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5)
하루를 수련하면 그만큼 강해진다는 체감이 들 정도로 성취가 높고 빠르다.
“봤어? 방금?”
에르자일의 성취는 나보다 더 빠르고 높았다.
“봤다.”
“내가 해낸 거지……?”
에르자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안 그럴까.
5서클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반년 이상을 헤맨 탓에 괴로워하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그녀였다.
‘확실히 기운을 다루는 건 타고났어. 아니, 오성이 타고난 건가?’
환신조화심법이 속성 무공이나, 그녀의 진도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고작 보름 만에 환신조화심법의 진의(眞意)를 깨닫고, 다시 보름이 지나니 그걸 100% 활용했다.
이후 열흘이 지난 오늘 드디어 5클래스의 마법 시전에 성공했다.
물론 무공으로 편법을 쓰긴 했으나, 어찌 됐든 마법 시전에 성공했으니 곧 다섯 개의 룬으로도 성공할 것이다.
“로라스! 넌 정말 대단해!”
물론 내가 대단한 건 알고 있긴 한데.
“네 덕분이야!”
헤르메스나 에르자일이나 왜 그리 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좀 떨어지지?”
“아! 미안.”
“다 큰 처자가 어딜 그리 덥석덥석 안아. 그러다가 결혼 못 한다.”
“뭔 소리야, 난…….”
“마나랑 결혼했다는 둥, 평생 혼자 살 거라는 둥 그런 말 하지 말고. 세상 삼대 거짓말 중 하나니까.”
“…….”
“여하간 축하는 해야지.”
그리 고생했으니 축하도 해 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한 달 넘게 햇볕을 못 봤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괜히 희멀건 게 아니다.
마탑에 처박혀 지식욕만을 채우니, 당연히 햇볕을 볼 수가 없어서다.
“나가자.”
“응?”
“나가서 밥 먹자.”
“밥은 여기가 제일 맛있어.”
헤르메스는 이 마탑에서 오로지 마법만 집중하면 되는 환경을 만들어 뒀다. 먹는 것, 자는 것. 그리고 훈련 도구들 대부분 바깥에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나나 에르자일의 경우는 전부 최상급이다.
“밥만 먹으려고 나가는 게 아니잖아. 햇볕도 좀 보고, 콧속에 바람도 집어넣고 하는 거지.”
“굳이…… 그냥 안에서 먹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르자일은 나가는 게 탐탁지 않은 것 같다.
“그럼 넌 그냥 여기 있어.”
그리 말하고 움직이니 금세 뒤쫓아 온다.
그렇게 에르자일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가는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것 같더니, 막상 나오니까 애처럼 신나 한다.
“스승님하고는 가끔 같이 나왔지.”
가끔 나왔단다. 문제는 그 가끔이 일반인의 기준하고 다를 뿐이다.
한 달에 한두 번?
헤르메스도 생각이 있는지 그래도 무슨 모임이나 파티 같은 데 종종 에르자일을 데리고 다녔다.
그마저도 대부분 마차로 이동하고, 실내에만 있으니 이리 바깥에서 햇볕을 맞으며 걷는 건 1년에 한두 번일지도 모른다.
“좋네. 근데 따가워.”
“하도 햇볕을 안 봐서 그래. 앞으로는 종종 나와. 기본 체력도 좀 기르고.”
“스승님이 오시면 나도 이제 마탑에서 나가게 될 거야. 말했잖아. 다섯 개의 룬을 다루는 순간 나가서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헤르메스의 다른 두 제자가 외부 활동 중이라고.
에르자일에게 물었다.
“너는 뭘 할 건데? 용병? 헌터?”
“아직 모르지.”
“기왕이면 사형이 있다는 쪽으로 가. 너 혼자 돌아다니다가 죽는다.”
빈말이 아니다.
뛰어난 마법사면 뭐하는가? 세상 물정 모르니, 어리바리하다가 죽기 딱 좋은 스타일인데.
‘게다가 여자 혼자? 턱도 없는 소리지.’
진심으로 걱정된다. 어느 정도는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
“사부께서 대사형이 있는 용병단으로 보낸다고 하셨어.”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로라스,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뾰로통한 표정의 그녀를 실제로 무시하고 햇볕 잘 드는 찻집 하나를 찾았다. 돌출되어 있는 2층 테라스가 제법 깔끔해 보였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니 품위 있어 보이는 중년 여자가 인사를 건네다 말고 흠칫한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처음 보시는 분들이군요.”
그것도 잠시, 정중히 묻는 말에 대답했다.
“처음이야. 이 층 테라스에 앉고 싶은데.”
“우리 살롱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인데, 혹시 누구의 추천을 받고 오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닌데. 회원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한가?”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 그러고 보니 행색을 생각 못 했다.
난 그냥 편한 옷차림이고, 에르자일은 부스스한 그 상태였다.
기분 나빠 할 필요 없다.
이곳이 정말 그런 살롱이라면, 눈앞의 중년 여자의 반응은 오히려 우리를 배려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어디 차 마실 곳이 이곳만 있을까?
에르자일을 데리고 나오려는데 그녀가 한마디 한다.
“왜? 위층 예쁘던데?”
그러고는 중년 여자를 보며 말했다.
“위에서 차를 마시고 싶어요. 안 될까요?”
여인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살짝 멈칫한다.
“이런. 제가 매지스터를 몰라봤군요. 에르자일 님이시죠?”
“어? 저 아세요?”
“이 자리에서 살롱을 하는데 매지스터를 몰라보면 안 되지요. 이리 오세요.”
여인은 우리를 이 층 테라스로 안내했다.
“헤르메스 님도 가끔 우리 살롱을 찾아오시지요. 아까 몰라봤던 건 비밀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헤르메스 님이 즐겨 드시는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뭐든 좋아요.”
“네. 앉아 계세요.”
여인이 아래로 내려가니 에르자일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날 어떻게 알지? 처음 보는 분인데?”
차림을 신경 쓰지 못했는데, 에르자일의 외모도 생각 못 했다. 어디서든 눈에 띌 외모 아닌가?
그리고 여기는 여인이 말한 대로 마탑 근처이고.
그래도 눈치도 빠르고, 대응도 기민한 여자다.
“헤르메스 님이 너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 보지.”
그리 대꾸해 주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햇살이 따갑기는커녕 포근한 게 기분이 좋다.
가끔 이리 멍하게 있을 필요도 있는데, 급한 성격 어디 가겠는가? 그간 목표만을 향해 너무 달린 느낌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향기 좋은 차가 나오고, 눈을 감은 채로 이 여유를 충분히 만끽하려는데.
“공자님, 그리고 레이디.”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과 함께 우리를 불렀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니 한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혹시 제 주인께서 차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중년인의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에는, 우리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젊은 사내가 보였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에 망토까지. 게다가 말끔하게 정리된 금발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아! 그렇지.’
웃음이 나왔다.
느긋한 여유를 깬 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꽃에 벌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떡할래?”
하지만 내가 꽃은 아니니 에르자일에게 물었고.
“아뇨. 저희도 돈 있어요. 대접 같은 거 받을 필요는 없네요.”
에르자일은 단번에 거절했고, 중년인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르자일은 정말 순수하게 중년인의 물음에 맞는 답변을 한 거겠지만, 중년인 입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속으로 다시 웃음이 나왔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텐데.’
당황한 중년인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주인이라 칭했던 청년과 뭐라 속닥이는 모습이 보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딱 맞춰서 일어나는 청년.
‘암! 그 정도 용기는 있어야지.’
귀찮기보다는 흥미롭다.
사실 내게 이런 상황은 생소하지 않다.
전생에서 곽아와 잠행을 나갈 때, 십중팔구 일어나는 일이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파리들이 꼬인다고 엄청 화를 냈었지.’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홀짝이는 에르자일을 봤다.
부스스한 모습이라 하나 그 외모가 어디 가지는 않는다.
“햇살이 좋지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청년이 말을 걸었다.
‘으음!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데.’
꽃에는 대부분 벌이 날아들지만 가끔 파리도 꼬인다.
하지만 이 녀석은 최소 파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하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정중하게 물러가는 걸 보고 예상은 했다.
‘보통 우리 주인은 어느 가문의 누굽네 하는 뻔한 소리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말이지.’
청년이 그렇게 말을 걸었음에도 에르자일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아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다.
“좋군요.”
내가 한마디 받아 주자, 청년은 반가운 기색을 하며 말했다.
“여름임에도 에렌이 북부라 크게 덥지도 않고 햇살을 즐길 수 있어 더더욱 좋지.”
내게 그리 말하고는 에르자일에게도 입을 연다.
“그렇지 않습니까, 레이디?”
어려 보이는 건 나나 에르자일이나 마찬가진데, 왜 나한테는 평어고, 저쪽엔 존대지.
물론 그것도 이해한다.
‘청춘이다.’
여전히 그에게 반응하지 않는 에르자일을 보니, 괜히 안쓰럽기까지 하다.
‘왜 그러지?’
아무리 맹하다 하나 저리 말을 걸었는데 모를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사람을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잖아.’
귀족부터 마탑에서 일하는 하인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게 에르자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걸 보니 무슨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다.
‘혹시 아는 사인가?’
청년 입장에서 많이 무안한 상황일 때.
휘이이익!
아래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예쁜데.”
“레이디, 날도 좋은데 우리랑 같이 산책이나 할까?”
껄렁거리는 한 패거리의 젊은이들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 동시에 두 가지 유형인가?’
지금은 꽃에 끌려 벌과 파리가 동시에 꼬인 꼴이다.
‘벌은 어찌 대처하려나?’
“대낮부터 숙녀분을 희롱하려는 것이냐? 당장 사과하고 물러가라!”
목소리에 제법 힘이 있다.
걸어오는 모습으로 제법 단련을 했다는 건 알았지만, 포스도 상당한 듯했다.
“그만들 해라. 여긴 에렌이다.”
패거리 중 중앙에 있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입을 열었고, 누가 봐도 똘마니들이 분명한 사내들이 투덜거렸다.
“그냥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여자 앞이라고 괜히 저쪽이 발끈한 거지.”
갈색 머리의 청년이 뭔가 입을 열려는 순간.
휘릭!
금발 청년이 먼저 테라스에서 그대로 밑으로 날아내렸다. 망토가 펄럭이는 게 제법 멋들어진 모습이다.
‘암! 이리 잘 보일 기회를 놓치면 바보인 게지.’
그런데 에르자일이 그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걸 알까?
좀 안쓰럽다.
여하간 금발 청년. 길다. 금발이 내려가니 패거리는 흠칫하면서도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금발을 둘러쌌다.
“숙녀분의 명예를 더럽히는 저급한 놈들이니 예의를 바라는 게 무리지만 보는 눈들도 없구나. 마지막 기회다. 당장 사죄하라.”
금발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름기 좔좔 흐르는 말을 잘도 한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때 금발을 시중들던 중년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주인이 질 좋지 않은 패거리에 둘러싸였는데도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내 일이라면 짜증 났겠으나 남의 일이니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밥 먹는다고 했잖아.”
어라?
“다른 데 가자.”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르자일.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눈짓으로 아래쪽을 가리키니 시큰둥함을 넘어 얼굴에 짜증이 잔뜩 어린다.
이제야 밖으로 나오는 걸 싫어한 이유를 알겠다. 가끔 나왔지만 그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벌이 어찌 파리를 상대할지 궁금은 했으나, 에르자일의 저런 표정을 보면서 지켜볼 생각은 없다.
“그럼 가자. 이번엔 밥 진짜 밥 먹으러.”
“응.”
에르자일도 좋다고 일어나니, 당황한 건 금발을 모시던 하인이었다.
“저…… 이렇게 가시면…….”
그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난 로라스 베스타인. 저 공자도 이름 있는 분일 텐데 언젠가는 다시 보겠지요.”
이름만 알려 주면 충분할 것이다.
중년인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베스타인가의 공자님이셨군요. 제 주인께서는 아마란드 가문의 올랜드. 기억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금발도 그랬지만 눈앞의 하인조차 격 있는 대응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명문가의 사람들이다.
‘그래, 좋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격은 있어야지.’
아마란드는 제국 남쪽의 대영주 가문.
베스타인의 이름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지만 제국의 삼대공작의 지위를 가진 가문이다.
할아버지 입에서도 ‘그나마’라는 수식어가 나오긴 했지만, 가문의 경쟁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 사람이 에렌까지 무슨 일이지?’
의문을 뒤로하고 중년 시종에게 말했다.
“반드시 다시 보겠군요. 그럼.”
그렇게 마무리하고 에르자일과 함께 내려왔는데 말이다.
‘어라?’
아래에서는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