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2)
인간이 자라면서 몸속에는 탁기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길인 두 양맥은 막히게 된다.
그걸 단숨에 뚫는 행위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분명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전혀 아프지 않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급히 몸 상태를 점검했지만 내력이 충만해졌을 뿐, 문제가 될 만한 느낌은 없었다.
‘이게 아닌데…….’
분명 임독양맥은 타통되었다.
‘뭔 일인 거지?’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건 큰 문제다.
가장 뚫기 힘든 맥을 뚫는데 마치 이미 뚫려 있었던 것 같은 이 감각은 분명 내 상식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와는 별개로 단전에서 느껴지는 충만감.
삼보에 오른 후 새로 채워야 할 내력의 반 이상을 지금 채웠다.
‘기대 이상이긴 한데…….’
짐작할 만한 이유는 있다.
에르페유와 격투로 인해 신체 곳곳이 활성화되기는 했다.
수련으로서는 한참 걸려야 하는 그 본능적인 감각이 깨어나니, 개천지보도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려는 듯 속도를 냈다.
애초에 임독양맥 타통을 천천히 시도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긴 했다.
‘빨라도 너무 빠른데.’
기연으로 인해 삼보에 올랐다. 그래서 지나친 전진을 경계했는데, 이번에도 기연으로 사보를 향해 간다?
‘나만 방심하지 않으면 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지나친 걱정도 좋지는 않을 터.
아무리 몸 상태를 점검해도 주화입마의 문제가 될 요소는 전혀 없다. 애초에 그런 기미가 있다면 내가 모를 리도 없고 말이다.
그대로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결과가 좋아, 결과가!’
완벽한 점검으로 찝찝함을 털어내 버렸다. 오히려 기분 좋은 감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안 와?’
항상 아침 수련에 참여하던 테라가 보이지 않았다.
재능은 그리 뛰어나다 할 수 없지만, 독기가 그것을 전부 커버할 수 있는 녀석이다.
‘데리고 와 놓고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
개천지보 입문공을 숙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특별한 것을 지도한 것은 없다.
일단 일보 의식도료를 안 이후에야 뭔가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냅둬도 잘하는 녀석이긴 하지만.’
귀찮긴 해도 날 주인이라 여기고 열심히 하는 녀석이다.
에르페유와 수련 이후 녀석을 찾아 진도를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 *
“촌구석에서 올라와 애쓴다, 애써.”
“평민 주제에 쟤가 왜 여기 클래스에 있는 거야?”
특별하게 적대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계속 속을 긁는 아이들 사이에서 테라는 애써 평정심을 찾았다.
‘붙으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될 것들이!’
마음 같아서야 한판 붙고 싶지만 그들은 귀족 가문의 아이들. 괜히 시비가 붙었다가는 끝이 좋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다른 클래스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언 핸드 센터는 여러 가지 클래스가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초급, 중급, 상급 클래스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평민과 귀족이 배우는 클래스가 달랐다.
그 위로 숙련 클래스가 있는데 그때부터는 평민과 귀족의 구분이 없는 구조.
테라는 초급 귀족 클래스에 있었다.
행정 착오인지 아니면 알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쪽으로 배정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귀족 클래스 쪽이 교관 한 명당 돌보는 수련생의 숫자가 적어 더 많은 지도를 받는 데다 지급되는 장비며 식사 같은 것도 평민 클래스와는 달리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후회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평민이라는 걸 안 순간 그들이 보이는 경멸의 눈초리. 벌레 보는 듯이 기겁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주군께서는 왜 이런 곳에 나를…….’
타라는 로라스를 원망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군이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서 배울 기회 자체가 오지 않았을뿐더러 알고 그랬겠는가? 지원이 더 좋으니 이쪽으로 배정했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아이들이 그리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무리만 그렇기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나만 잘하면 돼!’
그런 것들만 아니면 교육 과정은 훌륭했고, 스스로도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지고 있었기에 타라는 묵묵히 수련에만 집중했다.
분명 그리했는데 어제 사고가 터졌다.
“제 누구 몸종이라고 들었는데?”
“누구? 누군데 몸종을 센터에 집어넣을 수 있는 거야?”
“베스타인 가문의 핏줄이라던데. 방계이긴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다던데.”
“여기에는 없잖아. 주인은 없고 시종만 왔다는 거야?”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락 영주의 아들이래.”
“락? 거긴 어딘데?”
“모르지. 핏줄 하나 믿고 비벼 보려는 놈이 어디 한둘이야?”
“웬 멍청한 놈이 자기 대신 몸종을 보낸 거 아니야? 자기인 척하라고?”
여태 잘 참아 왔던 테라지만 그 소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거든요. 그리고 우리 주군께서는 엄청 강하십니다. 기사분들하고 대련까지 할 정도로!”
테라는 참다못해 그리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많이 좋지 못했다.
“평민 주제에 말대답하네.”
“크크크크. 주군이란다.”
“네 그 잘난 주군은 어디 처박혀 있는 건데?”
“기사라고 해 봤자지. 시골 촌구석에 처박힌 기사가 실력이 어디 있겠냐? 수십이 덤벼도 우리 가문의 기사 하나에게 다 쓸려 나갈걸!”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비난과 멸시.
주군을 모욕하더니 이제는 존경하는 락의 기사들까지 욕했다. 테라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뭐라고!”
결국 그리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그 탓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테라를 둘러쌌다.
“지금 평민 주제에 반항하는 것이냐?”
“한 대 칠 것 같은데? 손모가지가 날아가고 싶은 것이냐?”
테라는 다수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말했다.
“취소하십시오!”
“뭐?”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주군과 영지의 기사님들을 얕본 그 말 말입니다!”
테라가 외치듯 한 말에, 한 아이가 다가와 그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지금 누가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테라는 그런 느린 주먹에 제대로 맞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또 때릴 수도 없기에 두 손을 들어 방어하며 말했다.
“제 주군도, 그리고 기사님들도 귀족입니다. 귀족들은 귀족들을 욕해도 되는 겁니까?”
“이 새끼가 정말 주제도 모르고!”
아이가 테라에게 달려들었다.
테라가 이리저리 몸을 빼며 별다른 타격 없이 막자, 아이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해! 이 건방진 새끼 잡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 * *
“그래서 여기에 갇힌 것이냐?”
“네…… 주군. 죄송합니다.”
테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단하다.
결국 애들 싸움이었을 것이고, 애들 싸움에서는 체격, 그리고 숫자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여덟 명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한 놈의 얼굴에 멍을 남겼다고 했다.
“뭐가 죄송한데?”
“제가 주군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주군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됐는데…….”
“고개 들어.”
“죄송합니다.”
“고개 들라니까.”
곳곳에 멍이 든 녀석의 얼굴. 게다가 잔뜩 겁까지 먹은 걸 보니 마음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좋지 않았다.
“네가 뭘 잘못했냐?”
“제 언행으로 인해 주군에게 해가 될 수 있으니,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는데…….”
“교육?”
“네. 올 때 촌장 어른하고 저택의 집사 어른께서 주의할 점을 알려 주셨습니다. 특히 에렌은 락과는 다르니 귀족들에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명예를 욕보이는 것도 참으라 했어?”
“그건…….”
다시 고개를 숙이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고개 들라니까. 잘했구먼.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내 부친과 기사들을 욕보이는 걸 보고도 아무 소리 못 냈다면 내가 널 벌했을 것이다!”
“주군…….”
“그래, 내가 바로 네 주군이다. 주종 관계가 뭔지 알아?”
“…….”
“그건 널 벌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고, 네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네게 아주 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주군!”
테라는 눈물을 쏟아 내며 말했다.
“그래도 손이 잘리는 건 싫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손? 누가 네 손을 자른다더냐?”
“여기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귀족에게 주먹을 휘둘렀으니 죽거나, 형벌이 가벼워도 손은 잘릴 거라고.”
“내 첫 번째 부하가 불구가 되는 걸 내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으냐?”
“주군! 으어엉!”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아, 녀석의 눈높이에 맞췄는데 너무 맞춘 것 같다.
바닥에 엎드리며 대성통곡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더 쓰리다.
“됐고, 갇힌 김에 포스 서클레이션이나 부지런히 수련하고 있어.”
“으어어어엉! 주군!”
“그만 울고! 고작 애들 몇 명 상대하면서 그리 쳐 맞냐? 나오면 내가 훈련시켜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테라를 진정시키고는 센터 건물을 나왔다.
알아보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락과 달리 에렌은 신분제도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다. 평민이 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에렌뿐 아니라, 제국 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상황이었다는 건 에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이런 걸 보니 영지의 주민들이 왜 그리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더 확실히 알 것 같다.
다행인 건 센터 내에서 벌어진 사건인 만큼, 센터의 책임자들이 징계를 결정한다는 것.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없을 것이다. 에르페유에게 이야기하면 되는 문제니까.
‘그래도 그냥 넘기기에는 문제가 있지.’
그거와는 별개로 너무 괘씸했다.
‘감히!’
부친을 욕보이고, 기사들의 명예를 손상한 그 주둥아리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했다.
‘개념 없는 애새끼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긴 한데.’
어찌 벌을 내릴지 고민하면서 걸을 때였다.
“로라스?”
“어…….”
눈에 익은 얼굴인데 누군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맞구나, 로라스. 나 포플러다.”
아! 기억났다.
3년 전 가문의 시험에서, 싸가지 없지만 그래도 심성은 착했던, 그리고 대장 노릇하는 것을 좋아하는 꼬맹이.
“컸구나.”
내 말에 녀석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너에게 할 말이지.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혹시 센터에 들어온 거야?”
“당분간은.”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너도 최종 합격자 중 하나인데 어디서도 네 소식을 들을 수 없어서.”
“너희끼리 연락을 하고 있는 거냐?”
포플러는 웃으며 말했다.
“넌 엄청 똑똑한데 가끔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르더라. 상위 합격자들은 그 성적에 따라 곳곳에 배정돼. 센터, 마탑은 물론이고 기사단과 원하는 분의 시종이 되어 그 밑에서 배울 수가 있어.”
“그렇군.”
“그런데 너는 마탑에서도, 그 어느 센터에서도 보이질 않으니 당연히 궁금했지. 어디 있다 나타난 거야?”
“집에. 그리고 얼마 전에 수도로 왔다.”
“그럼 연락이라도 하지. 예전부터 넌 혼자 움직이려는 것 같더라. 하지만 나중에는 이런 인맥도 무시 못 해.”
“모임이 많은가 보다?”
“우리만 아니라 우리 윗대 합격자들도 따로 모임 같은 게 있을걸. 어디 그뿐이냐? 검술대회나 마법대회, 하다못해 용병들의 대회도 다 모임이 있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에펠란트 경도 실버 스워드 대회에서 인연을 맺었다고 했으니, 꼭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긴 했다.
“이제 이해했다. 진즉 알았다면 연락이라도 하고 지낼 걸 그랬군.”
“내가 연락하면 되지. 이번 달 모임은 끝났고, 다음 달에 또 있으니 그때 얼굴 보면 되겠다.”
“그런데 포플러.”
“응.”
“여기 수련생들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알았으면 써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