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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46화 (4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6)

똘마니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금발이 처리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분명 예상 범위 내였는데 말이다.

‘파리가 아니었던가?’

왈패 따위는 단숨에 쓸어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패거리 중 리더로 보인 갈색 머리, 즉 황발이 버티고 있었다.

금발이 멋들어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주먹을 뻗고 있는데, 황발도 만만치 않다.

부우우웅.

금발의 움직임에서 파공음이 울려 나온다.

역시 제법이다.

단단한 하체가 가져오는 안정감을 빌려, 제대로 허리를 쓸 줄 아는 움직임이다.

타악! 타악!

하지만 상대 황발도 만만치 않다.

맞을 듯하면서도 제대로 방어하며 흘릴 줄 안다.

난타에 가까운 공방임에도 두 사람의 눈빛은 가라앉았다고 할 정도로 침착했다.

“놈!”

적수공권으로는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는지, 금발이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대자 황발이 말했다.

“이쯤 하지요. 일행이 입 잘못 놀린 대가는 이미 치른 것 같은데.”

황발은 그리고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거기 계신 숙녀분에게도 무례를 저지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우셔서 일행이 가볍게 입을 놀렸고,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으음. 파리가 아니라 저놈도 벌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에르자일은 그쪽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내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한마디 했을 뿐이다.

“빨리 가.”

이렇게 가면 많이 민망해질 텐데 말이다.

‘뭐, 계속 여기 있다가는 에르자일이 민망해질 테니.’

악의 없는 것 정도는 알았으니, 둘이서 잘 해결하겠지.

에르자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움직였다.

배고프다.

* * *

헤르메스가 돌아왔다.

“내 귀염둥이들. 보고 싶었지?”

보자마자 나와 에르자일을 안으려는 그녀에게 멀찌감치 떨어졌다.

‘말투가 적응이 안 돼. 나이를 생각해야지.’

헤르메스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가끔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쫓아다니는 사내들이 있다. 당연하다.

그녀는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다시 보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다. 에르자일과 함께 움직이면 큰언니와 여동생처럼 비칠 정도로 젊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봐라.

그녀는 8서클의 매지스터.

대륙에서도 대마도사라 불리는 여인이다.

그 경지에 이르려면 오랜 시간을 수련해야 한다. 대마도사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하나, 사십 중반이란 말이다.

“무슨 성과는 있으셨어요?”

에르자일이 그녀에게 안긴 채로 물었다.

“성과는 무슨, 매번 똑같은 이야기뿐이지. 늙은이들이 새로운 걸 해 볼 생각은 안 하고 제 밥그릇만 챙기려고 해.”

헤르메스는 짜증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에르자일이 5클래스 마법에 성공했음을 알렸기 때문이다.

“반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잘했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원래 그 단계가 제일 지랄맞단 말이지. 그만큼 얻는 것도 많고.”

“로라스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정확히 그의 새로운 이론으로 다섯 개의 룬을 다뤄서. 스승님에게 확인받고 싶었어요.”

“새로운 이론? 흥미가 가네. 바로 볼까?”

방금까지 마차를 타고 긴 여행을 했지만, 헤르메스는 여독 따위는 없는 듯 곧바로 우리와 함께 연습장으로 향했다.

에르자일이 연습장에서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고, 헤르메스는 흥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난?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내가 만들어 낸 방법을 헤르메스가 어찌 평가할까?

에르자일은 시전의 기교 없이 정직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순수한 마나의 기운을 모으고.

그것을 허수아비까지 흐르게 하여.

마나를 증폭해 고리 모양으로 변형시켜 유지하고는.

그것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물리력을 더했다.

파아악!

허수아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빛의 고리가 단숨에 조여 허수아비를 파괴시켰다.

에르자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순수한 열망이 그대로 어렸다.

나 역시 지금은 비슷한 표정이다.

‘눈치챘을까?’

시선 속도가 늦었지만 그것은 헤르메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지금보다 배는 빠르게 할 수 있다.

또한 마법 형상화 과정이 너무 명확하여 실전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막 5클래스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가 실전에서 그대로 쓸 리 없다.

당연히 손에 익기 전에는 익숙한 4클래스 이하 마법을 쓸 테니 그것 역시 문제 될 게 없다.

다만 저 일련의 과정에 약간의 편법이 섞였다는 것이다.

“으음.”

헤르메스가 묘한 표정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나가 아니야!”

역시 눈치를 챘다.

“네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을 텐데. 마나를 흘려보냈을 때 그건 순수한 마나가 아니었잖아!”

그것도 정확히.

“스승님…….”

헤르메스는 움찔하는 에르자일에게서 시선을 돌려 날 쳐다봤다.

“로라스 네 작품이라고?”

“네.”

“그 흐르는 힘. 포스에 근거를 둔 건가?”

묻는 헤르메스의 표정이 묘하다.

‘뭐지?’

입을 열려다가 급히 다물고 생각했다.

‘잘못되었다면 잘못되었다 했을 터. 저 아쉬워하는 표정은…… 바라는 대답이 있는 것인가?’

이런 바보 같으니. 답은 금방 나오지 않는가.

“포스는 아닙니다.”

포스와 마나의 대립은 꼭 헤르메스와 에르페유의 문제가 아니다.

무인들과 마법사들이 굳이 적대하지는 않지만 서로 자신의 힘에 자존심이 대단한 부류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마탑을 가지고 있는 대마법사.

당연히 헤르메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마탑에서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포스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냔 말이다.

“체술, 각종 무기술이 포스를 이용하는데, 마나를 이용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봤습니다.”

방향을 잡으니 말이 청산유수처럼 나온다.

각 가문의 포스와 거기에 걸맞은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마나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로 시작한 의문.

그래서 마법을 시전하며 여러 가지 궁리하다가 발견한 방법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일리 있는 주장 아닐까?

“역시! 마나는 아니나 포스도 확실히 아니라고 생각했지.”

곧바로 호응하는 헤르메스를 보니 생각이 더더욱 확고해졌다.

‘내공을 꼭 포스라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니.’

실제로 단전의 힘을 키우는 내력과 달리 포스는 좀 더 많은 힘을 키우는 법이 있다. 담는 방법도 차이가 있고 말이다.

무학의 이론이 빠삭한데 내가 그럴듯하게 내공을 마나에 빗대어 설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로라스 이 귀여운 것! 너는 정말!”

덕분에, 아니 그 탓에 또…….

그녀를 밀어내며 물었다.

“마나와 함께 사용하는 게 문제는 없을까요?”

“일단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혀! 더 연구하고 실험해 봐야겠지만 훌륭해. 이걸 하나의 클래스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헤르메스가 에르자일을 보며 말했다.

“인정받지 않아도 좋아. 지금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클래스를 더 높일 때 트레이닝 방법으로 정립한다면 학회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그녀는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하나의 클래스를 올리는 데 애를 먹고 있는데. 이 방법이면…….”

“스승님, 그럼 전…….”

에르자일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자, 헤르메스는 말했다.

“나는 인정하지만 뒷말 나오게 하지 않으려면 몇 달 더 연습하자꾸나. 감각을 익혔지 않느냐? 높은 벽에 사다리를 놓았으니, 올라가다 보면 벽을 넘어서는 건 시간문제지 않을까?”

“네!”

헤르메스의 인정에 에르자일이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다 잘 풀린 건가? 헤르메스가 이리 말하는 걸 보면 주화입마, 아니 마나 역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그렇게 생각할 때 헤르메스가 다시 날 보며 말했다.

“네 이름으로 발표하지. 정말 모든 학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스승님.”

“말하거라.”

“이건 제 이름이 아닌 스승님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헤르메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로라스! 넌 내가 제자의 공적을 가로채는 그런 비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리가요! 제가 막연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대충 실체화는 시켰으나 이걸 이론으로 정리하는 건 또 다른 문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네가 할 수는 없지만 결국 이건 네 이론이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충분히 정립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시간이 걸리지요. 수많은 이론이 쏟아지는데 그중에 이와 비슷한 이론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굳이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방법은 무척 획기적이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네가 포스를 배웠기에 떠오른 발상일 터. 마법 역사에 네 이름을 남길 기회를 뺏고 싶지는 않다.”

의외다. 공명심도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긴 그런 신념을 가졌기에 대성했으리라.

“그게 어찌 뺏는 겁니까?”

난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고 싶다. 내게 마법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기는 건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제 스승이 헤르메스 님이고, 헤르메스 님이 아니라면 애초에 생각조차 못 했을 방법!”

“…….”

“제 미진한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해 주실 수 있는 것도 스승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뺏는다는 표현은 너무 지나치지요.”

그녀는 물끄러미 날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입꼬리를 올렸다.

“로라스,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네. 에르페유와 나한테 양다리를 걸친 것치고는 감동적이기까지 해.”

“양다리라니요, 스승님.”

“마법 하나만 파도 끝이 없는데, 포스까지 배우고 있지 않니.”

“어찌 됐든 스승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이지요. 그리고 언제까지 십대 마법사니, 오대 마도사니 하는 말을 들으실 겁니까? 스승님께서 이번 이론을 정립하셔서 발표하시지요.”

“호호호. 처음에는 무뚝뚝하다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말솜씨가 좋아지는구나. 에렌의 영향인가?”

“제자는 사실만을 말할 뿐입니다. 솔직히 스승님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가 아니겠습니까?”

“얘도 참!”

헤르메스가 손사래를 쳤지만,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좋아! 네 말대로 하자. 하지만 내가 정립했다 하나 이론은 너의 것. 너와 내 이름 동시에 거는 거야.”

“정말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마나석부터 시작하여 그간의 교육까지. 지금까지 받기만 했는데, 이런 걸로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는 대만족입니다.”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나.

내가 이리 사람을 잘 띄워 줄 줄은 나도 몰랐다.

‘뭐,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건 아니겠군.’

전생에서 내게 아부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들은 가락이 있는 거다.

여하간 굳이 헤르메스에게 공적을 미루고 이리 좋은 말만 하는 건 필요해서다.

‘받았다 생각하면 반드시 돌려주려 할 터!’

헤르메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그럼……. 하지만 보조로라도 이름은 올려야겠다. 에르자일까지. 훌륭한 데뷔 무대가 될 거야.”

“감사합니다! 스승님.”

에르자일이 옆에서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럴 애가 아닌데 왜 이리 좋아하지?’

아무래도 마법학회에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난 헤르메스를 슬쩍 쳐다보았고.

“그나저나 오자마자 제자가 이리 큰 선물을 안겨 줬는데, 난 뭘 해 줘야 하나?”

역시, 그렇게 나와야지.

“그간 해 주셨던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뭘 더 해 주십니까? 제자는 그런 게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부채질은 해 주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마나석은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주는 첫 선물이었고. 으음, 혹시 가지고 싶은 거나 바라는 게 있어? 내 능력 안에서라면 반드시 들어줄게.”

됐다!

“정말 필요한 게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남들이 받지 못하는 특혜라는 걸 잘 압니다.”

“네가 여기서 받는 건 내 제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고. 말해 봐.”

두 번 겸양을 떨었으니 됐으려나? 괜히 한 번 더 거절했다가 이 기회를 놓치면 너무 아쉽지.

“저기……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려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헤르메스의 눈꼬리가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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