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7)
사실 그녀가 이 뻔한 술수에 속을 리는 없다. 알면서도 재미있는 마음에 넘어가 주는 걸 터.
‘이런 거래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지.’
난 말했다.
“종종 생각했습니다. 제가 마법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하지만 우리 락에서는 마법을 꿈꿔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으음…….”
“그래서 가능하면 락에도 스승님의 마탑 지부를 하나 만들어 주시면…… 제자는 물론이고 제 부친께서도 정말 감사드릴 겁니다.”
“락에 지부를 말이지.”
헤르메스가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녀로서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려나?’
그녀가 마탑의 최고 책임자라 하더라도, 마탑의 지부를 세우는 건 그리 쉽지 않은 문제다.
지부를 만들고 유지하는 필요한 돈이 문제가 아니다.
마법사 그 자체가 문제다.
마법사는 귀중한 자원이다. 3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도 드문데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는 전략무기로 대우한다.
그런데 지부를 세우면 그런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하고, 연구할 인원도 필요하다.
그래서다.
락에 지부를 세워 줬으면 하는 건.
마탑이 들어옴으로써 마법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들어옴으로써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람의 규모가 늘어나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오게 마련. 게다가 마탑 자체에서 소비되는 물건이 좀 많은가!
헤르메스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무리인가?’
토벌전에 마법사들을 정기적으로 파견해 주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니, 일단은 그것부터 이야기하려 할 때.
“좋아!”
“…….”
“어려울 것도 없지. 생각해 보니 락이 변방이긴 하나 하늘 산맥 아래에 있단 말이지. 실전 연습하기에 그만한 곳도 없고, 연구 재료를 수급하는 것도 용이할 테고.”
“정말이십니까?”
그녀는 씩 웃으며 반문했다.
“뭐야, 그 물음은? 안 될 거라 생각하고 부탁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주인인데 세우고 싶으면 세우는 거지. 다만 시간은 조금 걸려. 그것도 알지?”
“약속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리 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대신 이번에 에르자일하고 같이 날 잘 보조해야 한다. 네 이론이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르페유에게 보내지 않을 명분이 생겼는데 말이지.”
헤르메스가 빙그레 웃더니 에르자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소동이 있었다면서?”
“소동요?”
“살롱. 너를 두고 두 남자가 결투를 벌였다던데?”
헤르메스의 말에 에르자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런데 오랜만에 나갔네.”
“로라스가 나가자고 해서…….”
“좋네. 든든한 보디가드도 있고. 그리고 이번 소동 주인공들이 날파리들도 아니고.”
“관심 없어요.”
에르자일이 무표정하게 말했지만 헤르메스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마란드가의 아이라서 봤는데 생긴 것도 그 정도면 훌륭하고. 싸가지도 있는 것이 괜찮던데. 그리고 걔랑 상대했던 바오한이라는 애도 쓸 만해.”
“스승님…….”
“가문이야 아마란드가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나이에 자기 용병단을 꾸리고 있는 애니까.”
“아. 아. 아.”
헤르메스는 두 귀를 막고 소리를 내는 에르자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날 보며 말했다.
“잘 간수하라고, 로라스.”
응? 뭔 소리야? 저건 또.
* * *
헤르메스에게 대마도사란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내력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그녀가 내게 속성 심법을 하루 배우고 바로 적용했고, 닷새 후에는 나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마나와 포스를 사용했다.
그야말로 미친 재능이라 할 만했다.
덕분에 내 속도도 빨라졌다.
포스에서는 내가 사부 격인데 그녀와 합을 맞추지 못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게 한 달.
헤르메스가 내 이론을 실제로 증명해 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졸지에 마검사, 아니 마투사라고 해야 하나?”
농담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다.
헤르메스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덕분에 위로 올라갈 수 있겠구나.”
헤르메스가 가리킨 위는 텅텅 비어 있는 마탑의 9층이다.
비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아홉 개의 룬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없다. 헤르메스 역시 마탑의 주인이면서도 9층을 비웠다.
물론 8층을 혼자 쓰고는 있으나, 9층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삼는다고 했다.
철두철미하고 승부욕이 저리 강하니 대마도사가 되었을 터.
여하간 벽이 아닌 태산 같은 장애물이 버티고 있는 9클래스의 경지를 엿보기 시작했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을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네 덕분이야. 에르자일도 예상보다 빠르고 확고하게 5클래스에 오른 것도 그렇고.”
“그게 어디 제 덕이겠습니까? 그간 해 왔던 노력이 빛을 발한 거겠지요.”
헤르메스는 웃으며 말했다.
“좀 잘난 체해도 된다. 너무 겸손 떨어도 밥맛이 없다니까.”
“부지런히 쫓아서 올라가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걱정하지 마. 락에 지부를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까.”
말을 살짝 흐리는 것만으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헤르메스. 그녀 역시 거래에 익숙하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마탑이 하나 있으면 수련에 도움이 되니까요.”
“어? 가려고?”
“여기에 있은 지도 3년이 되었으니까요. 훌륭한 가르침도 받았고 혼자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보고 싶습니다.”
헤르메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그동안 한 번도 집에 간 적이 없었지. 그래도 그간 해 왔던 게 아쉽지 않아? 락으로 돌아가면 여기에서 받는 지원을 받지 못할 텐데.”
“길을 보았으니 걸으면 도착하겠지요. 그게 더 필요합니다.”
“아쉽긴 하지만 네 판단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걱정하지 않는다. 바로 돌아갈 건 아니지?”
“네. 한 달 후로 생각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다. 그 전까지는 모든 준비를 끝내 줄게. 네게 그 정도는 해 줘야겠지.”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런데 에르자일을 그쪽으로 수련 보내려 하는데, 괜찮겠지?”
어라? 이건 예상치 못한 물음이다.
“에르자일을요?”
“큰 제자 놈에게 보내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락에 보내도 되잖아. 거기 수시로 마물을 토벌하는 곳이니 실전 경험도 충분히 쌓을 수 있고.”
“그렇긴 하지만…….”
“큰 녀석이 돌봐 주겠지만, 그래도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데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 그리고 에르자일이 있으면 너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도움이야 될 것이다.
허공에, 사물에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그것을 받아 줄 사람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
“에르자일의 선택이 중요하지요. 얼마 전에 용병단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너라는 선택지가 없을 때였고. 이미 물었는데 자기는 좋다고 하던데.”
“에르자일이 좋다고 했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사실 득이 됐으면 됐지, 해 될 건 없으니까.
“꽉 잡으라고. 에르자일이 인기가 좋은 건 너도 알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이 없어서 넘어는 가는데.
‘에르자일은…….’
뭔 생각을 하는 거냐? 훌륭한 파트너지.
* * *
에렌성에 3년 넘게 있더니 인사할 사람이 많다.
에르페유와 헤르메스, 그리고 포플러와 시험 동기들은 물론이고 여기서 알음알음 알고 지냈던 귀족과 그 자제들,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이들까지 전부 얼굴을 보고 작별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끝내 밥값은 하지 않고 가는구나.”
“부자 할아버지를 둔 손자의 특권이지요.”
“고집은……. 금방 후회할 거다.”
“안 돌아가도 후회할 겁니다. 그럴 바에는 돌아가서 후회할 겁니다.”
할아버지의 이마 주름이 깊어진다.
뭔가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
절대자는 고독한 법인데 아들이 셋이나 되고, 딸도 여섯인데 곁에는 그 누구도 없다.
아들들은 다음 대 가주가 자신이라 굳게 믿으며 각기의 영지에서 힘을 키우고, 딸들은 콩고물이라도 하나 떨어지길 바라며 제 남편을 몰아세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만…….’
분명 자식들도 무한 경쟁을 시켰을 것이고, 가족의 정은커녕 득과 실만 따지는 관계일 것이다. 그래도 내게는 조손의 정―물론 그 마저도 재능 때문이겠지만―을 보이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네 나이 때는 향수병보다는 새로운 곳을 보는 설렘이 더 커야 하는 법인데. 못난 놈.”
“더 잘난 놈이 되어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
“밥값은 그때 꼭 하겠습니다.”
“됐다. 차려진 밥상 스스로 망치겠다는데 더 말해 뭐할까.”
아쉬운 마음이 심술이 되면 곤란한데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시는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아닌 척하면서 뭐라도 해 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도 보고 싶다. 시그탑이 마스터에 올랐는지 궁금하고 영지민들이 포스 서클레이션을 제대로 구사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에렌에 있으면 더 많은 이득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선후가 확실해야 한다.
락을 키우기 위해 여기에 왔지만, 키우는 이유 자체는 전생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다.
부족함도, 과함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이후 사랑을 듬뿍 주는 그런 삶.
“종종 찾아 뵐 것입니다. 볼 때마다 기뻐하실 겁니다. 할아버지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잘난 놈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네가 잘나면 네가 좋은 거지, 내게 뭔 득이 있다고.”
“다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키우세요. 재미있으실 겁니다.”
“건방진 놈!”
탓하듯 한마디 하시지만 주름살은 펴져 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만수무강하십시오.”
“야망이 있으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늦지 말거라.”
미소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기는. 따라오너라.”
할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주시렵니까?”
“쓸데없는 질문은. 여전히 그걸 가지고 싶은 거냐?”
말보다는 행동이다.
컬렉션 앞으로 다가가 커터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바닥에 엿가락 달라붙듯 감긴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날 위한 무기다.
사실 무기는 점점 의존도가 떨어지겠지만, 어쩌겠는가. 처음 봤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하나 더 골라라.”
“하나 더 주시렵니까?”
“네 것 말고, 네 아비 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하여 속내를 보이지 않지만, 찰나 내 눈을 피하는 눈동자를 보았다.
모른 척하고는 무기를 살폈다.
‘어느 것이 어울릴까?’
아버지는 전형적인 기사다. 그 말은 검사란 뜻이기도 하니, 검을 살폈다.
수십여 자루의 무기 중 평범한 것이 없다.
마법 무기이거나, 특별한 재질로 만들거나, 그도 아니면 장인 중의 장인들이 만든 것뿐이다.
아버지가 쓸 것이니 지식을 총동원해 세 자루의 검을 추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아이스 마법이 걸린 검과 오델리움이란 금속으로 만든 검. 그리고 현시대 최고의 장인 마스터라 불리는 아노바라가 만든 검이었다.
각기 다른 장단점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렸다.
“오델리움으로 만든 그 검은 네 부친이 좋아라 했었지. 내 때가 되면 주려 한 건데.”
고민은 끝났고,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노친네, 진작 이야기했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