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7)
단 하나의 생각!
몬스터가 열 마리가 아닌 수백 마리라도 죽이면 그뿐이다. 그런 일념을 품기로 했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오는 몬스터들.
포스가 간간이 끊기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으나 번천은 초인적인 힘으로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하지만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한계에 이르는 순간은 결국 다가왔다.
“주군, 복수해 주십시오!”
나름 비장미 넘치는 대사를 지껄이며 몬스터 무리로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화악!
저 앞에서 불길이 치솟고, 다리가 달린 것처럼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 왜 여기 있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주군!”
번천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 * *
‘정말 운이 얼마나 좋은 거냐?’
이 거대한 던전에서 번천이 내 쪽을 향해 왔다는 건 운이 아니라면 설명하기가 힘들다.
하긴 같이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군가는 금을 줍는다고 했다.
타고난 복이 그렇다면 나름 훌륭한 무기가 아닌가.
“그런데 정말 왜 여기 있는 거냐?”
“주군을 찾았지요.”
“다른 사람들은? 만났나?”
번천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대부분 안전하다는 것에 안심했다. 하지만.
“아버지만 남으셨다?”
“네. 모두 내보내고 영주님만 남으셨습니다.”
당신다운 선택이다.
‘그래서 속이 타는 거지.’
번천이라는 짐 덩이가 하나 생기긴 했지만.
‘나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거지?’
잠시 좀 뭉클해졌으나 이내 그만뒀다. 지금은 그것보다 이 빌어먹을 돌덩어리를 먼저 부수는 게 우선이다.
“그냥 뒤따르기만 해.”
“네, 주군.”
다시 안으로 진입했다.
* * *
역시 크다.
끼루루루루.
괴성을 내며 달려드는 건 박쥐처럼 보이는 기분 나쁜 생명체들이었다.
“후우웁!”
숨을 들이쉬고 검을 뻗는다.
초식은…… 이런 날파리 같은 것들에게 제격인 게 있다.
천중산에서도 자주 써먹었던 초식.
대붕검 제삼초식 일격붕괴(一擊崩壞: 한 번 쳐 산과 흙을 무너트린다).
검에 급격히 내력이 쏠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력이 살짝 부족하다 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남는 것들이 생기고, 그것을 처리하는 데 내력을 더 쓰게 만든다.
처리할 때 확실하게.
옛날 감각, 아니 꿈에서나 느꼈던 그런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내 첫 실전일지도 모르겠다.
살욕(殺慾).
오랜만이지 않은가.
이런 감정을 돌덩어리 따위에게 품는 게 아쉬울 정도다.
살욕의 일부분을 떼어 내어 박쥐형 마물에게 보냈다.
두 번 휘두를 필요도,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는 지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분명 여긴 크고 여러 갈래의 길이 수십 곳이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지도는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방법이 틀렸다. 살아 있는 돌덩어리는 언제든 길을 바꿀 것이고, 원한다면 사람들을 평생 자신의 안에서 뱅뱅 돌게 만들 수 있으니까.
간단하게 가자.
이런 마물이 나오면 다 처리하고, 길을 막으면 뚫는다.
하지만 이 돌덩어리가 길을 막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힘줄 같은 오델리움으로 동굴이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그런 힘줄이 무한하지는 않을 테고, 정말 지능이 있다면 그것을 뽑아낸 우리에게 길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남은 건 아까 같은 마물이다.
얼마나 품고 있을까?
‘무한한 게 아니라면.’
이 던전의 핵을 파괴시킬 것이다.
남은 건 그뿐이다.
간다!
* * *
에르자일은 처음엔 잔뜩 긴장했다.
던전도 처음일뿐더러 돌이 굴러 오면서 별것도 못 해 보고 죽거나 크게 다칠 뻔했다.
로라스가 아니었다면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았다.
혼란스러운 광경.
빠르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에 겁도 났다.
게다가 로라스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동굴을 후려치기 시작할 때는, 그가 이성을 잃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로라스의 그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금맥처럼 오델리움을 발견했을 때는 희열에 찼다.
오델리움은 마나 전도력이 금보다 더 훌륭하고, 강도 역시 최강의 금속이었다.
명검이라 불리고, 유명한 지팡이들을 평가하는 기준에서 오델리움의 함유량이 기준이 될 정도다.
검사가 검을 탐하는 것만큼 마법사도 자신의 도구를 탐한다.
자신의 지팡이는 무려 10%나 오델리움이 섞였다. 헤르메스에게 이걸 선물로 받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한 달 가까이 지팡이를 품에 안고 잘 정도였다.
그런데 엄청난 양으로 추정되는 오델리움을 발견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라스를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고, 원 없이 마법을 썼다.
뭔 놈의 몬스터들이 그리 많은지 다인용 마법을 난사해도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번천을 만났다.
그의 실력 수준을 떠나 사람이 합류했다는 사실이 약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던전에 계속 진입했다.
로라스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앞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며 전진했다.
번천은 그의 뒤를 따르며 보좌했고. 자신 역시 다시 마법을 난사해야 했다.
그리 전진하면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생기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로라스를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가 맞나?’
로라스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뒤만 따랐을 때는 안도감을 주는 동료였지만, 관찰하니 그냥 괴물이라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검에 포스가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휘두르는 검에 베이지 않은 것이 없었고, 길게 뻗는 것만으로 눈앞의 몬스터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다.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동굴의 벽마저 부수고, 오델리움이 섞인 금을 잘라 내지 않았던가?
‘권신에게 무공을 배운 건 맞지만…….’
검에 포스가 보이면 경지라도 추측해 보겠는데, 그런 게 없으니 답답하다.
‘속성이라도 보여야지.’
포스도 마나처럼 속성이 있는데 그것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너무 약해 포스 없이 베고 찌르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건 아니야. 기본적인 항마력이 저 정도면…….’
몬스터들은 기본적인 항마력이 나쁘지 않았다. 형편없는 몬스터였다면 로라스가 처리하는 숫자보다, 자신이 마법으로 처리하는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든든한 동료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로라스의 실력에 좋았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잠깐만. 잘라 내?’
그러다가 이내 간과하고 넘어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델리움이 섞인 금속을 잘라 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지금 로라스의 손에 들린 커터라 불린 무기도 명품이다. 오델리움이 섞인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잘라 낼 수가 있던가?
‘여태 본신의 실력을 숨긴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다.
마법을 난사하면서도 계속하여 로라스를 관찰했다.
무서울 정도로 거침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느껴지기 시작했다.
광기(狂氣)의 기운이.
매번 시큰둥하면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끔 답답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아니다.
뭐라 형용할 수도, 그리고 설명할 수도 없는 그런 기운.
에르자일은 찰나이긴 하지만 두려움이 들었다.
* * *
“로라스!”
앞을 향해 소리 질렀고 메아리치듯 돌아오는 목소리에 에듀는 조급해졌다.
여기서 죽을 아들이 아니었으나 아비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면서도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에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랐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커터…….’
몬스터들의 절단면을 보면 커터가 남긴 상처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르자일 그녀도 여기 있고.’
그리고 둔탁한 상처도 보였다.
‘번천. 명령을 어겼구나.’
에듀는 몬스터들의 사체만으로도 벌어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무인이다.
지금 이 사체들이 로라스와 에르자일, 번천이 만들어 냈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에듀는 고민해야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태인 걸 걱정해야 할지 말이다.
그래도 일단 흔적을 찾았으니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에듀는 계속 나아갈수록 표정이 점점 굳었다.
‘대체 어떻게…….’
별거 없는 몬스터들이긴 하지만 머릿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후방을 깨끗이 정리한 터라 전방에서만 나타났으니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가능은 했다.
게다가 동굴의 폭이 5미터가 넘지 않으니 번천과 로라스가 앞을 막고, 마법사인 헤르메스가 후방 지원을 했다면 말이다.
‘훌륭하게 대처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애들이다.
번천이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에듀 남작의 눈에 차는 수준은 아니고, 실제적으로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사체들이 워낙 많고 피가 사방에 뿌려져 있어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 쉬웠고, 덕분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사체로 만들어진 길인 것처럼 끝이 없었다.
‘생겨도 어찌 이런 던전이…….’
상황이 이쯤 되니 던전 타입은 확인이 되었다.
대형 던전은 맞다. 그리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던전이 지능형이라는 것이다.
특대형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는 그런 던전.
몬스터들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여태까지는 동굴에 품은 몬스터들을 소모할 필요 없이 내부를 변형시키는 것만으로도 침입자들의 처리가 가능했으리라.
그래서였다.
지금이야 잘 처리해 나가고 있다지만, 핵심에 다가갈수록 더 힘든 고비가 있을 것이다.
에듀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로라스가 에렌에서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100% 오델리움으로 만든 검이다.
‘시그탑이 있었다면!’
그가 있었다면 긴장은 덜했을 터.
에듀는 아무리 쥐어도 싸늘하기만 한 검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로라스가 앞에 있는 이상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몬스터들의 사체를 밟으면서 느껴지는 그 기이한 감각을 몸으로 느끼며 에듀는 전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지만…… 처리 못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락의 영주.
실버 스워드 최연소 우승자.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무인.
에듀는 마침내 던전의 중심지에 도착했고 눈빛이 싸늘해졌다.
검붉은 빛을 발하는 핵이 거기 있었다.
* * *
에르자일은 로라스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파괴하지 않는다고?”
정말 처절한 싸움이었다.
대형 몬스터들은 둘째 치고 중앙에 있던 가지각색의 십여 개 석상들이 움직였다.
석상의 존재는 에르자일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물리력을 발동하는 마법이 아니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야 주기는 하지만 미미한 수준.
그 바람에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번천의 호위를 받으며 실드만 남발해야 했다.
그사이 로라스는?
자신이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그가 석상을 상대해야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만, 그는 반대로 움직였다.
석상들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대형 몬스터들에게 공세를 집중시킨 것이다.
이해는 한다.
대형 몬스터들은 석상보다 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반대로 했으면 자신의 가치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간!
그때 에르자일은 마왕을 보았다.
대형 몬스터들도 여태 출몰했던 중소형 마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라스는 위태로울 정도로 대형 몬스터에게 달라붙어 일 검에 사지 중 하나를 잘라 내거나, 아니면 목을 베어 냈다.
그래, 실력이 있다면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로라스의 표정은 너무나도 편안했다.
몬스터들의 흉악한 협공에도, 마치 당연히 그리 움직일 것이라 아는 듯 자연스레 피하고, 하나씩 절단을 내었다.
그때 느껴지는 괴리감에 에르자일은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에게 위기 따위는 없었다.
자신에게 처절한 싸움이었으나, 로라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아서일까?
로라스가 황당한 말을 했다.
“이거 키워 먹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