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2)
정적.
그지없는 그 정적 속에서 브렌드는 어느새 로라스의 앞에 서 있었다.
두 손으로 굳게 잡은 검병.
자신도 참여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의는 충분하고.
“전력을 다하세요.”
그걸 모를 정도의 공자가 아니었다.
“하아앗!”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의 근거가 된 건 20년이란 시간이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움직임을 보면서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어떤 이에게는 그 절대적인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검 끝을 하늘을 향해 세우고, 검병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날의 서늘함이 뺨에 느껴질 정도로 검을 가까이 붙인 브렌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아앗!”
기합이 길었으니 검을 길게 그을 것 같았다. 분명 그래 보였다.
로라스도 그리 생각했다면 분명 선공으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타앙! 타앙! 타앙!
하지만 로라스는 속지 않았다. 봉으로 전력으로 막길 바랐지만 짧게 잡고, 연달아 검을 치며 기세를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의도가 실패하면 반드시 역공을 당한다. 경험으로 그것을 아는 브렌드는 다시 검 끝을 땅으로 향하게 한 채 잡아당기며 몸을 보호했다.
타아아아아앙!
여지없이 찔러 오는 봉.
준비하지 않았다면 자세가 무너질 뻔했다.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검술은 시작 자세가 가장 중요했다. 그 자세에서 공격이 나갔으면 방어도 할 수 있다.
뒤로 물러나는 것도 자세를 다시 잡기 위해서였다.
원의 제약에 갇힌 로라스는 그걸 지켜보았다.
로라스에게 제약이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그것을 창피해할 만한 수준이나 되던가?
아니다.
검사로서의 재능은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상대를 보는 눈이 좋다. 그리고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안다.
주군은 그렇기에 자신에게 병사들을 맡겼고, 브렌드는 그런 장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신중하게 로라스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 * *
‘이거 곤란한데.’
지나치게 여기에 집중한 브렌드를 보니 좀 착잡하다.
‘이래서 훈련에 참여시키지 않은 건데.’
그는 영지의 경비대장이다.
시그탑이 개인적 기량으로는 최고이고, 드리블은 재정 담당에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기사인 반면, 브렌드가 맡은 일은 그의 확고한 영역이다.
그래서 그의 권위를 존중하고자 훈련에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다.
현재 그의 경지로 자신을 원 밖으로 밀어내는 건 힘겨운 일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봐줄 수도 없다.
그건 평생을 충실하게 군인으로 살아온 브렌드의 명예에 오물을 끼얹는 것일 테니까.
‘으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문제는 모호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촉천의 경지에 이르렀으면 확실하게 자신의 경지를 보여 그를 스스로 물러나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지금 브렌드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은 원 안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제약.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탓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브렌드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독특한 기수식.
‘저 대검의 특성을 잘 살린 자세인 건 분명하지. 내게 이런 제약이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힘을 발휘할 터.’
져 줄 수도, 그렇다고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그를 망신시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이거 아무래도…….’
아버지나 시그탑 경보다 먼저 그에게 보여 줘야 할 것 같다.
포스가 아닌 내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차라리 그게 브렌드에게 나을 터.
그가 다시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 * *
“어떻게 된 거야?”
“공자께서 이긴 거 아니야?”
“아냐. 대장님이 이긴 거야. 먼저 움직이셨으니까.”
“뭔 소리야. 대장님 말씀 못 들었어? 소영주께서 이기신 거야.”
병사들은 물론이고 자경단원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고도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브렌드가 유리해 보였다. 대검을 내밀고, 회수하고, 휘두르면서 가드까지 완벽한 것이 어떻게 해 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소영주는 몇 번이나 작은 원 밖으로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알 수가 없다고 한 이유는 단 한 번의 격돌 때문이었다.
철봉과 대검이 비껴가듯 서로의 무기를 치는 순간 종소리…… 아니, 그보다 수배는 오랫동안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심을 가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소영주와 대장. 두 사람 모두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힘겨루기?
그런 거였다면 누구 한쪽, 아마 대장의 편을 들어 응원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로 무기와 무기를 갖다 댄 채 그대로 멈췄다. 그것도 한참이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직후였다.
“못 당하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브렌드가 먼저 대검을 거두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의구심을 품었지만, 소영주와 대장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훌륭합니다. 아주 단단해서 이런 수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라스의 말에 브렌드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훈련이 끝나고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소영주가 이겼을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연병장에는 브렌드만이 남았다.
“하아!”
어느새 떠오른 달을 보며 브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정진했다고 생각했거늘.’
브렌드 본인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재능은 평범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선택한 것은 노력이었다.
다행히 충성할 가치가 있는 주군을 모셨고, 같이 어울려 자랑스러워해도 될 동료가 곁에 있었다.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시그탑은 타고난 무인이고, 드리블은 팔방미인인데…… 나는 뭘까?’
오늘 그는 자신이 여태 해 왔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노력은 재능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인가?’
재능의 존재는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도 재능은 있다. 노력이라는 재능이 말이다.
그래서 그리 애를 쓰며 수련했지만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주군의 아들에게 패했다.
아쉽기라도 했으면 희망을 가졌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어찌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주군의 포스는 아니었다. 권신에게 배워 온 것인가?’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그 기운.
사납지 않았고, 맹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화한 것도 아니지만 착실하게 자신의 전신을 장악하고, 손 한번 쓸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물러나길 바랐다.
그 순간 얼마나 비참했는지 형용할 수조차 없다.
비무 중에 배려라니!
그것도 동선에 제약이 있는 상대가 말이다.
‘좌절하지 말자.’
브렌드는 비참한 기분이었으나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재능의 벽은 주군과 동료인 시그탑을 보며 수십, 수백 번 느꼈던 거니까.
포기할 거면 애초에 노력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기사이고 지휘관이 아닌가!’
자기합리화?
아니다. 이건 여태 자신을 버티게 해 왔던 신념이다.
정말 죽도록 노력하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거기에 무슨 자기합리화가 남느냔 말이다. 하늘이 그렇게 태어나게 한 것을 말이다.
“후아! 후아! 후아!”
하늘을 보며 기합을 내지르는 브렌드. 그제야 누군가 있음을 깨달았다.
“번천.”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번천을 보며, 브렌드도 순간 창피함을 느꼈다.
달밤에 혼자 뭔 궁색인가.
“주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아니요. 기사님의 주군이 아닌 제 주군 말입니다.”
“아…… 그래.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브렌드의 물음에 번천이 대답했다.
“제 성정이 기사님과 비슷하니, 기사님의 뒤를 따르면 자기 몫은 충분히 하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근래 제가 배우고 있는 게 있습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기사님이 허락하시면 함께 비무를 하여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하셨습니다.”
“…….”
“그래서 부탁드리건대 저를 훈련 상대로 삼아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번천을 보며 브렌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끝까지 날 배려하시는 건가?’
다시 씁쓸해지려는 찰나 번천이 고개를 들고, 브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반드시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브렌드 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반드시 강해진다 하였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번천,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게…….”
브렌드는 번천을 잘 알았다.
제법 훌륭한 무인이고,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아는 마검사다.
아직 실력이야 자신이 낫다고 할 수준이긴 하나, 그는 자신보다 젊다. 무엇보다 그와의 차이가 크지 않아 뭔가 가르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무슨 생각이신 건가?’
그걸 로라스도 모를 리 없을 텐데 번천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비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브렌드 님, 도와주십시오.”
번천은 그런 브렌드를 보며 고민하고 있다고 착각한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게. 대체 공자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럴 것이다.
여태 봐 왔던 공자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금 기운이 났다.
자신에게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번천을 보낸 걸 보면 뭔가 있긴 있을 터.
브렌드 레지오나.
근골도 평범하고 재능도 평범하나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내는 그리 다시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 * *
‘고깝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텐데.’
괜한 일을 한 게 아닌지, 번천을 보내고 고민이 좀 됐다.
‘그는 분명 모든 게 평범하지만…….’
오후에 있었던 비무에서 확인했다.
그는 평범하다. 움직임도 기본에 충실하여 변초가 많지 않았고, 있어도 교활하지 않아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내력을 침투시켰을 때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평범한 근골을 가지고 있었고, 특출 나지 않은 포스를 지녔다.
‘하지만 그 인내와 뚝심은 절대 평범치 않았지.’
물러갈 법도 한데 물러서지 않았고, 인정할 만한데 인정하지 않았다.
꽤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텼다.
마지막 순간 그의 마혈을 건드려 순간 멈칫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날이 샐 때까지 버텼을지도 모른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번천이었다.
번천도 그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번천이 조금 더 능글맞다는 점뿐이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이라도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수락만 하면…….’
브렌드, 번천,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재능 있는 이도 필요하지만 믿고 맡길 만한 이도 필요하지.’
시그탑이 뭔가 성공 확률이 낮은 모험을 바라는 일을 맡겨야 할 때 쓸 기사라면, 브렌드는 반대다.
절대적인 안정감.
어렵지 않은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브렌드다.
‘아버지도 그를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다른 두 기사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지만 영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는 건, 그를 자신과 비슷하게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의 단합력을 생각하면, 그가 어떤 지휘관인지 알기에는 충분하지.’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기사지, 자신의 기사가 아니다. 그러니 브렌드가 이상한 고집을 피워, 번천을 거절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