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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44화 (4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4)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착한 손자가 되고 싶습니다. 말씀하세요.”

“역시 넌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좋아. 그건 아주 훌륭한 재능이지.”

할아버지가 의자에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함께 집무실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예의 그 큰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게 보였다.

‘역시 모를 리가 없지.’

처음 지도를 봤을 때 내가 그렸던 길이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 뒤에 서며 물었다.

“어떠냐?”

“여전히 남의 땅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하하하핫! 그렇구나. 이렇게 커다란 땅에 우리가 너무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하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아 고개를 돌리니 웃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해 기분 좋아 보이는 맹수와 닮아 있었다.

“곧 우리 영지로 편입시킬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그러면 제법 보기 좋을 게다.”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움직여 지도 한 곳을 짚었고, 난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수준에서 노리는 거치고는 너무 작은 영지였다. 마치 사자가 들쥐를 노리는 수준이라고 할까?

궁하면야 닥치는 대로 사냥해야겠지만, 현재 에렌은 배부른 사자다.

“왜? 너무 작아 보이냐?”

“뭐든 최선을 다하면 좋죠.”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모범적인 대답을 선택했고.

“착취하고 있다더구나.”

할아버지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네?”

“영주의 착취가 얼마나 심한지 우리 쪽으로 난민들이 넘어올 정도야. 죽은 사람들도 많다고 하고.”

그게 저 영지를 탐내는 이유가 되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테고.

“그걸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으냐?”

할아버지의 그 말은 확실히 의외다.

저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욕이 아니라 악독한 영주에게 벌을 내리고 영지민을 구하기 위해 손에 넣겠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이유라도 없으면 욕심만으로 저 영지를 탐하기에는 너무 작다.

내 속내를 읽은 듯 할아버지가 날 보며 물었다.

“왜 그리 보느냐? 왜, 이상하냐?”

“굳이 할아버지가 나서실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난 귀족이니까.”

“…….”

“그리고 제국의 대영주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설까?”

으음. 내가 여태 할아버지에 대해 착각한 게 있는 것 같다.

“내 권리를 챙기려면 의무도 다해야 하는 법. 사람들은 날 탐욕스러운 늙은이고, 독재자라 손가락질한다. 그래서 뭐? 난 내 의무를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데!”

포스에 가까운 기운이 그의 몸에 휘몰아쳤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내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의무를 행함으로써 명예가 생기고, 명예가 있음으로써 힘이 생긴다.”

이곳은 전생과는 다른 세상.

거긴 무인과 관, 그리고 일반인들이 분리되었으나, 이 세계는 그런 분리가 없다.

전생의 중원과 이 세계의 권력의 구조는 다르다.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로라스.”

“네, 할아버지.”

“권력은 모래와도 같다. 아무리 쥐어 잡고 있어도 손가락 틈으로 흘러나간다.”

할아버지는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런 영지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저기를 손에 넣음으로써 얻는 건 명예다. 흘러나오는 모래를 틀어막아 줄 유일한 것.”

할아버지에 대한 내 인식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무시무시한 악당이지만.

‘그것을 모조리 압도할 만한 격이 있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갖췄고. 그렇기에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염두에 둬야 할 개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미소 지었고, 그제야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이 사라졌다.

“너도 슬슬 데뷔할 때가 되었지.”

“네?”

“밥값 한다면서.”

“그러니까 무슨 밥값을 하라고 하시는 건지.”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대체 무슨 꿍꿍인 거지?

* * *

싸늘한 기운에 내력이 먼저 반응했다.

침착하게 내력을 가라앉히고 수인을 먼저 맺었다.

열기를 모으고, 수인을 달리하며 그것을 길게 펼쳐 뿌리고.

“타안!”

에르자일의 목소리가 터지는 순간 그대로 만들었던 것을 응집시켰다.

싸아아아아아아아!

강렬한 냉기가 그것을 헤집고 들어왔다.

뚫으려 하는 냉기, 그리고 응축된 열기가 그것을 견뎌 내는 싸움.

두 가지 기운은 팽팽했고,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유지하는 싸움이다.

사르르르르르.

어느 순간 공간이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는 냉기가 서리로 화해 자신이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허어억!”

에르자일이 짧게 숨을 토해 냈다.

“오늘도 못 뚫었네.”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뚫리면 그거 그대로 내가 맞는 건데. 죽이려고?”

“그 말이 아니잖아.”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에르자일.

충혈된 두 눈에, 눈두덩이 역시 퀭하다. 정돈은커녕 사방으로 산발한 머리카락에, 옷도 언제 갈아입었는지 꼬질꼬질한 느낌이 든다.

에렌에서도 손꼽히는 미녀라 불리는 그녀와 뭔가 매치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여유가 전혀 없다.’

이런 모습에도 남자들이 졸졸 따라다니겠지만, 내 눈에는 더 잘하고 싶어 악을 쓰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잠 언제 잤어?”

“잤어.”

“그러니까 언제?”

“그제…….”

살짝 몸을 비틀며 대답하는 그녀는 거짓말을 못 한다. 정말 못 한다.

‘헤르메스가 너무 애지중지했어.’

어렸을 때부터 마탑에만 있어서 순진 무구 그 자체다.

그 탓에 사람하고 어울린 경험이 없어선지 맹한 구석도 많다.

천재면 뭐하고, 뛰어난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면 뭐하는가?

실전에 나가면 가장 먼저 죽을 사람이 바로 에르자일 같은 타입이다.

‘그러니 계속 늪에 빠지는 거지.’

게다가 타고난 재능 때문에 좌절이란 걸 경험하지 못한 탓에, 자기 페이스 조절도 못 한다.

“일단 자라.”

“괜찮아.”

“머리가 맑지 않은 상태에서는 뭘 해도 안 돼. 일단 한숨 자고 이야기하자.”

“정말 괜찮대도.”

“내가 안 괜찮아. 흐리멍덩한 애하고 뭔 이야기를 해?”

에르자일을 끌고 가서 방에 집어넣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일단 자! 나 어디 안 가.”

“센터 안 갈 거지?”

“가더라도 세 달 후에나 가. 걱정 말고 자라.”

“그럼 조금만 잘 테니까 옆에 있어.”

“다 큰 처자가 별말을 다 한다.”

“그럼 안 자.”

큰 애 하나를 돌보는 기분이다.

헤르메스가 무슨 학회에 간 이후로 더 그런 것 같다.

결국 침실 의자에 앉았고, 그녀는 몇 번이나 확인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러다 애 하나 망치지.’

이런 경우를 어디 한두 번 보았겠는가.

무림에서도 가문에, 문파의 과도한 기대에 중압감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재자才子(재능 있는 사람)가 많았다.

‘지금도 압도적인데.’

나이 열아홉에 룬 다섯 개. 소위 말하는 5클래스 마법사를 목전에 둔 그녀다.

세상은 넓으니 어디에 또 천재가 있을지는 모르나, 알려진 바로 그녀는 헤르메스와 같은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내가 더 빠르긴 할 테지만, 아직은 같은 4클래스 마법사로 그녀에 비해 손색이 있는 수준이다.

‘으음. 조금 더 육체적인 수련을 시켰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내게 마법이란 학문은 거대한 양파같이 까면 깔수록 새로운 화두를 던져 주고 있었다.

그중 몇 가지는 나름 그 답을 찾은 상태다.

특히나 인첸트enchan라 불리는 성질의 마법에 관심을 가진 이후 마법 사고의 폭이 확 넓어졌다.

원래 번천을 위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꼬리를 물고 무는 바람에 내 나름대로의 정의도 내린 상황.

그중 하나를 에르자일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진작 그걸 알려 주지 못한 건, 선무당이 사람 잡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센터에서 안정성을 확인했다.

마법은 몰라도 포스 서클레이션 이론에 관해서는 나도 초월자의 경지.

문제 될 게 없다.

운기조식을 하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조금만 자겠다던 에르자일은 예상대로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자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애기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유역후를 전생으로 분리하고는 있지만, 계속 보고 있자니 곽아가 생각났다.

‘전생이라지만 꿈이 매번 새로우니…….’

마치 마구간을 나간 말들이 한 마리씩 돌아오는 것처럼 유역후의 새로운 기억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연습이나 해야겠군.’

새로운 깨달음을 에르자일에게 전수하기 전에, 미리 몸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을 나서 연습장으로 향했다.

목검이 없으니 대체할 만한 나무 지팡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풍!”

바람의 기운을 룬어로는 ‘에진’이라고 하지만 도통 입에 붙질 않아 죄다 한어로 대체했다.

인지하고 내 마나에 각인만 하면 되는지라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찌 가르친다?’

아니, 가르친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다.

기본적인 마법의 시전은 나보다 에르자일이 더 빠르고, 숙련도도 훨씬 높다.

나의 장점은 마나와 함께 포스도 일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내가 그녀에게 알려 줄 것은 그 포스의 사용으로 마나의 일부를 강화시키거나 생략해도 그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이런 거다.

열기를 모으고, 쏘아 내고, 터트리는 것이 파이어볼.

여기에 내공 무리 중 집集(모으다), 발發(쏘아 내다), 폭爆(터트리다), 세 개의 무리 중 하나를 마나가 아닌 포스를 이용한다면?

그래서 다른 룬을 하나 더 다룰 수 있다면?

3클래스의 마법이 4클래스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실제로 내가 이것을 수련하고 있고, 마법의 이론 중에서 듀얼(Dual)이라 불리는 이중적 룬 구조도 실재한다.

다른 게 있다면 마나가 아닌 포스를 이용한다는 것뿐이다.

‘무슨 엄청난 내가고수를 만들 필요는 없고, 입문공 그 정도만 해도 하나의 룬 정도는 대체할 수 있다.’

개천지보의 입문공은 시간이 걸리나, 내가 아는 무공 심법이 어디 하나뿐인가?

속성으로 일정 수준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무공도 있다.

그중에서 에르자일이 익힐 수 있는 걸 찾는다. 지금 연습은 그것을 위해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선물이다, 에르자일.’

3년이다.

자기 연구, 수련에도 바쁘면서도 내가 원할 때면 언제나 대련 상대는 물론이고 시험 대상까지 돼 줬다. 싫은 기색 한번 없이 말이다.

물론 초기에는 가끔 날 질투도 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귀여운 투정일 뿐.

그렇게 얼마나 수련을 하고 있었을까?

“깨우지!”

잠이 덜 깼는지 멍한 눈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에르자일이 서 있었다.

“일어났냐?”

“응.”

“이리 와. 알려 줄 게 있으니까.”

어떠한 의문도 없이 앞에 서는 에르자일.

말 잘 듣는 아기 같은 데다 머리까지 총명하니 깨닫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을 터.

“알려 줄 게 뭔데?”

“일단 여기 앉아.”

에르자일이 앉았고, 그런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뭘 그리 놀라?”

“아니…….”

흠칫하는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그녀에게 알려 줄 심법은 오행에 근거를 둔 환신조화심법이다.

전신의 기운을 골고루 북돋우면서, 빠르게 내공을 쌓는 심법이다.

속성에 주력하는 무공이 그렇듯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니나 대신 안정적이다.

현재 에르자일의 입장에서 가장 걸맞은 무공.

“집중해!”

내력을 운용하여 그녀의 영대혈에 온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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