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50)
“아버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추천을? 아는 사람이 있더냐?”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날 보며 물었다.
“아버지도 알고, 다른 분들도 아실 겁니다. 렘 아리사라고, 황금 상단의 상인 중 하나입니다.”
드리블이 말했다.
“렘이 상재에 밝고 공평한 거래를 하는 상인이라는 건 알지만, 그는 황금 상단 소속입니다. 거기를 버리고 저희 회계사로 올 거라고는…….”
아버지가 말을 받았다.
“혹시 이야기가 된 게 있느냐?”
“아버지만 허락하시면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야 괜찮은 선택이겠지. 나중에 상단이 오면 이야기해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했다.
보름 후.
마침내 마탑 건설을 위한 사람들이 도착했다.
사람을 모으는 기본은 건설이다.
물론 락에 건설할 마탑은 5층짜리의 작은 건축물이다. 하지만 마탑은 마탑이다.
다른 건축물처럼 돌과 흙, 나무를 사용하는 건 마찬가지나 다른 것도 들어간다.
사업 비밀이라 절대 알려 주지는 않았으나, 헤르메스의 말로는 마나석은 물론이고 갖가지 마법진을 위한 재료들이라고 했다.
백이십여 가구가 있는 락의 가구 수가 늘어났다.
마탑의 건설 기간은 3년.
그간에 함께 지낼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려는 사람들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락을 찾아올 것이다.
건설이 끝나면 마법사들. 그리고 마법사들과 그들을 따라오는 사람도 늘 테니 말이다.
조용하던 락에 활기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확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 * *
“번천, 주군을 뵙습니다.”
번천이 넙죽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더 컸나?’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위로는 더 성장할 수 없을 텐데, 3년 전보다 키가 더 커진 듯했다.
“열심히 했어?”
“열심히는 했지만 성과가 주군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길만 올바르다면 결국 도달하게 마련. 내 기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나 조급해하지는 마.”
“명심하겠습니다.”
시그탑에게 듣기로 번천은 마을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했다.
예상은 했다.
곰같이 우직하면서도 가끔은 너구리처럼 능글맞은 번천이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도 열흘 만에 자리 잡았는데, 마을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다.
“네게 줄 선물이 있다.”
그와 함께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얼마나 수련했는지 볼까?”
“저번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지지는 않겠습니다.”
“기대해 봐야겠네.”
“실망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뭔 일이 있었나?
생각 이상으로 씩씩한 것이 자신감 없으면 나올 수가 없는 태도다.
뭐, 이제 확인해 보면 될 터.
난 봉을 하나 들었고, 번천은 대검을 들었다.
“후우웁!”
길게 호흡을 들이쉬고 뱉는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잔뜩 스며 있었다.
좀 편히 하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대련은 실전에 가까울수록 좋은 법이니까.
“들어와.”
이 말을 기다린 걸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검을 들고 돌격하는 번천.
‘그럼 볼까?’
일단 확인할 것은 검에 실린 경력(經力)이다. 쳐 보면 알 것이다. 입문공을 훌륭하게 익혀 놓았는지 말이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타악!
그의 대검을 봉으로 친 순간 손에서 전해지는 감각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들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허리가 삐끗한 느낌이랄까.
그 탓에 크게 휘둘러져 오는 대검에 나도 뒤로 크게 물러났고, 대검이 곧추 날 따라왔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연거푸 대검을 쳐 냄과 동시에 경신법으로 검의 간격을 벗어나려 했다.
벗어나려 했다는 건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번천의 집요함이 돋보였다.
터어어어어어엉!
결국 내력을 끌어올려 대검의 검 면을 손바닥을 쳐 냈고, 큰 소리가 나며 번천이 휘청였다. 아마 내력이 전해져 손바닥이 엄청 저렸을 텐데, 용케 무기를 놓치지 않았다.
“우아아아!”
잠시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틈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없는 사이 이런 비무를 많이 했다는 증거다.
타악.
곧바로 나아가 그의 가슴을 봉으로 찔렀다.
“너무 빠릅니다. 어째 한 대도 못 때리는 건지…….”
번천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때리고 싶었던 거냐?”
“그게 아니라……. 그래도 저번처럼 맥없이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놀랄 정도였다. 움직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포스는 왜 그리 증강된 거지?”
제일 의문이다.
개천지보에서 가장 어려운 게 입문공이다.
까다롭고 어려운 건 둘째 치고 속도 자체가 더디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의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게…….”
번천이 쑥스러우면서도 웃는 얼굴인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레고레를 먹었습니다.”
“드레고레?”
“모르십니까? 그게 바위에 서식하는 작은 식물인데…….”
번천은 계속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드레고레는 중원에서 천년설삼처럼 영약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식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 바짝 차리고 갔는데 말입니다. 그만 본대하고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번천은 힘 좋은 역사이고, 나름 마법도 다룰 줄 아는 이다. 당연히 영지 토벌전에 참여했고, 작년에 산맥에 새로 생긴 던전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냥 배고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 먹었는데…….”
홀로 떨어져 던전을 며칠이나 헤맸다고 했다.
기름도 떨어진 상황이니, 식량이나 식수가 있을 리 만무할 터. 갈증과 배고픔에 한 오라기의 마나조차 쓸 수 없을 때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고 했다.
손에 닿는 느낌이 촉촉한 것이 이끼라고 생각한 번천은 그것을 마구 뜯어 먹었고.
“몸에서 열기가 치솟았다가 갑자기 추워지는 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주군께서 가르쳐 주신 포스 서클레이션을 필사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 겁니다.”
몸의 열과 냉이 동시에 들끓자 개천지보 입문공을 필사적으로 한 듯했다.
“여하간 그렇게 버티니 몸에서 힘이 생겨나더군요. 그래서 마법을 썼는데.”
그제야 자신이 먹은 게 드레고레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기연이구나. 대체 얼마나 먹었기에 입문공을 단숨에 뛰어넘은 거야.”
“그게, 그걸로 배를 채웠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아껴 먹었을 겁니다. 팔았으면 갑부가 되는 건데…….”
아쉽게 남은 건 몇 줌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쩌면 주군을 한번 이겨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딱 드리려고 했는데.”
번천이 품 깊이 손을 넣더니 천 뭉치를 꺼냈다.
“이게 남은 겁니다. 주군께 드리려고 몰래 꿍쳐 둔 겁니다.”
번천이 조심스레 수건을 펼치니 거기에는 몇 줌 되지 않을 것 같은 새끼손톱만 한 푸른 잎들이 있었다.
영초는 영초인 듯했다.
작년에 캤다면 말라비틀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약간 마른 느낌만 있을 뿐이다.
“날 주려고 보관했다고?”
“네. 귀한 거니까요. 제가 너무 많이 먹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내게 저 몇 줌의 영초는 우물물에 물 몇 바가지 붓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번천에게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는 영약일 터. 그것을 품에 간직했다가 내게 주는 그 마음은 절대 작은 게 아니다.
그냥 다 먹으라고 할까 하다가 받았다.
“고맙게 받겠다.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웃는 번천.
가슴이 따뜻해진다. 기분도 좋다.
“그럼 나도 내게 선물을 주마.”
나는 번천의 검에 손을 댔다.
“주군, 무엇을…….”
번천은 입을 열지 못했다. 검에서 오르는 은은한 푸른빛.
“이건…….”
“물의 마법이다.”
번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네가 배운 마법. 정식으로 다시 해 보자. 오로지 물의 기운만 담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마탑에서 검에 마법을 불어넣는 것을 보고 바로 생각난 것이 번천이었다.
물의 마법을 배우기 위해 물속에서 하루 종일 살았던 만큼 그는 이 마법이 절실했다.
덕분에 기괴한 자신만의 마나식을 만들어 냈으나, 마나 역류의 위험이 도사리기에 중지시켰다.
원래는 포스의 기운으로만 그것을 보충하려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네가 익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일단은 2서클, 제대로 하려면 3서클이 필요하다. 좀 억지이긴 하지만 너도 3클래스 마법사이니까.”
“감사합니다, 주군.”
우는 건지, 아니면 복수에 대한 결의를 드러내는 건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보니 또 안쓰러워진다.
“급작스럽게 늘어난 포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하자. 어차피 강화 마법은 마탑에 세워졌을 때 충분히 해도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녀석이 잘됐으면 좋겠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번천의 원수도 찾아봐야겠다.
“로라스.”
그때 에르자일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셔?”
“아! 인사해. 여기는 내 제자 번천.”
번천에게도 에르자일을 소개했다.
“번천, 여기는 내 선배 에르자일. 바깥 경험은 거의 없으니 네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는 것도 좋겠지.”
“번천! 인사드립니다.”
내 선배라는 말에 놀란 표정과 동시에 넙죽 허리를 숙이는 번천.
“네네…….”
약간 당황한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물 속성 마법이 필요해. 여유가 될 때 네가 좀 봐 줬으면 좋겠다. 마나는 있는데 혼자 익힌 거라. 그것도 문제가 될지 제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
“응.”
“번천, 에르자일은 5클래스 마법사야. 너도 마법을 배웠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번천의 놀란 표정이 경악스러움으로 변했다. 하긴 에르자일은 이제 스물이니 말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힘쓰시는 일이나 뭔가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잘 부탁해요.”
에르자일도 당황함을 지우고 미소로 답하는 걸 보니, 걱정이 조금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무슨 걱정이냐고?
혹시 번천이 능글맞게 굴다가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는?
아무래도 산적들을 개구리로 변신시킨 그녀의 모습이 너무 뇌리에 박혔나 보다.
‘번천도 마법을 알고 있으니 조심하겠지.’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에르자일, 너도 기초 체력 훈련과 기본 체술은 번천에게 배워. 몇 년 전에 시작했으니 잘 가르쳐 줄 거야.”
“너는 뭐 할 건데?”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하루 종일 너와 붙어 다닐 수는 없다.”
“알았어.”
“번천, 수고스럽겠지만 기본 훈련은 그녀와 꼭 동행해. 그리고 네가 용병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해 줘. 외지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같은 것들.”
“네, 주군.”
“그럼 시작해. 네 상태는 사흘에 한 번씩 계속 점검할 테니.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주력은 포스가 되어야 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번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에르자일 님, 아침에는 영지를 몇 바퀴 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이라 힘드실 테니 오늘은 조금만 달리겠습니다.”
바로 교관 모드로 돌변하여 에르자일을 끌고 달리기 시작하는 번천.
그 둘이 떠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근래 계속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지금 내 상태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개천지보 5보 촉천觸天(하늘을 만지다)의 경지에 이를 것 같았다.
그 경지는 모든 계획의 시작점.
문제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지만 이건 좀 지나친데.’
관조하여 점검은 수차례 했다.
주화입마의 조짐 따위는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속도를 올려도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천령개도 느리게 닫혔고, 환골탈태도 생각 이상으로 빨랐으니.’
하늘 산맥의 기운이 좋긴 좋은가 보다. 지금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자. 오늘 티타임은 이걸로 하고.’
드레고레를 귀한 차로 속이고 어머니에게 드릴 생각이다. 앞으로 티타임 횟수도 줄여야 하니 뇌물로는 적당할 것이다.
기분이 좋다.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