
“좋다. 상단과는 이야기해 봤느냐?”
“네.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허락하였고, 다음 날 드디어 계획의 첫걸음을 뗄 수가 있었다.
* * *
“뭔가 설레네.”
에르자일은 마치 놀러 나온 것처럼 즐거워했다. 에렌에서는 그리 외출을 싫어하더니 락에서는 180도 달라졌다.
이유야 짐작한다.
락에서는 그녀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었기…… 아니,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락에 와서 그녀의 미모가 사라진 건 아니나, 사람이 적고 뻔히 아는 데다 대부분 유부남이다. 거기에 총각들도 마법사이고 영주의 손님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접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였다.
연구하는 시간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이유는 말이다.
그러다가 느긋한(?) 호송 임무를 맡았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반면 번천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용병이니 노숙보다는 지붕 있는 집이 훨씬 좋다는 걸 알았고, 근래 같이 수련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수습해야 하는데 끌려 나오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심통 난 표정으로 물을 길어 오며 번천이 한마디 했다.
“정말 용병이나 짐꾼 몇 데리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고 싶었으나 이번 일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 에르자일과 번천, 딱 두 사람만 데리고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만 고생해. 이번 건 네게도 필요한 일이고, 또 내가 영지에 있으면 네 심법을 이리 봐 줄 시간이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심술 그만 부려.”
“일이 많긴 하지만 심술은 아닙니다. 정말 주군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거?”
내가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에르자일이나 도와. 혼자 해 보겠다고 저 난리인데. 그냥 두면 편히 자긴 다 그른 것 같은데.”
번천은 고개를 돌리더니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팡이 대신 생전 처음 잡아 보는 삽으로 잠자리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안쓰러운 것이다.
‘어떡하나. 그래도 본 게 있다고, 자기가 해 보겠다는데.’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멀뚱히 지켜보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마법사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하루 종일 걸립니다. 그냥 말먹이나 주세요.”
제법 화기애애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생각해 보니 의외로 둘이 큰 트러블 없었네.’
번천은 나도 있고, 가끔 그녀가 마법을 가르쳐 주기도 해서 깍듯하게 대했고, 에르자일은 그를 볼 때 고향에 있는 큰오빠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에게 냉랭하게 대하지만 번천에게는 곁을 잘 내 준다.
여하간 그렇게 숙영 준비를 끝내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달이 하늘 중앙에 걸렸다.
에르자일은 밤의 낭만을 즐긴다고 버티다가 꾸벅꾸벅하고, 번천마저 곯아떨어졌을 때 난 주변에 신경을 기울였다.
‘아직 아닌가? 이쯤 되면 충분히 올 시간이 되었는데.’
두두두두두.
그리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왔다!’
* * *
오러후이.
북방 나타족 출신의 그는 다른 어른들이 그랬고, 자신들의 동생이 그리될 직업을 가졌다.
마적(馬賊).
나타족의 기원은 유목민족이다.
어느 날 그들의 초원에 몬스터들이 들끓었고, 평야에는 몬스터들과 비견할 만한 맹수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유목민족이 아닌 마적이라는 특성을 지닌 부족이 되었다.
보통 지나가는 행인, 상단을 털거나 가끔은 영지를 약탈하기까지 했다.
제국뿐 아니라 몇몇 나라들은 이 마족들을 토벌하고자 했으나 쉬운 게 아니었다.
토벌대가 만만하면 한판 붙고, 심상치 않다 생각하면 하늘 산맥 위쪽으로 몸을 피했다.
게다가 이 부근에는 나타족만 있는 게 아니다.
대륙의 범죄자, 도망자, 도적들이 은신처로 바로 이쪽을 선택하기에 토벌대는 나타족만 신경 쓸 수도 없었다.
그 바람에 나타족은 나름 번성한 부족이 되었고, 도적들의 모임인 블랙 길드, 산적들의 모임체인 레드 길드와 더불어 북방 삼대 세력 중 하나라는 타이틀도 가질 수 있었다.
오러후이는 바로 그 나타족에서도 제법 목에 힘을 주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용맹함과 무예를 인정받아 여덟 개의 부대 중 하나를 통솔하는 무간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 두려울 게 없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오러후이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들이 포로들을 묶는 밧줄에 자신을 포함한 부하들이 묶여 있었고, 전리품을 실어야 할 짐말 위에는 자신들의 갑주가 걸려 있었다.
정말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이 밤중에 자신의 영역에 불을 피우는, 이 지역 초행인 멍청이들은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
멍청한 놈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부하들을 끌고 달렸다.
멍청한 놈들이 재물도 풍부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고작 세 명. 그리고 수레도 하나.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불빛이 하나라 규모가 작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고 세 명 중 하나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녀였으니 말이다.
멍청한 놈들과 한 명의 불쌍한 여자를 살폈다.
그중 주의할 놈은 한 녀석이었다.
덩치.
애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앳된 청년이나 예쁜 여자는 별거 아니나, 저 큰 놈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겉보기로 자신이 직접 나서도 승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놈은 혼자지만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부하들이 놈에게 달려 나갔다.
열심히 훈련시킨 보람이 있다.
예상대로 놈은 강했지만 마상에서 공격은 익숙지 않아 보였고, 쪽수가 많은 쪽이 유리한 건 만고의 진리다.
게다가 여자와 청년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만 보니, 일이 수월하게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예시장에 갖다 팔면 수천 금을 받을 만한 미모의 여인을 어찌 처리할지 그것만 고민하면 됐다.
분명 그랬는데 말이다.
덩치를 쓰러트리기 직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가 지팡이를 휘두르니 수십여 개의 빛무리가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청년이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어느새 덩치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악몽이었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포박당해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다가오며 덩치 큰 놈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그냥 죽여도 돼. 어차피 몇 놈 죽여야 남은 놈들이 고분고분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