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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37화 (3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7)

공작이 물었다.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냐? 정말 내 곁에 남을 셈이냐?”

“언젠가는 그리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아버님에게 뭔가를 배우려 해도, 제가 일정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날 방패막이로 삼은 거였군.”

로라스는 과할 정도로 정색하며 말했다.

“진심입니다. 결국엔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청할 날이 있을 터. 그 전까지 제가 수준을 끌어올려야, 가르치시는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얼씨구.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구나.”

“그것 역시 곧 증명해 보일 겁니다.”

공작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마. 그럼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에르페유도, 헤르메스도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터인데.”

“할아버지!”

“말하거라.”

“제가 꼭 한 명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까?”

“…….”

“두 사람 모두 절 후인으로 삼고 싶어 하는데, 두 사람 다 독차지하면 제게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크하하핫. 두 명 다 선택하겠다?”

이 양반이 왜 그럴까? 자신도 내 처지면 분명 그리 했을 텐데.

“배움의 길은 끝이 없으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자신감 있는 건 좋지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네가 마나와 포스 감응력이 둘 다 최상이라 하지만, 배우는 건 또 다른 것. 어설프게 두 개를 다 배우느니 하나만 집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포스와 마법, 두 개 다 가능합니다. 물론 이것도 곧 증명할 것입니다.”

“그럼 난 자신감일지 오만일지 확인만 하면 되겠구나.”

할아버지를 직시하며 말했다.

“두 사람의 모든 것을 배우면 그다음에는 할아버지 차례입니다.”

“하하하하핫! 좋다! 그럴 능력만 되면 뭐든 내주겠다. 하지만 형편없다면 그만한 대가도 치러야 할 것이다.”

“기다리세요. 할아버지 것을 가져오기까지 얼마 안 걸릴 테니까요.”

즐거워하는 듯한 저 눈빛.

재능 있는 손자를 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이 당분간 내 목적이다.

그래야 얻는 게 더 많아질 테니 말이다.

* * *

지하 3층, 지상 10층으로 이뤄진 마탑은 정말 컸다.

‘놀라운 건축술이다.’

유역후의 기억에서도 이만한 높이의 건축물을 본 적이 없다.

“어때, 놀랐지?”

그런 내 표정을 보며 에르자일은 자랑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세계 어디에도 우리 탑만큼 거대하고 높은 곳은 없지.”

“제국에 이보다 더 큰 탑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헤르메스의 라이벌로 손꼽히는 테이아의 마탑 이야기 때문인지 에르자일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높기는! 어떻게든 우리 탑보다 더 높게 보이려고, 지붕에 아무 의미 없는 돌덩어리 몇 개 더 쌓았을 뿐이야. 치워 내고 보면 우리가 훨씬 커.”

굳이 이런 이유로 에르자일과 논쟁할 필요는 없다.

마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공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공에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공에 룬어를 쓰는 과정인가?’

그리 생각할 때 에르자일이 설명했다.

“탑 일 층은 이제 막 룬 하나를 다룰 수 있는 수련자들이 있는 곳이야.”

그녀는 조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룬어를 알고 쓸 줄도 아는데…… 여기서 반 이상은 위층으로 올라가질 못해.”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다른 분야는 노력으로 일정 수준까지는 올릴 수 있지만, 마법은 그렇지 못해. 타고난 감각. 감응력. 기본적으로 이게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그대로 도태돼.”

“헤르메스 님의 마탑인 만큼 재능 있는 자들만 모으는 게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대부분 감응력만 테스트해서 들어온 이들이야. 감각이 없으면……. 그래서 네가 대단하다는 거야!”

“내가? 뭐가 말이지?”

“스승님께서 네 감응력은 물론이고 감각까지 눈에 보였다고 하셨거든.”

“눈에 보인다고?”

“나도 어렴풋이 그 의미만 알지, 너에게 정확히 설명해 줄 수는 없어. 다만…… 너 스승님의 마나를 느꼈을 때 뭔가 하지 않았어?”

뭘 하긴 했었다.

처음에 마나를 끈적끈적하니 기분 나쁜 기운으로 느꼈으니까.

‘어쩌면 그 마법의 기운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기분 나쁘다고 표한 적이 있긴 했다.

헤르메스는 대마법사라 불리는 만큼 그런 기운을 눈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냥 뭔가 느껴졌길래 떨쳐 내려고 했던 것 정도?”

내 대답에 에르자일이 말했다.

“마나가 그리 느껴졌어? 내가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는 뭔가 따스했는데. 그걸 마구 받아들이고 싶어서, 막 팔을 움직였거든.”

나비처럼 두 팔을 휘두르는 에르자일.

‘어렸을 때부터 마법만 배워서 그런가? 해맑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며 말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나한테서도 그걸 보셨대. 그래서 내가 수제자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지.”

“다른 수제자들도 있어?”

“응. 두 분이 계시는데 마탑에는 안 계셔. 마탑에서는 다섯 개의 룬을 다루는 순간 밖에 나가서 반드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데. 한 분은 용병단에, 한 분은 트레저 헌터로 활동하며 그걸 입증하시는 중이지.”

“너는?”

에르자일은 수줍은 듯, 한편으론 기대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말씀이 어쩌면 3년 후면 못 볼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어.”

“3년 후면 다섯 개를 다룬다는 뜻이네?”

“아마도. 요새 부쩍 마나의 기운이 강력하게 인지되는 게, 하나 더 다룰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도 생기니까.”

그녀는 그것을 시작으로 마법에 관하여, 그리고 탑과 규칙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에렌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있는 동안은 최대한 이용해야 할 곳이기에, 열심히 기억했다.

그렇게 탑을 계속 올라 6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해야 해. 이곳부터는 여섯 개의 룬을 다루는 대단한 선배님들이 계시니까. 스승님께서 특별히 신경 쓰시기도 하고.”

에르자일은 탑에 칸칸이 되어 있는 방문들을 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엇보다 여기 좀 이상한 분이 계시거든.”

뭔가 더 말하는가 싶었지만, 정말 있기 싫은 듯 에르자일은 내 손을 붙잡아 끌며 위로 올라갔다.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 하루 종일 마법만 익히면 정상일 수가 없지.’

올라갈수록 바닥 면적은 점점 줄고 있었고, 그 탓에 답답한 느낌도 든다.

그렇게 7층을 지나치고 나서야 헤르메스가 있는 8층에 이를 수 있었다.

“왔구나!”

새하얀 피부 때문에 더 눈에 띄는 풍성한 적발.

흔치 않은 미모를 가졌으나 깊은 눈빛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의 여인.

헤르메스는 분명 매력이 있는 여자다.

“왜 이제 온 거야? 정말 공작 각하 옆에 있으려고 했던 거야?”

살짝 투정 어린 목소리.

그런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헤르메스 님.”

기이한 사술 때문에 첫 만남이 고약했지만, 거대한 마나석을 예물로 보냄으로써 내 수련을 돕고, 영지 발전에 초기 자금까지 마련해 준 여인이다.

‘기본적인 예는 갖춰…….’

뭐 하는 짓이지?

날 와락 끌어안고 꽤나 큰…… 흠흠. 여하간 그녀를 밀어내야 했다.

숨 막힌단 말이지.

헤르메스가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뒤로 슬쩍 물러나는 데 성공했고, 그녀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리 훌륭하게 성장할 줄 알았으면 내가 직접 내려가서 에듀 경과 담판을 지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단 말이지.”

뭔가 좀 흉악한 말이긴 한데, 곧 의문이 풀렸다.

“정말 열심히 했구나. 성에서 봤을 때부터 얼마나 좋았는지. 네 마나와 내 마나가 상성이 아주 좋더구나.”

“속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와는 별개의 것이다. 뭐랄까? 마나의 순수함 그 자체의 상성이라고 할까?”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게다가 네가 마나 속성의 기운을 가지려면 아직 멀었지. 마법을 쓰지 않고도 그 기운을 보려면 십수 년은 고련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니.”

헤르메스는 그러다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속성이 맞더냐? 같은 재능이라 하더라도 어떤 이는 불 마법을, 어떤 이는 물 마법을 수월하게 배우고 잘 쓰기도 하는데.”

확실히 마법 이론은 무리와 비슷한 면이 많다.

무림에서도 저마다 오행의 기운이 다른 부분이 있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아! 아직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을까? 그러니 진작 왔으면 좋았잖느냐. 혼자 익히는 건 한계가 있고, 또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어 마음 졸였는데.”

“굳이 구분할 생각도 없고, 특별히 막히는 것도 없어서.”

“막히는 게 없었어?”

헤르메스가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했다.

“일단은요. 내가 쓰고 말하는 것. 그래서 마나의 기운을 확고하게 인지한다. 그것에만 집중하니 어려울 건…….”

“그래도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감응력이 좋고 감각도 좋다지만 그것을 시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이렇게 말로 할 필요는 없지. 공부를 어디까지 해 왔는지 볼까?”

헤르메스를 따라, 아니 끌려 그녀의 연구실로 갔다.

“로라스 네가 엄청난 건 아는데, 이번엔 좀 심했다.”

같이 뒤를 따르며 에르자일이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어렵지 않다니. 왜 수많은 마법사들이 그리 공부하고 애를 쓰는데. 룬의 숫자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마치 커다란 장벽 같은 걸 맞이해서야.”

마법을 쉽게 본 건 아닌데, 헤르메스도 에르자일도 뭔가 오해를 하는 듯했다.

“그 장벽을 뚫든 기어올라 넘어가든, 모두 필사적이 되어야 가능한 거란 말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왜?”

“아직은 그렇다는 것뿐이다. 쉽게 본 건 아니니.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고.”

“하기는 이제 룬 하나를 다루는 것이니……. 사실 나도 한 개를 다룰 때는 크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왜 한 개라고 생각하지?’

오해를 풀려고 한 말이, 아무래도 또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은데 말이다.

그사이 헤르메스는 하나의 장소로 우리를 인도했다.

‘으음!’

무인에게 개인 연무장이 있는 것처럼, 마법사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무인의 연무장은 매우 단순한 구조인데…….

‘대체 뭘 어떻게 이용하려는 거지?’

헤르메스의 연무장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일단 바닥은 깔끔한 돌로 만든 게 아닌 흙으로 이뤄져 있는데, 평평하지 않고 돌과 나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 보이는 연못. 사실 그 안에 물고기가 있지 않았다면 그냥 물웅덩이로 보였을 테고, 주변에 줄로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것들은 온갖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묘하게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은 것이 마치…….

질서정연한 쓰레기장 같았다.

“그럼 한번 볼까?”

헤르메스의 말에 반문했다.

“어떤 걸 보여 드릴까요?”

“네가 공부했던 것 전부.”

간략한 대답에 별 의문 없이 중앙으로 들어갔다.

어떤 것부터 시작할까?

여자 손 처음 잡아 본 총각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법은 재미있는 학문이고, 중독성이 강하다.

개천지보의 막강함만 아니었으면 마법을 진지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손을 들었다.

“라나!”

룬어를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 형태를 그렸다.

번천 때문에 버릇처럼 물의 기운을 불렀고,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타!”

“더뷔!”

계속해서 불의 기운도 불렀고 땅의 기운도 그렸다.

여러 속성의 기운을 유지하고, 인지하고 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개천지보 내력의 특질은 조화.

매일 심법을 운용하고, 운기조식하는 내게 그건 정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기 속성이 가장 맞는다고 할 걸 그랬군.’

사실 헤르메스가 아까 무슨 속성이 맞느냐고 할 때, 모든 속성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쪽이 내게 가장 맞긴 할 것이다. 개천지보와 비슷한 성질의 기운이니까 말이다.

“에진.”

그대로 바람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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