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1)
“차렷!”
“교관님께 경례!”
“후아!”
락 특유의 경례 구호를 외치며 삼십여 명의 병사들이 모였고, 또 옆으로 비슷한 숫자의 자경단원들이 모였다.
“여러분의 염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후아!”
“브렌드 경께 여러분이 정말 열심히 수련을 해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후아!”
“그리고 절 그토록 기다렸다고 들었습니다만.”
병사들, 그리고 자경단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럴 때지.’
사람은 자신이 뭔가 성취했을 때 그것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특히 힘쓰는 자, 몸을 단련하는 자들은 그런 경향이 더더욱 심하다.
중요한 건 그 정도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힘들게 이루었기에 그것을 보이고 싶은 마음.
그들에게 그 대상이 나일 뿐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다음 경지로 이끌어 줘야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지 모르겠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당시 포스를 교육할 때 개개인의 역량을 보고 가르쳤다. 지금이야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이들은 금세 기억이 났다.
그들 대부분 승부욕이 엄청 높은 사람들이었다.
‘저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집단의 특성상 분위기가 중요하다.
승부욕 강한 이들에게 목표를 던져 주면 기를 쓰고 따라올 것이고, 그 기운은 다른 이들에게 퍼지게 된다.
그리 결정하니 남은 건 그 수준이다.
‘이후 신입이 들어왔을 때 기존의 인원은 압도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당연히 그렇다는 듯이 다 따라올 테니.’
전생에 천황성을 키울 때 쓴 전략이다.
그때는 그 강한 이들마저 경쟁을 시켰으나, 영지민들에게까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원하는 이들만 끌어올려 주면 된다.
‘그리고 입 무거운 이들이 있으면 더 낫겠지. 몇 명이나 건질 수 있을까?’
앞으로 할 일은 혼자 하기에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 인재를 키워야 한다.
‘테라 같은 애들이 있으면 더 좋겠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귀찮았는데 테라의 성장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사병단을 조직하려면 성장이 빠른 쪽이 좋다. 거기에 충성심 문제도 있고 말이다.
어찌 됐든 고르긴 해야 한다.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아는 방법은…….
‘실전이지.’
옛날 대장장이 율터가 만들어 준 철봉을 손에 들었다. 이제는 약간 작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봉을 끼워 맞추는 기술은 연마했는지 모르겠네. 커터라도 빌려줘 볼까?’
그리 생각하며 바닥에 어른 키만 한 원을 그렸다.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단 말이지.’
굴욕과 능욕하기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
원을 다 그린 다음, 그 안에 서서 소리쳤다.
“네 명이 조를 이루어서 나오시길!”
내 외침에 사람들 모두 어리둥절했다.
“어느 조든 날 이 원 밖으로 밀어내면 그만한 상이 있을 겁니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가게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공자님, 지금 이게…….”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심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을 기억했다. 그들이 여기서 가장 승부욕이 강하고 자존심도 강한 자들이다.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밟아 줄 생각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수모를 갚기 위해 발악을 할 터.
“와라!”
봉을 등 뒤로 하고 손을 내밀었다.
맞다! 똥 폼 한번 잡아 봤다. 더 기분 나쁘라고 말이다.
또 이럴 때 이런 거 한번 안 해 보면 평생 해 볼 일 없을 테니까.
효과는 아주 좋았다.
서너 명의 사내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먼저 덤벼들었다. 조를 짜라고 했는데 그리하지 않았으니.
빠악! 빠악!
내게 제대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한 거 맞나?”
도발까지 하니 사내들이 계속 달려온다.
누가 락의 사내들 아닐까 봐 끝까지 조를 이루지 않는다.
빠아악! 빠악!
용기와 객기를 구분할 수준은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이 통했던 걸까?
몇 번씩 얻어맞더니 몇 무리가 드디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명이 동시에 원을 둘러싸고 공격했다.
내력 없이, 외공과 초식 위주로만 공격을 막고 튕기고 피했다.
내게도 뭔가 있어야 이런 훈련도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원 없이 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끄으응, 죽겠네.”
잠깐 무아지경에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신음과 앓는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질린 표정으로,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또 어떤 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렇게 가지각색의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열심히 하신 거 맞습니까?”
“…….”
“실망했습니다. 열심히 하셨다고 하여 기대했는데…….”
도발은 그치지 않는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앓고 난 후에, 다음 훈련을 참여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병사들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자경단원들은 자율적으로 훈련에 참여하니 말이다.
모두의 표정이 같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분노에 가까운 표정이었고.
‘그래, 이 정도는 해야 열심히 할 맛이 나는 거지.’
덕분에 내일 훈련 불참하는 인원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때는 꼭 절 조금이라도 원 밖으로 밀어내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십 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을 받으며 움직였다.
* * *
“마을에 마물이라도 나타났느냐? 바로 보고를 했어야지!”
연병장에 들어선 브렌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신에 땀범벅에, 얼굴에 멍이 들고, 몇몇은 가벼운 상처까지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좀 격렬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병사들의 말에 브렌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훈련? 피까지 흘려 가면서?”
“훈련 중에 가끔 부상도 입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전부 다 말이냐?”
병사들의 변명에 브렌드가 반문했으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데. 혹시 공자님이 뭘 하신 건가?’
연병장에 늦게 온 이유는 하나다.
그건 로라스가 훈련에 참여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의문스러웠으나 로라스가 병사와 자경단원을 따로 훈련시키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난장판은 무엇인가?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 안 할 것이냐!”
병사들 중 최고참이 대답했다.
“정말 훈련을 했습니다.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공자님과 같이?”
“네. 공자님과 같이 훈련했고 격렬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단호한 대답에 브렌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열심히 훈련하다 다쳤다는데 뭐라 할 것인가?
‘내일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참여해야겠군.’
다음 날.
“굳이 브렌드 경이 참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병사들도 그렇고 자경단원들도 다친 이들이 많더군요. 훈련 중 질서가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니, 이번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브렌드는 로라스의 고민 어린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왜 저러지?’
굳이 자신을 참여하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브렌드 경, 한 달 정도면 될 듯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브렌드 경에게 득 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본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훈련은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거기에 득과 실을 따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꽤나 긴 대답에도 로라스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운 걸 보니 브렌드는 점점 더 알고 싶어졌다.
대체 왜 그렇게 훈련에서 자신을 배제시키려 하는지 말이다.
“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브렌드 경, 미리 말씀드리는데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마십시오.”
“네?”
“지켜만 보시고 개인 훈련에 집중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로라스가 그리 말하며 연병장으로 향했고, 브렌드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로라스와 브렌드는 연병장에 도착했다.
‘응?’
그리고 브렌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표정.
그건 마치 왜 여기에 왔느냐는 의미로 느껴졌다.
‘보면 알겠지.’
브렌드가 점점 의혹을 느끼며 생각할 때였다.
“대장님.”
그때 병사들 중 최고참이 그를 부르며 말했다.
“왜 오신 겁니까?”
“내가 훈련에 참여하는 게 뭐가 잘못되었나?”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뭘 말인가?”
“대장님이 참여하시면 될 훈련이 아닌데……. 아니, 오히려 그게 나은 건가?”
브렌드는 답답했다.
대체 무슨 훈련이길래 이리 말한단 말인가?
“지켜만 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도?”
브렌드의 물음에, 락의 병사들 중 가장 나이 많고 경력이 오래된 오블리는 다시 대답을 회피했다.
‘면전에서 대장의 위엄이 손상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블리는 근래에 간신히 포스를 느끼는 수준이나, 오랫동안 브렌드를 포함한 기사들을 많이 봐 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시그탑이면 모를까, 브렌드는 절대 로라스 소영주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소영주가 처참하게 자신들을 뭉개고 있는데, 거기에 브렌드까지 같은 꼴을 보이면 그의 위엄이 손상될 수 있음을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소영주께서도 대장님을 훈련에 참여시키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말을 해 보게.”
자신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브렌드를 보니, 아무래도 이 사실을 그만 모르는 것 같았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브렌드가 참여하면 한 대 때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구는 소영주를 어찌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오블리는 그리만 대답했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퇴보하는 것 같다.”
빠아아악!
“눈곱만큼이라도 나아짐이 있어야 하는데……. 재능이 없는 것인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인가?”
빠아악! 퍼어억!
“생각이라는 걸 하고 공격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점점 지루해지니,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차 없이 때리고, 가차 없이 사람을 모욕하는 로라스를 보며 브렌드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간 병사들은 물론이고 자경단원들을 존중하며 훈련을 해 오던 로라스였다. 그런데 오늘 이 훈련은 뭐란 말인가?
그들을 향한 말에 가시가 돋쳐 있고, 그들을 때리는 손에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냥 감정도 아닌 무시라는 감정이.
‘그래서였던가?’
브렌드는 근래 사람들의 몸에 상처가 나고,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블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날 믿지 못한 것인가?’
주군과 시그탑에게 듣기도 했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는 로라스가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렌으로 유학 가서 그 권신 에르페유의 눈에 들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위다.
자신의 나이 마흔둘.
시간으로만 따져도 로라스보다 그가 20년 이상 더 검을 휘둘렀다.
재능이 한계에 부딪쳐 마스터라 불리는 그 경지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한계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그러니 아직 아니다.’
브렌드의 눈빛이 변했다.
마음이 변하니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로라스가 저 작은 원 안에서 어떻게 발을 움직이는지, 그리고 손을 어찌 쓰는지.
보인다.
몸과 검이 일체인 듯 그 둘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고 있다.
‘돌고 돌아 원이라더니…….’
간단하고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나, 브렌드는 이걸 실제로 적용시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신감은 잃지 않은 채 신중해졌다.
로라스의 움직임을 얼마나 노려보았을까?
“으으으으…….”
신음 소리가 연병장에 가득 차기 시작했을 때, 브렌드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