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1)
실없어 보이는 저 웃음에 속으면 안 된다.
그는 에렌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
‘권력은 운으로만 쌓아 올릴 수 없지.’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게 아니니, 어느 정도 주의는 필요할 터.
“힘이 닿는 대로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 뭐든 공부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틀렸다. 공부해서 나쁠 건 없지만, 더 좋은 공부가 있다면 일단 그것부터 파고들어야지.”
“포스는 가문에서부터 익혀 왔기에 마법에 대해서 흥미가 인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것도 내 아이언 핸드보다는…….”
에르페유는 순간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기억한 것 같다.
내 아버지가 에듀 베스타인이라는 것을. 당연히 베스타인 가문의 포스를 배우지 않았겠는가.
“흠흠. 그러고 보니 네 부친이 에듀였군. 에듀 경이 나보다 어리지만, 난 그를 존중한다. 나 같은 놈이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아버지가 과거에 대해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당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셨나 보군.’
권력 있는 자들 전부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여겨봐야 하는데, 모두가 존중하고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락이라는 작은 영지의 영주일 뿐인 아버지를 말이다.
“아버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기뻐하셨을 겁니다.”
“빈말이 아니다. 에듀 경이 계속 제국에 있었으면 진즉에 포스 마스터가 되었을 것이고, 내가 어찌 헤르메스 같은 계집과 비교당하고 있었을까?”
에르페유는 투덜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급이 달라, 급이. 네 부친과 비교당했으면 나도 더 발전의 여지가 있었을 텐데 말이지.”
“지금 말씀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할 테니까. 그건 그렇고.”
에르페유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듀 경이 네 재능을 몰라봤을 리 없을 테고.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그거야 에르페유 님이 판단하실 문제겠지요.”
“저번에 성에서는 손을 섞다 말아서 좀 아쉬웠단 말이지. 그 이상하게 손쓰는 것도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나도 아쉽긴 했다.
할아버지가 올 시간이라 도중에 수련을 그만뒀었다.
‘나도 궁금하긴 하니까.’
강진난화를 완성시키기 전에 대련이 끝났었다. 그래서 제대로 겨뤄 볼 수 없었다.
“가자.”
“네.”
곧바로 그와 함께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가 주먹을 뻗는다.
우우웅!
파공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하나의 공간을 압축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권신이라더니!’
에르페유가 몸을 푸는 것을 보니 왠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언 핸드…… 철권(鐵拳)이라.’
처음 보면서도 익숙한 이유는 꿈에서 철권문의 문주와 겨뤄 본 적이 있는 듯한 데자뷔 때문일 터.
‘확실히 모자람이 없는 경지다.’
정도를 걷는 권사의 포스라고 표현해야 할까?
풍기는 기운에 사이함은 전혀 없고, 미련할 정도로 정직한 기운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한 무인이 바로 에르페유다.
길 아닌 곳은 가지 않고, 질러가는 샛길이 있어도 오로지 눈앞에 놓인 길만 따라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어떠냐? 죽이지?”
저만한 경지의 무인이 애처럼 저렇게 묻는 것을 보면 앞으로 성장할 게 한참 남은 것 같다.
“멋집니다.”
사실 그에게 무력적인 측면에서 크게 기대하는 건 없었다.
포스와 내력이 비슷한 개념이니만큼, 그에게 배울 무리는 무척이나 한정적일 터.
하지만 그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에르페유가 존중받을 만한 무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만큼 진지해졌다.
“그게 다냐?”
더 없냐는 듯 약간은 서운한 표정.
‘뭔가 더 대단한 감탄이나 반응을 바란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사양하고 싶다.
“가슴이 뜨거워지긴 합니다.”
“흐흐흐. 그래야지.”
에르페유는 주먹을 거두었고, 난 그런 그와 마주 섰다.
“포스는 네 수준에 맞출 것이다. 어디 한번 전력을 다해 봐라.”
주먹을 쥐었다.
이제 고민할 건 어느 선까지 보여 줄 것이냐는 문제다.
사실 그가 나와 비슷한 포스로 상대한다 해도, 체격의 문제가 있긴 하다. 그의 팔다리가 나보다 긴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불리한 싸움은 아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유역후의 기억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한 실전에서 반응, 그리고 무공의 이론에 대해서는 내가 더 나을 테니까.
‘고민은 일단 손을 써 본 후에!’
천취보법(天趣步法)을 이용하여 그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줄였다.
“헛!”
예상 못 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에르페유.
개천의 내력을 7할 가까이 끌어올렸고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역시 노련하다.
우물쭈물 피하는 대신 같이 공격하는 것을 선택한다.
파아아앙!
주먹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저항. 그에 따른 풍음이 울린다.
강진난화의 조화操花(꽃을 움켜쥐다).
주먹에서 손가락을 편 후, 그의 손목을 잡았다.
퍼엉.
에르페유가 팔꿈치를 안으로 당기며 미소 지었다.
잡은 채로 내게 끌려올 것이냐? 아니면 손을 놓을 것이냐? 하는 질문을 눈빛으로 보내왔다.
‘답은 두 개가 아니지.’
그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대로 하체를 띄웠다. 그리고 뱀처럼 그의 팔과 두 다리를 옭아맸다.
“정말 재미있구나!”
에르페유는 그리 소리치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당연히 나도 거목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같이 허공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체구의 차이는 분명 나지만!’
나를 매단 채로 이리 쉽게 손을 들 줄은 몰랐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 예측했기에 곧바로 손을 풀었다. 그리고 허리를 뒤집어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작은 체구를 그리 이용하겠다는 거지? 훌륭하다!”
말은 그리하면서 가슴을 쉽게 내줄 생각은 없는 듯 그대로 두 손을 뻗어 날 밀어낸다.
‘허공에 날아갈 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서.’
밀리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손목을 잡고 버텼다. 그리고 다시 들리기 전에 시계추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체로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원숭이도 아니고!”
에르페유가 잽싸게 달라붙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전에 이미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그대로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하체에 내력을 실었다.
거목 쓰러지듯이 뒤로 기우뚱하는 에르페유.
‘밟아라!’
천근추를 발휘했고, 두 발이 바닥에 닿는 감각이 드는 순간.
잽싸게 허리를 숙이며 그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쿠우우웅!
분명 제대로 넘겼는데. 허리를 뒤로 꺾은 채 두 발로 버티는 에르페유. 그와 동시에 커다란 두 손이 허리춤으로 날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하체 힘이 엄청날 것이니 두 발로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허리를 저 정도로 꺾으며 반격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저 두 손에 잡혀 줄 생각은 조금도 없기에, 그대로 물러났다.
“너 정말!”
허릿심만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에르페유가 소리쳤다.
“재미있구나. 그거 지금 어찌한 거냐? 무게중심이 한순간에 바닥에 깔리더만!”
“몇 번 던져지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건방지구나!”
성난 멧돼지, 아니 곰처럼 두 손을 들고 달려드는 에르페유.
퍼어엉! 파아악!
잡혀서 던져질 뻔한 위기감 탓일까.
아까는 그대로 힘을 좀 빼는 감이 있는데 이제는 거침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타격에 가까운 드잡이질. 그것을 피하고, 피하지 못하면 맞받아치는 잡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거지!’
가슴에 흥이 돋는다.
까마득하다. 격투로 이리 격렬하게 몸을 부딪친 적이 언제인지.
아니, 그런 적이 있기나 했던가?
유역후 때는 경지에 이른 후 감히 공수(空手)로 덤비는 놈이 없었고, 현생에서는 손에 무기를 잡은 대련만 있었다.
격투(格鬪).
무공의 본질이 여기에 있을진대 이 원초적인 비무의 재미를 새삼 깨달아 버렸다.
“하아아앗!”
용틀임처럼 내력이 솟구쳤다.
굳이 제어하지 않았다.
자라지 않는 육체를 혹사하는 건 미련한 짓이기에,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외공을 수련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혹사가 아닌 발달이 되고 있었다.
이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그 증거다.
그래서였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내공을 폭발시키며 에르페유와 정면으로 맞선 이유는.
끓는 물 넘치듯, 단전에서 진기가 흘러넘쳤다.
“후웁!”
흘러넘치는 진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하앗!”
덩치 큰 곰에게 대항하기 위해 난 미쳐 날뛰는 늑대가 되었다
* * *
에렌의 아침은 상쾌했다.
락에 비하면 한참 아쉬운 느낌이나, 그나마 센터가 산 속에 있으니 기본 이상은 되었다.
“후우우!”
긴 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될 것 같은데?’
센터에서 지낸 지도 두 달.
마탑 대신 이곳을 먼저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에르페유와의 대련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 같아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조절했다.
천천히 진기를 돌리며 스스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몸 상태는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완벽 그 자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근래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동작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후우우우!”
숨을 토해 내며 천천히 운기조식을 했다.
애쓸 필요 없고, 긴장은 더더욱 할 필요 없었다. 그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그 상태를 즐기는 수준.
천천히 단전에 내력을 쌓았다.
개천지보의 특성상 일보를 내디디면 내력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
실제로 내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운들이 단전만이 아닌 전신에 흩어진다. 그래서 단전에 새로운 내력을 쌓는 것이다.
문제는 일보, 이보, 삼보, 이렇게 한 보가 늘어날수록 단전의 크기가 커진다. 그래서 일보가 전진될 때마다 그동안 해 왔던 것의 두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물론 위력 역시 그만큼 증강되고, 칠보를 거니는 순간에는 적수를 찾는 게 힘들어진다.
유역후가 구보의 절정, 십보를 눈앞에 두고, 제자들이 칠보에 이르렀을 때, 그때 천황성의 무림일통은 확정된 거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둘째, 그 단순한 녀석이 가장 먼저 팔보에 오른 건 의외였지만.’
여하간 지금 난 개천지보 삼보 정개안정(??眼睛―눈을 뜨다)의 경지에 이른 상태.
그리고 오늘 임독양맥의 타통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삼보의 전진은 더더욱 빨라질 것이고, 사보의 경지 앙망세계(仰望世界―세상을 바라보다)를 바라보는 기간이 대폭 단축될 것이다.
사실 임독양맥은 그리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대맥을 타통하는 건 준비된 상태여야 했고, 조력을 받을 수 있으면 더더욱 좋았다.
물론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임독양맥을 타통할 기회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고, 그마저도 일갑자(60년)의 내공을 가졌을 때에나 가능한 일.
‘준비는 되었고 경험한 감각이 있기에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으나 내력이 아직 일갑자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내력을 쌓는 데 절대적인 시간이 내겐 분명 없었다. 하지만 될 것 같다.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
운기조식을 얼마나 했을까?
임독양맥의 진기가 충분해지며 진기는 단숨에 정수리로 치솟아 올랐다.
쾅! 쾅!
머릿속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느낌.
각오했다.
성난 파도처럼 머리를 두드릴 그 강력한 충격파를!
“……!”
뭔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