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9)
날 쳐다보는 그 눈빛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매우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부정적인 감정에 가까운 느낌이다.
‘어찌 됐든 넌 운이 좋단다.’
전생으로 치면 에르자일은 내게 사저가 되었고. 난 주변 사람에게 매우 후한 사람이다.
‘개천지보에 소홀히 할까 싶어 마법을 멀리했는데 같은 길이란 걸 알았으니 어느 정도는 전념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는 건.
‘무공과 마법이 일치하는 것이 분명한 만큼,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터.’
에르자일을 도울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녀에게 도움받을 것도 있다.
‘실력을 키워 갈 상대로 이보다 좋을 순 없지.’
영지에서는 시그탑이 내 수련의 조력자인 것처럼, 이 마탑에서는 에르자일이 내 조력자가 될 것이다.
그때 헤르메스가 말했다.
“굳이 그 멍청이에게 배울 필요 있어? 그냥 여기에 쭉 있지?”
“약속한 게 있어서.”
“그의 기사단 일부가 락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혹시 그 때문에 그 덩치 큰 멍청이에게 빚을 진 거면 내가 갚아 주마. 그리고 앞으로 락의 토벌전을 도와주마.”
헤르메스가 날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탑 소속 마법사 딱 셋만 보내도 그 멍청이가 보내는 지원군보다는 훨 나을걸.”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헤르메스 님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어. 멍청이에게 몸 쓰는 법 같은 걸 배우면 감응력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약속한 거라.”
“약속했다 하니 계속 강요는 않겠어.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해.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계획대로 그녀의 관심을 제대로 끈 듯했다. 그러나 에르페유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영지 발전 계획상 초기에 강한 자가 엄청 많이 필요하니까.
“열심히 배우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탑에서의 첫날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 * *
닷새간의 마탑 견학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가는 길.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꽤나 요란하게 들렸으나, 마차 안의 진동은 매우 적었다.
마차가 좋은 것도 있지만, 움직이는 데 방해물이 없어 일정 속도를 유지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도 규칙적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미리 알아서 비키고 있다는 뜻.
에렌에서 베스타인가는 황가 이상의 권력을 지녔다는 게 헛된 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크긴 크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하나의 거리만으로도, 락의 인구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건물의 크기나 숫자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게다가 굶주린 사람들도 없어 보이고.’
들었던 말로는 어느 도시든 굶주린 자들이 일정 비율 존재한다 했는데 에렌은 그런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말쑥한 차림에 뭐가 그리 바쁜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황성은 어땠었지?’
유역후의 기억에서 천황성은 에렌보다 컸다. 사람 숫자도 많은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달랐다.
꿈에서 본 천황성 사람들은 이리 활기차지 않았다.
‘유역후는 좋은 지도자였을까?’
모르겠다. 그의 말년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 촌마을에 처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불쑥 들 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그리 흔한 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나는 여기서 확고한 삶의 의지를 가졌다.
‘언젠가는 락도 여기만큼 활기찬 곳으로 만들 것이다.’
락은 영지민들의 단합력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좋은 곳이다. 반대로 그건 그만큼 폐쇄적이라는 말도 된다.
없으니 의지하고, 의지해야 하니 지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변화할 것이다.
좋은 상상이 시작됐다.
가정을 이루고, 와이프와 내 아이가 생기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저택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마을의 영역을 하늘 강까지 넓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나이 든 이들은 유유자적하게 낚시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영지를 지켜야지!’
하늘 산맥의 몬스터 규모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 확 와닿았고, 그 탓에 좋은 상상이 깨졌을 때.
“워워워!”
마부의 급한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몸의 무게가 앞으로 쏠렸다.
가뿐하게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르게 했을 때, 마부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 마차가 어느 가문의 것인지 모른단 말이냐! 어디서 길을 막아!”
누군가 마차의 진로를 방해한 것 같았다.
‘이런!’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제국은 철저한 신분 사회고, 에렌은 그 신분을 더 철저하게 따졌다.
귀족들부터 평민, 노예들까지 그야말로 수많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더더욱 철저하게 그것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성에서 공작의 시중을 드는 어린 시녀 하나가 나이 든 하녀의 뺨을 쳤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에렌 생활을 돌봐 주는 페컴의 말이었다.
―당연한 거다. 아무나 공작님을 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공작을 모시는 시녀는 베르타르 남작의 영애다.
시녀와 하녀의 구분을 그때 알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나, 후작 이상 귀족들의 시중을 드는 이들 대부분은 하위 귀족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 락은 작은 곳이라 이런 부분은 전혀 모르겠구나. 에듀 경도 그렇고, 네 모친도 그런 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테니.
페컴은 그리 말하며 주의를 주었다.
―네가 베스타인가의 핏줄이고, 지금 공작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이상, 황가와 같은 베스타인의 윗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사람을 죽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신분제도이니만큼 마차 앞을 가로 막은 이가 무슨 벌을 받더라도 받을 터.
그냥 일을 무마하고 보내려 창밖으로 고개를 내뺐다.
‘어라?’
마차 앞을 막은 건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저런 걸 탈 수 있는 사람이 할아버님을 제외하고 또 있나?’
눈앞에 보이는 건 사람이 아닌 육두마차였다.
‘저 정도면 전마 수준인데?’
자세히 보니 단순한 육두마차가 아니었다.
마차 곳곳에 방어를 위한 철갑이 둘려 있고, 그 마차를 끄는 말 역시 몸체가 육중한 게 전마로 보였다.
관리하는 데 수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고, 그 먹잇값 역시 몇 가족의 식비를 능가한다.
당연히 그런 전마를 마차 끄는 말로 사용하는 이는 극소수.
‘어디 가문이지?’
마차 위로는 하나의 깃발이 달려 있고, 문짝에도 문양이 있으나 어디 가문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제국 내 유력 가문의 문양은 전부 공부했는데도 말이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면 저런 마차를 끌 수 없을 텐데. 엄청난 사치 아닌가?’
궁금증이 드는 사이 이쪽 마부와 저쪽 마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 내게 마차를 비키라고 하는 거냐?”
“말하는데도 듣지 못하고, 보고도 모르는 멍청한 녀석이구나!”
대로인 만큼 양쪽으로 비키면 충분히 서로 지나칠 수 있음에도 이쪽 마부도, 저쪽 마부도 길을 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그냥 비켜 주라고 할 수도 없고.’
역시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비켜 주면 분명 뒷말이 많이 나올 터.
“멍청한 놈! 에렌에서 베스타인 가문의 마차에 비키라는 놈이 어디 있냐!”
“베스타인가는 위대한 무가로, 예와 식을 중시한다 들었는데, 어찌 일하는 자들은 이리 멍청한가!”
“뭐라!”
양쪽 마부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에렌에서 가문의 표식을 보고도 비키지 않는다면!’
이곳에서는 마부도 전문직이다.
대로에서야 서로 알아서 비키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귀족들보다 귀족가의 문양을 더 많이 아는 부류가 마부들이다.
그런데 우리 마부는 상대를 몰랐고, 상대도 양보하고 있지 않다면.
‘제국의 귀족이 아니겠구나. 하지만 에렌에 오면서 가장 기본적인 공부도 하지 않고 왔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추론이 가능해진다.
저 마차는 외국에서도 명망 높은 가문일 것이다.
하긴 육두마차를 끄는 가문이다.
“양보하라!”
그렇다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어 그리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양보하세요.”
저쪽 마차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며 마차 창으로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예닐곱 살은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아이였다.
순간 가슴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아도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놀랐느냐?”
“아닙니다. 저희 사람이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똑 부러지는 목소리.
이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부들은 서로 마차를 피해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성으로, 여아는 반대편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어디서 봤었나?’
뭐라 설명해야 하나?
어디서 본 얼굴은 아닌데, 친숙한 느낌이랄까?
‘신기한 일일세. 왜 언젠가 꼭 다시 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지?’
주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 있다던데, 저 여아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성에 도착해 있었다.
“공작님께서 너에 대한 관심이 정말 지대하시구나. 너 온다고 약속이 있음에도 나가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며 페컴이 날 그리로 안내했다.
“로라스입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갔다.
매번 느끼지만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다.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커다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에는 제국과 대륙의 지도가 걸렸을 뿐.
황량하다고 해도 좋은 분위기다.
“그래, 마탑은 어떠하더냐?”
“배울 것이 많았지요.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뿐이냐?”
그뿐이냐는 건 원하는 대답이 있다는 뜻이다.
“언제 저도 그런 탑을 소유할지 궁금했습니다.”
“흐흐흐. 마탑의 소유라……. 마법사가 되고 싶은 거냐?”
“마법사만이 마탑을 가지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순간 굳은 할아버지를 보며 다시 말했다.
“할아버님은 마법사가 아님에도 마탑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난 그런 거 안 키운다.”
“헤르메스는 할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 당연히 그녀의 마탑도 할아버지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대번에 안색이 변하며 반문했다.
“그럼 지금 넌, 내 것을 탐하는 것이냐?”
손자가 막연히 바라는 희망으로 치부해도 될 것을, 해석을 저리한다.
이게 바로 노년의 권력자가 어떤 사람인지 여실히 보여 준다.
“할아버지 것을 탐하지 않습니다. 저는 할아버님의 손자이니까요.”
“그 말은 남의 것이라면 안 그랬을 거란 소리로 들리는구나?”
나도 반문했다.
“키우는 것보다 다 자란 것을 빼앗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뭐?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탓하는 것 같은 말이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뻐하는 표정이다.
사실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다.
키우는 것보다 빼앗는 게 빠르다. 실제로 내 계획 자체가 빼앗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디 남이 제 것을 준다더냐?”
“주면 빼앗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지 않으니 빼앗는 것이지요.”
궤변에 가까운 말장난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궤변이 아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이걸 몰라서 못 하는 자가 있고, 알면서 못 하는 자도 있지만 난 둘 다 아니다.
실제로 난, 아니 전생의 유역후는 그렇게 천황성을 구축했다.
‘정확히는 그 제자들이 한 것이지만.’
어찌 됐든 하나의 세력을 키워 천하를 제패한 기억이 있었다. 디테일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나, 그 개념은 정확히 잡고 있다.
“주지 않으니 빼앗는다. 하하하핫!”
요새 들어 내 앞에 광소를 터트리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리 오너라.”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