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40)
할아버지가 데려간 곳은 집무실.
난 방 안에서 제국의 지도가 걸려 있는 공간에 섰다.
지도는 이 커다란 집무실의 벽 반쪽을 전부 채울 정도로 크다.
사실 지도란 게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영역 구분이 확실히 되어 있고, 관도를 포함한 몇 가지 길까지 전부 표시되어 있는 지도는 더더욱 그렇다.
지도 한 귀퉁이에는 381이란 숫자가 쓰여 있었다.
금세 저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지금이 제국력 382년.
이 지도는 작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이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영지 지도도 아니고…….’
이런 지도를 제작하고 그것을 업데이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베스타인가의 엄청난 재력, 위력 등을 엿볼 수 있다.
‘황가 없는 제국은 있어도, 베스타인 없는 제국은 없다더니!’
황제의 가문인 오베른 황가의 드래곤 문양보다, 베스타인 가문의 날개 달린 사자 문양이 지도에 더 많이 보였다.
황가의 문양이 20%라면 베스타인 가문은 30%에 가깝다. 두 가문이 이 커다란 제국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도를 보니 어떠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응?”
바란 대답이 아니었는지, 할아버지는 날 의아하게 쳐다봤다.
“여기. 우리 영지가 있는 곳인데 표식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작은 영지까지 다 표기하려면 그림이 지저분할 것이다.”
“지도란 쓸모가 있는 그림이어야 하는 법 아닙니까?”
“글쎄다. 거기에 표식을 해야 할 정도로 의미가 있을까?”
능구렁이 같다. 조금도 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손가락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가 왜 가문의 영역이 아니지요?”
“…….”
“이곳만 가문의 표식을 넣으면 그럭저럭 그림 자체는 보기 좋을 것 같은데요.”
손을 들어 지도에 몇 개의 선을 그려 보였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설마 모르는 건가?’
내가 가리킨 곳은 산이 많고, 강에서 멀다. 그리고 길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곳.
거기에 선 몇 개, 그러니까 도로만 놓으면 사통팔달四通八達(사방으로 통하고 팔방으로 닿아 있음)이 되는 지역이다.
물론 이 지도가 90% 이상 정확해야겠지만, 산 사이의 공백까지 그려 넣은 것을 보면 꽤나 정확하다고 봐야 했다.
“으음…….”
옅은 신음성과 함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거긴 쓸모없는 땅이다. 첩첩이 산이고, 산맥 위쪽에 놓여 있는 대로가 보이지 않느냐? 길 없는 황무지일 뿐인데. 보는 눈을 더 길러야겠구나.”
진심인가?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아버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위에 관도가 있고, 이 황무지에 도로를 놓고 사람이 주거할 만한 환경을 만들려면 엄청난 노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해내기만 한다면, 서북부 영지들의 가치가 올라간다.
‘굳이 황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 타국과의 교역도 가능해질 수 있을 터.’
뭐, 천하통일 같은 그런 야망을 갖지 않으면 딱히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제가 보는 눈을 더 길러야겠습니다.”
내게도 의미가 없는 지역이니 괜히 이 지역을 가지고 할아버지와 토론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도 락은 표식을 넣어야겠구나. 네가 있으니 말이다.”
“제가 여태 한 말을 증명한 후에 넣어 주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감 하나만큼은 높이 사 주마.”
“자신감은 곧 실력이 되니까요.”
“하하하. 그래, 기다려 주마. 그런데 에르페유에게는 언제 가는 것이냐?”
“정리해야 할 게 있어서 사흘 후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알았다.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뒀구나. 가서 쉬어라. 내일은 아침에는 나와 같이 가 볼 데도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의외네.’
베스타인가의 가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핏줄, 서열로 가주가 되는 건 타 가문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이 가문의 수장이 된다는 건, 수많은 시험과 경쟁을 이겨 냈다는 뜻.
게다가 할아버지는 역대 가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걸 왜 못 봤지?’
이 세계의 전쟁이 내가 아는 전쟁과는 조금 다른 건가?
의문이 조금 생겼으나 내 문제는 아니다.
지금은 배워 온 마법들을 정리하고, 스스로 정립할 시기다.
엄청나게 재미있는 시간일 것이고 온전히 그것을 즐기고 싶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본 소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할 듯싶다. 계속 눈에 아른 거린다.
‘너무 늦었으니.’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할 것이 많아지는 것이 즐겁다.
* * *
로라스가 나가고 공작은 잠시 지도를 뚫어지게 보았다.
‘왜 손에 넣지 않았냐고? 그건 확신했다는 건데?’
그는 깜짝 놀랐다.
로라스가 가리킨 지역은 이름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은 그야말로 황무지. 몬스터들의 서식지는 아니나 사람이 살 만한 환경도 아니다.
하지만 전략적 가치는 분명 있는 곳이고, 그렇기에 투자를 해야 할지 말지 분석 중이었다.
그런 곳을 로라스가 의아해하며 왜 손에 넣지 않았냐고 물은 것이다.
한참 계속 지도를 보던 공작은 크게 소리쳤다.
“베컴!”
“네, 공작님.”
밖에서 대기 중이던 베컴이 들어왔고, 공작은 말했다.
“아란데일을 불러오게.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베컴이 급히 나가고, 공작은 다시 지도를 보며 생각했다.
‘이상해할 정도로 가치가 있어 보였단 말이지? 로라스의 눈에는?’
사실 이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문제다.
하지만 먹자니 그닥 영양가가 없어 보이고, 먹지 않자니 아까운 그런 지역.
‘제법이지 않은가?’
흐뭇하면서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로라스가 이곳을 짚은 건 우연이 아니다.
수많은 전장을 겪고, 수없이 지도를 보면서 연구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지역이다.
분명 지도를 볼 줄 알고, 앞을 내다볼 줄 안다.
그뿐이랴?
‘전쟁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거지? 로라스가 그걸 무시할 정도의 천재란 말인가?’
천재 전략가 아란데일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해, 몇 차례 답습을 하고 개발 제안을 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로라스는 지도를 잠깐 보고 이 지역을 짚어 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주군, 아란데일입니다.”
“들어와.”
공작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아란데일이 그의 옆에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지역에 대해 고민하고 계셨습니까?”
“고민은 끝났어.”
“끝났다 하시면…….”
“여기.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지.”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초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는 더해질 것입니다.”
“아니.”
공작은 손가락을 들어 한 개의 선을 그었다.
“이렇게 하면 말일세. 굳이 시간이 필요 없지 않을까?”
아란데일은 공작이 그은 가상의 선을 보았고, 공작은 말을 이었다.
“기왕 투자하는 거. 약간 더 투자하면 그만큼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뚫어지게 지도를 보던 아란데일의 고개가 떨어졌다.
“주군, 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제가 봤어야 할 길입니다. 제가 왜 그걸 보지 못했을까요?”
“개의치 말게. 나도 오늘 본 것이니. 그리고 산에다가 생으로 길을 넣는 거. 생각조차 하기 쉽지 않은 게 아닌가.”
공작은 그리 말하며 생각했다.
‘굳이 로라스가 생각했다고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애가 말했다고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게다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괜한 이목을 끌 것이다.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인데, 이런 것까지 알려져서 로라스에게 좋을 건 없다.
‘아란데일 말이 맞아. 로라스는 지휘관으로 키워야 해.’
어떻게 이걸 생각해 냈는지 여전히 의문이나 상관없다.
선천적인 재능이든,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든 그걸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키워야 했다.
‘정치적인 감각도 있는 아이인 만큼, 상대가 누구든 제 것을 뺏길 아이가 아니야.’
아쉬운 게 있다면 제 아비를 닮아 야망이 부족한 듯했다.
‘욕심은 있는데 야망이 없어.’
자신은 분명 로라스에게 탐욕을 봤다.
야망과 탐욕이 같다고 할 사람도 있으나, 공작의 기준에서는 다르다.
이 차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냥 가볍게 말하면 로라스가 야망이 있었다면 시험이 끝나고 제 영지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어떻게든 여기에 붙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욕심이 있으니 어렵지는 않을 거야.’
큰 차이는 아니다.
욕심의 종류가 다를 뿐.
로라스가 좀 더 크게 욕심을 가지게끔 바꾸면!
‘밖으로 내놓지는 말라고 해야겠군. 아! 쓸데없는 걱정인가? 헤르메스와 에르페유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아이를 내놓을 리 없을 테니.’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 * *
아이언 핸드 센터.
무림으로 따지면 무관, 또는 문파로 정의할 수 있는 곳이다.
포스는 가문의 핏줄에게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센터에서도 그 기회는 열려 있었다.
물론 센터의 수련생마저 대부분 귀족인 건 부정할 수 없으나, 평민에게도 기회가 열려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많은 이들이 센터의 수련생이 되기를 원했다.
센터의 수련생이 되어 포스를 갖게 되면, 기사가 되는 길도 열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련생이 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그건 센터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의욕이 넘치는 수련생들 사이에 재능 있는 사람만을 골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센터 내에서도 에르페유의 아이언 핸드 센터는 최고 중의 최고다.
권신 에르페유라는 이름.
게다가 에르페유 본인도 평민 출신이라 더더욱 인기가 높았다.
“많군요.”
그만큼 센터에는 수백여 명의 수련생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최고니까.”
안내하고 있는 에펠란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남작님께서도 여기서 배우시는 겁니까?”
“가끔 에르페유 백작님에게 지도를 받기는 하지. 가문의 포스가 있으나, 지도를 받음으로써 내 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으니까. 그 대가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보답하기 위해 센터의 수련생들을 봐 주는 것이고.”
“그렇군요.”
센터의 연무대를 지나쳐 건물에 도착했다.
“왔구나!”
놀랍게도 에르페유가 문 앞에서 날 맞이했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늦었어!”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수고했네, 에펠란트 경.”
에펠란트가 돌아가고 에르페유가 날 안으로 데려갔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에르페유는 어느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포스 마스터가 되면 마법 같은 조잡한 재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똑똑한 줄 알았는데 미련한 선택을 했구나.”
헤르메스도 그렇고, 에르페유도 대놓고 상대를 무시하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이 문관에게 입만 산 서생이라 놀리고, 문관이 무관에게 칼만 쓸 줄 아는 무식한 놈이라고 욕하는, 그런 마법과 포스의 대립일지도 모르겠다.
“헤르메스 님에게도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뭔 도움인지 모르지만 내가 갚아 주마. 너는 포스를 타고났다니까. 그런 재능에 내 무공을 배우면 어떤 빚이든 한 방에 갚을 수 있어.”
“제가 잘 조절하겠습니다. 저라고 철의 포스라 불리는 무공을 어찌 배우고 싶지 않겠습니까? 복잡한 마법도 철의 포스에는 손색이 있지요.”
“하하하하! 그렇지!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환장할 지경이다.”
말은 그리했지만 흐뭇함을 감추지 않는 에르페유.
에렌으로 오면서 에펠란트에게 그의 대한 정보를 적잖이 얻었다.
둔해 보이지만 무공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민감하고, 멍청해 보이나 아이언 핸드라는 무파를 오대무파로 키웠고, 속이 좁은 것처럼 보여도, 제 사람이라 생각하면 간, 쓸개 다 내줘 아이언 핸드 기사단의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받고 있는 사내.
‘하긴 겉모습이 전부라면 이런 경지까지 오르지도 못했겠지.’
그래서 느긋함을 거두고 긴장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