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3)
영지로 돌아오면 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에렌에서보다 더 바쁜 나날이었다.
에렌에서는 내 발전만 신경 쓰면 됐지만,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내 욕심에서 시작된 일.
하지만 하나씩 목표를 이뤄 갈수록 성취감이 들었다.
3개월.
그 시간에 정말 많은 것을 해냈다.
일단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을 스스로 발전시킬 토대를 만든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으로 만족한 것은 번천의 성장이다.
예전 불운의 시기를 겪은 보상인지 드레고레를 복용하고, 개천지보 입문공만 죽도록 수련한 그는 내가 돌아온 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거기에 브렌드라는 비슷한 성정의 파트너를 만나니, 전투 감각이 정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건!
“자랑스럽기 이를 데가 없군.”
“대성을 축하드립니다, 시그탑 경.”
“감사드립니다. 주군. 공자.”
시그탑이 드디어 포스를 검 외부로 뽑아내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주군의 배려. 그리고 공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시그탑의 말에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스스로 해 온 부단한 노력 덕분인 거지.”
“주군이 길을 제시해 주시고, 공자가 개안을 시켜 주었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겠습니다.”
시그탑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다.
언젠가는 경지에 오를 줄 알았지만 이리 빠르게 오를 줄은 몰랐다.
브렌드와 드리블도 축하하는 것을 보니, 나도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서라. 지금도 불안할 정도로 빠르다.’
5보 촉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이르게 될 경지. 조급함을 억눌렀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본가에 보고를 해야지. 이제 자네를 이리 편히 볼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군.”
어라? 이게 무슨 말이지?
아버지가 계속 말씀하셨다.
“남작 위를 부여받고 계속 정진하면 자네 영지도 생기고 지위 또한 더 높아질 거라네. 그때가 돼도 날 잊지 말라고.”
말을 들어 보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지위와 영토를 주는 모양인 것 같은데.
‘이럼 헛수고하는 꼴인데.’
시그탑은 내가 전략적으로 선택해서 키운 사람이다. 물론 스스로의 실력도 좋지만, 내근을 키우고 포스를 다루는 대련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경지에는 이르기까지 최소 1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
다행히 시그탑이 나서서 말했다.
“이 시그탑, 주군께 충성을 맹세한 사람입니다. 제가 주군과 이 락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네는 마스터야. 나라에서 내리는 지위와 영토를 받지 않을 셈인가?”
“제겐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군께 충성을 다하고 락의 발전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단호한 시그탑의 선언에, 아버지는 좋은 듯하면서도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드리블이나 브렌드도 마찬가지지만, 자네 같은 기사가 이 조그만 락에 머무르는 것도 맞지 않아. 더 큰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그런 쪽에 뜻이 있었다면 애초에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지도, 그리고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말씀을 거둬 주소서, 주군.”
“자네 정말…….”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알 것 같다. 저 기분을. 하지만 계속 뜻대로 말씀하시게 뒀다가는 시그탑을 억지로 내보낼 것 같은 분위기다.
“아버지, 소자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시그탑 경이 지금 마스터의 경지를 이뤘다지만 그 경지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본가에 보고를 하는 건 스스로 충분히 수습을 한 이후에도 늦지 않습니다. 시그탑 경도 스스로 세운 계획이 있을 터인데, 너무 강압적이지 않은가 합니다.”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 시그탑을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경지를 온전히 수습할 시간은 필요하겠지. 시그탑.”
“네, 주군.”
“스스로 되었다 싶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아. 하지만 자네를 위해서라도 더 큰 곳으로 가는 게 맞아.”
시그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날 쳐다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주군. 저 스스로도 아직 긴가민가한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완전히 지울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부탁드리건대 그때까지는 본가에 보고를 올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아. 그럼 오늘은 제대로 축하주나 마실까? 아!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픈걸. 사실 자네보다 내가 더 빠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아버지의 웃음소리에 기사들도 웃고 나도 웃었다.
“저번에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으려 했던 술을 지금 개봉해야겠군. 가세. 오늘은 제대로 한번 마셔 보세.”
아버지가 앞장을 서고 기사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면서 시그탑과 시선이 마주쳤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시그탑.
아마 시그탑은 평생 긴가민가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락에, 아버님 곁에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 * *
추수의 시기가 되었다.
락에서 추수는 큰 의미가 없다.
자급자족도 될 수 없을 정도의 밀만 추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중요한 건 바로 토벌전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마물의 숫자를 줄여 놓아야 하고, 겨울에 쓸 물자들을 수입하려면 토벌전은 필수다.
그리고 기다리던 렘의 상단이 도착했다.
“공자님, 말씀하신 것보다 빨리 오셨군요.”
영지를 떠나기 전 렘에게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3년 반이 넘었으니 빠른 게 맞다.
“이 안에서 더 기다릴 수 있다.”
내 말에 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5년이면 더 준비했겠지만, 지금도 기본적인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한 번에 폭발적인 성장세를 원해. 그래야 더 이슈가 될 것이고,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릴 테니까.”
“기다릴 줄 아시니 더 좋습니다.”
“마탑을 건설하고 있는 건 봤지?”
“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고급 정보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제가 늦었군요.”
“당신 책임이 아니야.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이니까.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소문을 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그걸 소문을 내 줬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 말인즉 이유를 짐작했다는 뜻일 터.
“그리고 마탑뿐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아이언 센터의 지부가 이곳에 만들어진다는 것. 또한 앞으로 베스타인 공작님이 락을 북부의 중심 지역으로 만들 거라는 소문도.”
렌이 흠칫하며 말했다.
“아이언 센터의 지부 건설과 북부의 중심 지역……. 확실한 겁니까?”
“확실치 않아.”
다시 한 번 흠칫하는 렌.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흘려야겠군요.”
역시 그는 말귀를 알아듣는 게 빠르다.
“아주 헛소문은 아니다. 도움이 되나?”
“확실한 게 아니면 의미가 없지만. 염두에는 두겠습니다.”
그리고 확신도 하지 않는다. 확실히 뛰어난 상인이다.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락의 재정을 책임져 볼 생각 있나?”
“그건…….”
바로 대답 못 하는 렌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말대로 황금상단 관리자의 위치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터.
하지만 난 그의 야망을 알고 있었고, 내게 올인하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차피 독립해야 하지 않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억지웃음을 짓는 렌.
“그럴 생각은 있지만 아직 시기가 아닙니다.”
“난 선택과 집중이란 말을 좋아해. 그건 곧 기회를 만들거나 오게 만들지. 이미 한 번 하지 않았나?”
“…….”
“강요는 하지 않아. 하지만 난 신뢰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하지. 그건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렌의 표정이 굳어 있다. 아마 지금 머릿속에 터져 나갈 듯이 많은 생각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응?”
“주시겠지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물론이지. 내가 기다릴 시간. 그 정도면 되겠나?”
“1년 반이면 충분합니다.”
결의 어린 표정까지 짓는 렌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당신은 수많은 선택을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훌륭한 선택은 없었다고 믿게 될 거야. 이건 확실한 정보야.”
렌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 *
“너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이번 토벌전은 일반적인 토벌전이 아니야. 던전 공략이다.”
락은 원래 마물이 많은 곳이지만, 근래 새로운 종까지 등장하여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이유를 알아냈다.
노멀존에 던전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던전이 일반적인 동굴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래 그곳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땅에서 솟아난 듯 그냥 생겨난다 했다. 그리고 그곳의 대장급 마물을 잡아야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던전이 많지만, 하늘 산맥의 던전은 새로 생겨났다가 그렇게 사라지는 던전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늘 산맥에 마물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더 보고 싶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생겨난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험하단 생각은 하지 않느냐? 아직 너는 성인식도…….”
“제게 그런 행사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버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락에서 내 경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와 시그탑만이 대충 눈치를 챘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막연히 그냥 내가 또래에 비해 엄청 강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으음.”
“경거망동하지 않을 겁니다. 번 토벌에는 에르자일도 참가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가 그녀의 보호자입니다.”
당연히 에르자일도 이번 토벌전에 참가한다.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왔으니 말이다. 난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긴 네게 나이는 큰 의미가 없겠지. 검과 마법 양쪽 다 능통하니 오히려 도움을 받겠구나.”
결국 허락한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대형 종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번 던전은 기존의 작은 던전과는 다를 확률이 높으니까.”
“물론입니다.”
“시그탑이 있으면 좋겠지만…….”
“시그탑 경은 참여하지 않습니까?”
“내가 말렸다. 지금은 깨달은 것을 수습하는 게 더 중요한 시기니까. 오히려 해가 될지 모른다. 수습되지 않은 마스터의 경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 말이 맞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 의문이 들었다. 수십여 개의 발 중 어느 발이 먼저 움직이고, 어느 발이 뒤따라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지네는 두 번 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숨 쉬듯 자연스레 움직이다가, 그것에 의구심을 가지는 순간 발이 꼬이고 어찌 움직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무인도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운용되고 시전되는 포스와 초식에 의문을 가지면 잘하던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깨닫지 못했다면 모를까? 마스터라는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뜬 이상 기존의 모든 무공에 대해 고찰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제가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매지스터 에르자일이나 신경 쓰거라.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헤르메스 님을 뵐 낯이 없게 된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르자일은 보기보다 강한 편이니까요.”
겉보기에는 청순가련형으로 보호 본능을 마구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는 무지막지한 성정을 가졌음을 개구리로 확인한 바 있지 않은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혼자 던전에 던져 놔도 잘 해쳐 나갈 것 같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5클래스의 마법사이니까.
‘굳이 그것까지 알려 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나도 이번 토벌대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