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6)
쿠웅! 쿠웅!
순간 뭔 소린가 싶었다.
“집사! 집사!”
그리고 거대한 목소리를 울리는가 싶더니.
“여기 있었구려!”
우리의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번천도 덩치가 큰데, 이 사람 앞에서는 왜소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의 거인이었다.
“흐흐흐흐흐.”
거인이 날 보더니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향해 두 손을 냅다 뻗으며 소리쳤다.
“반갑다, 로라스!”
두 손을 피하려다, 반가움에 내민 손이라는 걸 알기에 양팔이 잡혔다. 순식간에 양어깨에서 압력이 전해졌다.
“에르페유 백작님이시죠?”
얼굴을 기억해 냈다. 시험장에서 날 시험했던 사람이었다. 제법 강한 사람이라 기억에 남은 것 같다.
“기억하는구나. 역시 똑똑한 녀석이야.”
“백작님, 그 손부터 푸심이…….”
옆에서 페컴이 하는 말에 에르페유는 그제야 깨달은 듯 급히 두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런. 내 너무 반가운 나머지.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강한 자가 맞다. 잠시 내력을 운용해야 할 정도였으니.
“하하하. 방금 포스를 느꼈는데. 벌써부터 포스의 운용이 그리 가능하다는 거지? 진즉 내가 왔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에르페유 백작님을 뵙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다.
‘에팔란트의 지원군에 자신의 센터 무인 열 명을 끼어 넣었고, 그들의 실력은 좋았으니.’
에르페유는 내가 이용해야 할 사람 중 하나다.
“그러냐?”
“포스를 수련하는 이라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기쁜 얼굴로 묻는 그에게 마주 웃어 주자 에르페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어디 가볍게 몸이라도 풀어 볼까?”
“에르페유 백작님, 로라스는 오늘…….”
페컴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에르페유 백작님께 한 수 지도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요.”
“역시! 그렇지. 타고난 무인은 언제나 남과 견줘 보고 싶어 하지.”
에르페유는 그거 보라는 듯한 시늉을 했고, 페컴은 그런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에르페유를 따라 성내 연무장으로 갔다.
* * *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를 것이다. 너는 포스를 타고났으니까.”
“그렇습니까?”
“내 앞에서는 겸손 떨지 않아도 된다. 모를 리가 있을까? 그 희미한 기운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는데. 그때 벌써 그런 감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어떻게 변했는지 기대가 되는군.”
나도 기대된다.
권신 에르페유.
제국뿐 아니라 전 대륙이 이름만으로도 공포에 떤다는 무인.
그에 앞에 섰다.
앞에서 자세를 잡자 에르페유가 물었다.
“검을 들지 않을 거냐?”
“권신 앞에서 검은 예의가 아닌 듯하여.”
“으하하하하!”
그는 미친놈인가 싶을 정도로 웃더니 말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남자는 주먹이라느니, 무기는 약한 자나 드는 거라느니 흰소리는 안 했으면 하는데 말이다.
“남자는 역시 주먹이지. 적을 타격할 때 손끝에서부터!”
파앙! 파앙!
“이 가슴까지 전해지는 그 짜릿한 감각. 무기를 쓰는 자들은 절대 맛볼 수 없는 그 쾌감!”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뭐, 그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에르페유는 계속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무기를 쓰지 않는 것이 미련하다고도 한다. 애초에 인간은 약하니,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지.”
그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권사는 강해질수록 다른 무인들이 가질 수 없는 영역을 가진다. 그게 뭔지 아느냐?”
단순하다고 하나 역시 권신은 권신.
그의 말대로 권사는 다른 분야의 무인들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무림에는 길면 유리하고 짧으면 치명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장병기는 적과의 거리 싸움에서 유리하나, 단병기는 그 하나하나의 위력이 치명적이라는 뜻이다.
권사는 그런 면에서 가장 치명적이다. 전신의 힘을 십 할 고스란히 전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권사는 처음에는 불리하나 거리를 좁히는 순간 가장 치명적인 존재로 바뀐다.
‘무리를 잘 정립했다.’
그리 생각하며 대답했다.
“무기를 포기함으로써 근거리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럼으로써 손과 발을 뻗는 그 공간은 완벽한 나의 것.”
“…….”
“그 영역만큼은 그 어떤 무인들보다 확고하게 구축 됩니다. 백작님께서는 그것을 알려 주고 싶으신 거겠지요?”
순간 에르페유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 모른다고 말하여 그의 흥을 돋워 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야 나를 더 욕심내게 만드는 것이 유리할 듯했다.
‘에펠란트 남작과의 대화는 참으로 유익했단 말이지.’
예상은 했지만, 그가 확실하게 알려 줬다.
에르페유가 나를 자신의 무파인 아이언 핸드 센터의 수련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고. 그것도 에르페유 자신을 보내면서까지 절실하게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의 가치를 확실하게 올리기로 했다. 그래야 그것을 미끼로 에르페유를 더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너!”
굳은 표정의 에르페유가 버럭 외쳤다.
“천재구나! 너는 정말 내 제자가 돼야 해!”
‘이 정도로 벌써부터 그러면 너무 싱겁지.’
자세를 잡았다.
“권신의 영역을 보길 원합니다.”
강진난화(强震亂花).
무림에서도 일절이라 불리는 금나수법을 보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재미있을 것 같다.
* * *
이 큰 탁자에 앉은 사람은 넷인데, 시중을 드는 사람이 스물이 넘어간다. 그중 반은 음식을 부지런히 교체하느라 바쁘다.
우걱우걱.
공작 영감을 보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잘 먹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탐욕스럽다.
그게 나쁘진 않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감의 성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을 닮은 건지, 원래 그런 건지 먹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그래, 결심이 선 것이냐?”
그래도 내가 손자인데 배려 따위는 없다. 자신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기 무섭게 용건부터 꺼낸다.
뭐, 상관없다.
왕성하게, 탐욕스럽게 먹는 건 나도 뒤처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난 이미 영감보다 더 빨리 내 몫을 다 해치웠으니 말이다.
“때가 되었으니 왔고, 때가 되면 돌아갈 것입니다.”
“때라……. 그 때라는 걸 아무나 정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
웬만하면 좀 넘어갈 법한데, 굳이 물고 늘어지는 영감에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니 제가 정하는 거지요.”
또 뭐라 맞받아칠지 흥미가 일 때, 영감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그렇지. 내 일인데 내가 결정하는 거지. 마음에 쏙 드는구나.”
“저도 베스타인가의 사내이니 당연한 거지요.”
슬쩍 가문의 이름을 치켜세우며 그를 불렀다.
“공작 각하.”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사석이다.”
그렇긴 한데 말이다.
‘난 로라스다. 로라스다.’
세뇌가 좀 필요한 부분이다. 정체성 확립을 했다고 하는데, 자꾸 유역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능동적으로, 유리한 쪽으로 유역후가 되고, 로라스가 되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공작이 고개를 돌려 에르페유를 보며 말했다.
“잘도 꼬셔서 데려왔구나. 내 곁에 있으라는 것도 싫다고 내려간 놈인데.”
“흐흐흐.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포스에 대한 갈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권유했을 뿐.”
락에 토벌 지원군을 보내 준다는 미끼가 권유로 포장되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테니까.
“주군! 로라스가 어찌 에르페유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지닌 마지막 한 사람.
“로라스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 온 겁니다. 이미 에듀 경과도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거고요.”
헤르메스다.
그녀도 예물 한 번 보낸 걸로 이야기가 된 걸로 포장을 했으나, 역시 신경 쓸 것 없다.
“뭔 소리야! 내가 에펠란트 남작을 보내서 제안한 건데.”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정말 좋지 않다.
할아버지가 앞에 있는데도 서로 이를 드러내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시끄럽게!”
역시 할아버지가 나서자 입을 꾹 다문다.
할아버지가 날 보며 물었다.
“그래, 어느 쪽이냐?”
난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쪽은 어마어마한 가치의 마나석을 보냈고, 한쪽은 병력을 보내 토벌대를 도왔다. 여기서 한쪽 편을 들면 한쪽은 분명 실망할 터이고, 내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안 됐다.
양쪽 다 필요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뻔히 사정을 알 터이니 도와줬음 했는데, 할아버지는 오히려 즐기는 표정으로 대답을 강요했다.
“듣지 않았느냐. 양쪽 다 자신 때문에 네가 왔다 하지 않았느냐.”
뻔뻔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에르페유 님, 헤르메스 님. 두 분의 영향도 있긴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뵈러 왔는데.”
“…….”
손자가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
“또 뭔가를 배우고자 하면 가장 강한 사람에게 배워야 할 터인데…… 혹시 제게 가르침을 주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에르페유와 헤르메스의 표정이 굳었고.
“하하하하!”
공작은 광소를 터트렸다.
“그렇지! 배우려면 내게 배워야지. 크하하핫!”
슬쩍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를 보고 말했다.
“권신이라 불리는 에르페유 백작님과 매지스터 헤르메스 님께서도 배움의 기회를 주시면, 그것도 열심히 배울 생각입니다.”
“크하하핫! 자네들이 당했어.”
내 대답에 공작은 대놓고 두 사람을 약 올리기 시작했다.
* * *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 몸체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선.
발레리스의 커터.
로라스는 단 한 번도 무기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 하지만 커터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동자에 탐욕이 보였다.
‘어차피 내게 무기는 의미가 없긴 한데.’
어린애 장난감 바라듯이 그냥 가지고 싶은 무기다.
그런 의미에서 공작의 컬렉션을 모아 둔 방은 놀이터와 같았다.
‘으음. 이 냉기 가득한 검은 번천이 보면 좋아라 할 테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예술품인 것처럼 무기 하나하나를 구경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공작이 서 있었다.
“진작 할아비 말을 들었다면 그건 네 것이 되었을 것이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원래 일어나는 시간이다. 새벽부터 이곳에 온 걸 보면 그게 엄청 가지고 싶긴 한가 보구나.”
“네. 가질 겁니다.”
“그건 내 것인데?”
“주실 겁니다, 제게.”
공작은 피식하며 말했다.
“네 아비는 말부터 앞서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시게 될 겁니다.”
어찌 보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는 로라스의 대답에도, 공작은 미소 지었다.
‘에듀에게서 어찌 이런 자식이 나왔을까?’
에듀는 재능 있는 핏줄이다.
자신의 자식은 아니나 사촌의 아들인 만큼 다른 방계보다 훨씬 가까운 핏줄.
아니, 핏줄을 떠나서 그만큼 재능이 있는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못난 놈.’
하지만 야망이 없고, 정치 감각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 재능을 가지고도 위로 올라갈 욕심을 내지 않았고, 자신이 원한 것만 가지고 이루려 했다.
눈앞의 로라스는 달랐다.
자신의 수족인 재능 있는 모든 이가 탐낼 정도로 엄청난 재능이 있었고, 에듀가 가지지 않았던 탐욕 또한 있었다.
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방패로 세운 정치적 감각도 좋았다.
‘이놈만큼은…….’
수족들이 원해도 뺏길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야 너무 바빠서 세심하게 키울 수는 없으나, 이런 재능을 발화시키는 재미가 또 어디 있을까?
시간을 두고 다듬고 키우면 가문의 주축 중 하나가 될 거라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