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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48화 (48/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8)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소풍 나온 애처럼 신나 하는 에르자일.

‘그래, 며칠이나 가는지 보자.’

영지로 돌아가는 길은 나와 에르자일 그리고 패스파인더(길잡이)인 중년 사내 한 명까지 셋이었다.

테라도 가고 싶어 했지만, 이제 막 탄력이 붙은 녀석이다. 입문공을 다 전수했고, 곁에 붙어 가르치지 않는 이상 센터가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하에 여기서 몇 년 더 수련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타고 갈 세 필의 말과, 짐을 실은 두 필의 말까지 총 3인 5마로 단출하게 출발했다.

할아버지부터 에르페유와 헤르메스, 심지어는 페컴마저 호위를 붙여 준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스케줄에 잡혀 움직이는 것보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에르자일이 저리 신나 하고 있으나 곧 알 것이다.

사람의 몸은 간사하다.

처음 며칠은 좋다고 할지 모르나, 매 끼니 누군가 차려 주는 걸 먹다가 그걸 직접 해서 먹어야 할 때.

밤마다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자다가, 스스로 경계를 서 줘야 할 때.

또 편한 침상에서 자다가, 흙먼지 날리고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망토로 몸을 보호한 채 자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노숙은 밥 먹듯이 한 기억이 있는데.’

나마저도 귀찮음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냥 마차 구해서 갈까?”

“용병을 좀 구하면 더 편하지 않을까?”

과연 에르자일은 딱 일주일 만에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따로 가랬잖아.”

“같이 가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런 것도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이게 힘들면 용병 생활 못 한다. 지금 얼마나 편하게 가는지 모르지?”

마물이란 것이 날뛰는 세계고, 무법자들이 판을 치는 시대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문제 한번 없이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지요.”

저 카발이라 불리는 패스파인더 때문일 것이다.

그는 노련했다.

필요에 따라 거리와 움직이는 시간을 조절했으며, 스케줄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지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바뀌었음에도 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처럼 노숙을 할 때도 아주 능숙하게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봐 준다.

단점이 있다면 과묵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게 오히려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런 직업을 지닌 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을 계속 떠벌리는데, 그런 게 없어 행공에 집중하기도 용이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식이 없는 건 아니다.

움직이면서 해당 지역에 관해 물어볼 때면 지역의 영주가 누군지, 무슨 특색이 있는지, 그리고 민심은 어떤지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런 사람도 필요하지.’

그도 영입하려 하는데 넘어올지 모르겠다.

그를 고용한 헤르메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귀족부터 용병들까지 그의 손님은 많았고, 덕분에 카발은 일에 선택권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보름.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니 서로 이런저런 대화가 조금씩 늘었다. 그래서 왜 우리를 안내하기로 했는지 물을 수 있었다.

“락은 메타린 평야와 하늘 산맥이 있는 곳이니까요.”

“와 보신 적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토벌 시기에 용병단을 안내한 적이 두 번 있지요. 사실은 아주 어린 공자님을 한 번 보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까?”

“네. 그게 8년 전이었을 겁니다. 아직 어리신데 움직임은 마치…….”

“하하하. 늙은이 같았다고요?”

“사흘을 머물렀는데 뒷짐을 지고 느긋이 움직이는 게 인상 깊더군요.”

카발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락은 멋진 곳입니다. 영주이신 에듀 님이 얼마나 고심하면서 가꾸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부친을 대신하여 감사드려야겠군요.”

“진심으로 나중에 락에 정착할 생각이 있습니다.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의 길을 안내할 수 있다는 건, 모든 패스파인더의 최종 목적이니까요.”

“지금이라도 정착하시지요. 당분간은 불편할 수 있지만 곧 락도 발전할 테니, 충분히 생활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그런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지금은 아직 탐색할 수 있는 지역이 남아 있어서.”

“아쉽군요. 락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저보다 뛰어난 패스파인더는 많습니다. 에듀 남작님도 그렇고 공자님도 계시니 금세 발전하겠지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에르자일이 끼어들었다.

“카발 님,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에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딱 한 번 가 봤습니다. 운이 좋아 선배 패스파인더로부터 그쪽의 지도를 입수했지요.”

“정말요? 그 두 곳은 어떤 곳인가요?”

“으음, 메타린 평야부터 말씀드리면.”

카발의 입이 다시 열렸다.

금세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락에서 하늘 산맥이나 메타린 평야 두 곳 모두 지척 거리이나, 그곳에 대해 세세하게 아는 것은 없다.

하늘 산맥도, 메타린 평야도 일정 지역 이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나랏법으로 금지시킨 건 아니다.

지금껏 그 안쪽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자연적으로 들어가서는 안 될 금지구역이 된 것이다.

카발은 혼자 두 곳을 가 보았다고 했다.

“사람이 갈 곳은 아닙니다. 그나마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라도 있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넓다고는 하나 그 안쪽은…….”

카발은 살짝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늘 산맥은 인간에 배타적인 이종족에, 메타린 평야는 마물과 거기 살고 있는 맹수들이 우글거립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단지 맛있는 먹잇감밖에는 되지 않지요.”

이종족이란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했다.

“락도 이종족과 약간의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요.”

“락이라 가능한 겁니다. 정확히는 에듀 남작님과 나이트 시그탑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다른 영지에는 그만한 실력자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늘 산맥의 이종족이 처음부터 그냥 거래를 튼 건 아닐 거란 뜻입니다.”

이종족이라……. 듣긴 했으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끔 용병단이나 트레저 헌터들 중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에렌에서도 보지 못했다.

“흔히 알고 있는 엘프와 오크는 그나마 양호하지요.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종족도 있어서. 그런 종족을 만나면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라.”

카발은 약간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가 금지 구역이 된 겁니다.”

“그런 금지 구역이 또 있습니까?”

새로운 질문에 다시 카발이 유수처럼 말을 쏟아 냈다.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패스파인더가 단순히 길잡이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카발을 고용하길 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긴 여정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에르자일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설 때마다, 그리고 밤마다 이것저것 물었고 카발은 친절히 설명해 줬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 때쯤.

“평야 외곽 쪽으로 빠져서 움직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락에 당도할 때까지 꽤나 신경 쓰이는 여정이 되겠지요.”

“신경이 쓰인다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거친 동네만 나올 테니까요. 그리고 산에 자리 잡은 마적 떼도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피난처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무법자의 마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네 곳이나 됩니다. 사실 평상시라면 문제 될 건 없는데…….”

카발은 에르자일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매지스터는 아무래도 후드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의 없는 자들이 많은 곳이라.”

이해했다.

에렌에서도 어떻게든 말 한번 붙여 보려는 사내들이 많은데 이런 곳에서야.

“네, 알겠습니다.”

에르자일 역시 이유를 짐작한 듯 별말 없이 동의하고는, 망토를 여미고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시 출발해서 산 하나를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도 산채 같은 게 있으려나.’

옛날에 상인 렘 아리사가 준 보고서가 떠올랐다.

근처의 무법지대는 물론이고 마적 떼의 활동 반경까지 조사되어 있었으나, 산적들에게 대한 보고는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카발이 안내해 온 길은 다르니 없다고 할 수 없다.

‘있으면 더 좋으려나?’

표국 사업을 생각한 적이 있다.

아직 락은 그런 사업을 벌일 정도로 크지 않아 생각만 한 거지만, 꽤나 유망한 사업이다.

‘만들어도 되고.’

자꾸 탐욕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주객전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 다짐했는데 말이지.’

여하간 카발을 따라 천천히 산을 올랐다.

“앞을 막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너무 놀라지는 마십시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카발이 그리 말했고, 그 말을 한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로라스.”

에르자일이 앞을 직시하며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보고 있다.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길목을 막고 앉아 있다.

“이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구먼.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있어.”

사내들의 행색이나 말투가 여지없이 산적이다.

‘기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그래, 표국 사업을 하려고 해도 저런 애들이 있어야 한다.

“패스파인더 카발이라고 합니다. 산의 주인들이십니까?”

그때 카발이 망토를 살짝 열어 패스파인더 길드의 발모양 배지를 보였다.

“젠장. 좋다 말았군.”

패거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긴. 그 인원으로 여기까지 오려면 패스파인더가 필요하겠지.”

“빠른 협상을 원합니다. 길드 소속이시라 이쪽 길을 택했습니다. 무리한 요구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협상? 좋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 보니 여기도 그런 오고 가는 돈 속에 우정이 싹 트는 것 같은데 말이다. 패스파인더가 그 중개 역할을 하고 말이다.

‘하긴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니까.’

그사이 거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카발이 미리 준비한 듯한 주머니를 꺼내어, 사내에게 건넸다.

“딱 적당한 금액이군. 경험이 많은가 봐?”

사내가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패거리에 눈짓을 하자, 길이 열렸다.

“이렇게 끝나는 거야?”

그때 들리는 에르자일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실소가 나왔다.

‘얘 뭘 기대한 거지?’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고, 뚫어질 듯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는 폼이 마치.

“손에 힘 풀어. 적대적으로 노려보지도 말고. 무난한 게 제일 좋은 거다.”

내 말에 작게 속삭이듯 대답하는 에르자일.

“길을 지나가는데 돈을 주는 게 어디 있어? 도적들이잖아.”

이래서 경험 없는 자들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세상 물정을 모르니 나서야 할 때, 그러지 못할 때를 구분 못 하고 나섰다가 독을 먹거나 등에 칼을 맞는다.

‘물론 저 정도는 혼자 처리할 수 있겠지만.’

헤르메스가 에르자일을 내게 맡긴 이유에는 이런 걸 가르치라는 것도 있을 터.

“돈 몇 푼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거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배때기에 칼 맞으면 죽는 거야.”

“저런 놈들에게 당하지 않아.”

“그래, 그렇겠지. 이리 적이 보이는 상황에서라면 말이지.”

그렇게 에르자일과 이야기를 할 때였다.

“거기 숙녀분은 불만이 많으신가 보네. 자신감도 넘쳐흐르시고.”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는데 들린 모양이다.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보며 입을 열었고.

“아직 멋모르는 아이들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카발이 급히 수습을 하려 했으나, 사내는 이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돌한 숙녀분 얼굴이나 볼까?”

“잠깐만!”

카발이 급히 다가왔으나 에르자일의 행동이 빨랐다. 후드를 벗으며 앙칼지게 외친다.

“돈이 필요하면 정당하게 벌어야지, 여기서 강도짓이나 하다니.”

좀 황당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읽는 책 중에 모험물도 있었나? 상황이나 대화가 무척 익숙하네.’

난 굳이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위해서 락까지 오는 거 아니겠는가.

일단 저 산적 무리 중 특출하게 눈에 띄는 놈은 없다. 몸뚱이와 숫자만 믿고 덤비는 놈들뿐.

“맹랑하군. 저 숙녀분은 아무래도 여기에 남겨 두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에르자일을 보며 발정 난 뭐 같은 눈빛을 하는 놈들.

못 봤다면 몰랐을까, 봤으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카발을 보고 제법 사내다운 분위기를 풍겼으나 산적 놈들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자 안절부절못하는 건 바로 카발이었다.

“혼자 처리할 수 있지?”

“공자!”

카발이 기겁하며 소리쳤고, 그런 그를 보며 태연하게 한마디 해 줬다.

“우리는 보내 준다고 하니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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