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5)
신기한 이야기다.
생물화되고 지능을 가지고 있는 던전이라면…….
“던전이 살아 있단 뜻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경력 수십 년이 넘는 트레저 헌터들도 보지 못한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특대형 던전만큼이나 희귀하다는 뜻입니다.”
시그탑은 그리 대답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아직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곡선요?”
“매우 거대하여 직선으로 느껴질 뿐.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 듭니다.”
이 던전 뭔가 이상했다.
“으음…….”
“아직은 확실치 않으니 그냥 염두에만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드리블은 그리 대답하며 주변을 보고 말했다.
“그래도 시야가 이리 잘 확보돼서 다행입니다. 매지스터 에르자일,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기본적으로 횃불들을 들고 있으나, 지금 동굴의 시야를 책임진 건 에르자일이다.
무려 여섯 개의 빛덩이를 선봉, 본대, 후미에 골고루 뿌리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마나에 무리는 없지?”
“이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하루 종일 유지할 수도 있어.”
“무기나 사물에 빛을 집중 유지시키는 게 마나 소비가 적지 않겠어?”
“이게 더 편해. 인챈트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여하간 무리는 하지 마. 여차하면 내가 교대하면 되니까.”
“응.”
난 드리블을 보며 말했다.
“드리블 경, 제가 경의 검에 마법을 하나 걸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드리블의 검을 받아서 라이트 마법을 인챈트시켰다.
번천을 가르치면서 인챈트 마법은 충분히 연습한 상태다. 빛의 밝기, 지속 시간 모두 최상급이다.
“이럴 땐 마법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리블은 빛을 발하는 자신의 검을 보며 좋아했다.
“얼마나 갈까요?”
“하루는 끄떡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한 말을 아버님에게도 말씀드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럼.”
드리블은 돌아갔고, 아버지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한 것 같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날 보는 아버지에게 미소 지어 드렸다.
휴식이 끝났다. 다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무슨 소리일까?’
멀리서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네?”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요?”
번천의 반문에 이어 주변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을 느끼며 이 소리가 내게만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가 아닌가?’
아니다. 분명 들린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뿐.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게 뭔지 알아야 했다.
시야가 확대되고 청각이 확대되었다.
변한 게 없다. 저 그르르르 소리만 더 크게 들렸다.
개천지보의 내력이 시각, 청각, 후각을 증대시키고 마침내 촉각까지 확대되었을 때.
“아버지!”
난 저 앞쪽에서 먼저 움직이고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내 예상이 맞는지, 틀렸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맞으면 사람을 살리고, 틀리면 망신 한 번 당하면 되는 문제다.
아니, 그 전에 이건 확실하다.
돌 굴러가는 소리.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평지가 아니다. 경사도가 워낙 작아서 느끼지 못했으나, 분명 지금 우리는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뒤로! 뒤로 물러나랏!”
차라리 망신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가 날 보며 소리쳤고, 난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 * *
“아버지!”
“번천!”
아는 이름을 전부 불렀으나 반응은 없다.
기운을 사방에 뿌려 보기에는 내 경지가 아직 그 정도는 되지 않았다.
시도야 할 수 있으나 돌가루와 먼지가 사방 가득한 이 상황에서, 그 범위는 고작 일 장 내다.
몸으로 움직이고 눈으로 찾아야 했다.
“먼지 제거할까?”
옆에서 조심스레 묻는 에르자일. 그 혼돈 속에서 내가 챙길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아니. 언제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아껴.”
먼지를 제거하면 수색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겠으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단순히 제거하는 데 마나를 제거하는 건 낭비다.
‘큰 피해는 없었을 거야!’
불행 중 다행인 게 있다면 내 외침에 모두가 따랐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아버지와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은 달랐다. 내 외침에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선봉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하니, 다른 이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 덕분이다.
교활한 트랩에 희생자가 많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건 말이다.
‘지능형…… 살아 있단 말이지?’
오히려 그게 위안이 되었다.
무생물 따위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위기감? 분노?
뭐라 표현해도 괜찮다.
전생에 뭐든 집요하게 굴지 않았던 그런 허약함 따위는 내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르자일.”
“응?”
“그냥 이리 와.”
“잡아 보면…….”
“그냥 와.”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그녀에게 말했다.
“에르자일, 앞으로 네가 뭘 보든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자. 그럴 수 있지?”
있겠냐가 아니라 있을 거라 강요했고, 눈치 빠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벼운 흥분감.
속으로 욕이 나오면서도 웃긴다.
지능형이든 뭐든 이딴 동굴 속에서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맞다. 난 지금 진심으로 이 던전을 파괴하려 했다.
수색?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던전을 공략하여 모두를 안전하게 한다. 사람은 그 후에 찾아도 늦지 않다.
이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취한다.
난 로라스가 아닌 전생의 유역후가 되었다.
* * *
“라이트!”
빛이 환해지며 주변이 보였다. 인챈트 연습을 하며 간단한 마법을 배워 둔 것을 이리 써먹을 줄은 몰랐다.
여하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욱한 돌먼지.
“주군! 주군!”
번천은 소리 높여 로라스를 찾았다.
―무조건 뒤로 빠져. 헤어지면 내가 널 찾는다.
끔찍한 기억 속에 남은 건 주군의 목소리뿐이었다.
“아…….”
돌덩어리 사이에 사람의 손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보고 번천은 급히 달려갔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손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돌덩어리를 치웠다.
그곳에 있는 것은 낯이 익은 용병이었다.
‘얼마나 죽었을까?’
많이는 안 죽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주군이 먼저 소리쳐 경고했고, 덕분에 빠져나가는 것이 빨랐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머뭇거리다 뒤늦게 빠져나갔으리라.
‘어디 계십니까? 주군!’
오면서 우스갯소리로 대열에서 이탈해 기연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던 자신의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또 홀로 헤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번천은 부지런히 사람을 찾았다.
다행히 생존자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검이 발하는 빛을 보며 오히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주님.”
그리고 에듀 남작을 발견했을 때 번천은 안도한 나머지 눈물이 날 뻔했다.
“로라스는? 같이 있지 않았나?”
하지만 주군이 에듀 남작과 같이 있지 않음에 번천은 다시 절망했다. 막연히 그와 같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탓이다.
“헤어졌습니다. 영주님께서도 못 보셨습니까?”
순간 에듀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 역시 번천을 볼 때 로라스를 찾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내 검에도 마법을 걸어 주겠나?”
에듀의 지시에 번천은 곧바로 라이트 마법을 걸었다.
“생존자는 여기로 모여라!”
에듀가 검을 높게 치켜들며 소리쳤다.
처음에는 그래도 뭉쳤는데, 수십여 개의 돌이 굴러오는 걸 본 순간 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여러 군데로 흩어져 버렸다.
입구는 대형급 던전이나 안은 특대형급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넓은 탓에 수색이 한참 걸릴 듯했다.
그래도 계속되는 수색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중에 로라스는 없었다.
에듀는 속이 바짝 타기 시작했다. 분명 어느 쪽으로 빠졌는지 알지만, 자신은 아비이기 전에 영주다.
다른 사람들의 수색과 구조가 먼저이기에 로라스를 찾으러 나설 수가 없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어디 보통 아들이던가?
옛날부터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번에 에렌에서 돌아오며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특별한 아이였다.
게다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하지 않았는가?
이따위 돌덩어리에 깔려 죽을 아이가 아니다.
‘살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사 로라스가 마스터라 하더라도 걱정되는 게 아비의 마음이니까.
‘금방 찾으러 가마!’
에듀는 수색을 서둘렀다.
* * *
앞으로 나가면서 길이 점점 좁아졌다.
무슨 흉계냐?
넓었던 길이 좁아지는 건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터.
게다가 보았다.
지금 이 길이 원래 좁은 길이 아니라 좁아지고 있는 것을.
이 돌덩어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말이다.
‘압사라도 시킬 생각인가?’
가능성이 있다.
아주 느리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는 공간이 그것을 증명한다.
“에르자일.”
“응.”
“느껴져?”
“뭐가?”
“길 좁아지고 있는 거.”
에르자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변을 계속 살핀 후에 대답했다.
“그러네. 돌아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로? 입구가 막혔어. 아니, 막았는데.”
“그러면…….”
에르자일은 당황했고 난 주변을 살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지능형 던전.
살아 있어서 스스로 길을 좁히고, 돌덩어리를 떨어트리는 던전이 더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한 건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벽면이 움직인다. 분명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조직이 있을 터.
동굴에 무슨 조직이냐고?
말했잖은가. 이 돌덩어리 동굴이 지능이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고.
검 대신 봉을 가져온 것이 베스트다.
분리된 봉을 한 손에 하나씩 쥐었다. 단순한 철 막대기를 손에 든 것처럼.
막대기의 용도는 두드려 패는 것이고.
까아앙! 까아앙!
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돌 조각이 튄다.
에르자일이 황당하게 보고 있지만 상관없다.
있을 것이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고, 이 빌어먹을 돌덩어리를 파훼할 수 있다.
카아앙. 카아앙!
어느 순간 벽면을 치는 소리가 변했다.
“멈칫했어. 확인했어.”
에르자일이 두 눈을 빛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동굴에, 말도 안 되는 방법이 통한 것을 확인했으니 더 열심히 부순다.
퍼어억! 퍼어어억!
무슨 마법인지 모르지만 돌덩어리의 강도가 약해졌고, 칠 때마다 진흙 벽을 파헤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보였다.
돌 속에서 빛나는…… 금맥 같은 것이.
던전에 금맥이라. 아니면 드디어 찾은 것인가?
까아아아앙!
가격했고,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렸다.
구르르르르르.
이제는 지진이 난 듯 진동이 울리며 소리가 난다.
돌덩어리 주제에 위협을 느낀 것인가?
이 금맥이 사람의 핏줄 같은 거라면, 그 커다란 덩치에 상처 하나 나는 건데 그리 떨 필요 없잖아?
아니면 핏줄이 아니라 힘줄인가?
그러면 더 좋지. 반드시 파괴한다.
내력을 극강으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