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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35화 (3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5)

의외로 어머니는 내가 떠나는 걸 반대하지 않으셨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갔다 와야지. 억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네가 배움에 뜻이 있으면 그래야지.”

날 보내는 아쉬움보다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컸기에, 놀랍도록 담담히 사실을 받아들이셨다.

틈틈이 시그탑을 비롯한 브렌드에게는 앞으로 훈련 과정을 이야기했다.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포스의 맛을 본 이상 계속 열정적으로 달려들 테니까요.”

내 말에 브렌드가 동의했다.

“맞습니다. 스스로 체감하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생업을 뒤로하는 게 걱정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재정적인 여유만 된다면 원하는 자들은 모두 영지의 병사로 만들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 아쉬울 뿐입니다.”

드리프가 옆에서 하는 말에 브렌드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는 영지민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보수는 가족들 건사할 정도면 된다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기사들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지의 사내들이 영지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벗고 나서지만, 아무래도 정규병들만큼의 능률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강병을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그런데 기회가 왔음에도 재정이 받쳐 주지 못하니 안타까운 것이다.

“점차 나아지겠지요.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강해질수록 영지 내 수입도 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제 외지에서 사람들이 유입될 테니 뭔가 더 나아질 방법이 분명 있을 겁니다.”

아직 그들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워낙 장기 계획이니만큼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데, 괜한 헛바람을 넣는 것보다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느릿하게나마 확실하게 발전하는 것이 나았다.

“아버님을 부탁합니다.”

“그런 걱정 하지 마시고, 많이 배워서 돌아오십시오.”

“그렇습니다. 공자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이 영지에는 희망이 넘치지요. 에렌은 보고 배울 게 많은 곳입니다. 건강만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기사들과 대화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번천이었다.

데리고 가도 큰 문제는 없지만, 따라오는 것보다 여기서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군…….”

“시그탑에게 이야기해 뒀다. 그가 뛰어난 기사인 건 너도 잘 알 터. 모르는 게 있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포스 수련도 잊지 마라.”

“네, 주군.”

“네 의지로 봤을 때 무슨 이야기든 쓸데없는 소리가 되겠지. 하지만 술은 반드시 줄여라. 이건 명령이다.”

“돌아오실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이야기하려 했으나, 괜히 그의 결의를 깰 필요는 없다. 과거의 악몽을 술에 의존하는 버릇을 고치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내 앞에 앉아 봐.”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확실하게 해 주고 싶었다.

번천이 앞에 앉았고, 그의 등 뒤에 앉아 영대혈(등 척추 중앙에 위치한 혈)에 두 손을 올렸다.

“천천히 서클레이션을 시작해.”

번천이 운기조식을 함에 따라 손바닥에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입문이 늦은 만큼 탁기 가득한 체내에 이 정도의 기운을 품고 있다는 건 엄청난 고련을 한 증거.

이거야말로 정성을 기울이면 통한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번천만큼은 걱정할 게 없을 거 같다.

“말하지 말고 듣기만 해.”

개천지보를 운공하면서 말했다.

“네가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어느 순간 꽉 막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거다.”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 줬다.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 없다. 지금 이 기운을 기억해라. 이게 네가 다음에 느끼게 될 기운이니.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정진해야 한다.”

“…….”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절대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있다면 문제 될 것 없으나, 내가 자리를 비운 이상 문제가 생기면 심각해지니까.”

입문공에서 주화입마라고 해 봤자 가벼운 내상을 입는 것이 전부지만, 필요 이상으로 겁을 줬다.

열정은 좋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친 게 모자람보다 못하다.)이라고, 괜히 몸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숨 거두고.”

“후우웁!”

그의 앞으로 가서 물었다.

“어때? 느낌이 와?”

“이건……. 제가 이런 걸 가지게 된단 말입니까?”

번천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것뿐일까? 내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 그…… 이뤄 주겠다고.”

“주군…….”

번천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걸로 과거의 악몽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 * *

“도시는 정말 크겠지요?”

과장을 좀 더 해서 같은 질문을 열 번이나 받았다.

‘억지로라도 떼어 놓고 왔어야 했나?’

생전 처음으로 락을 떠나와서 흥분하는 건 이해하나,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에렌행에 테라를 동행시킨 건 내 뜻이 아니었다.

―몸 종 하나는 있어야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어머니는 이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않으셨다.

―네게는 필요 없을지 모르고, 어미 역시 필요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넌 혼자 잘하는 아이니까.

하지만 초청을 받아서 가는 만큼 반드시 차려야 할 격식이 있다고 하셨다. 그게 시동, 또는 몸종이다.

이런 문제로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번천과 달리 테라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수련의 효율성이 좋을 것 같아 그리하기로 했다.

‘이놈이 좀 별난 놈이란 걸 깜빡한 게지.’

뭐, 좋게 보면 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녀석이었고, 그걸 통해서 영지의 사정을 많이 알게 됐으니 말이다.

“아주 크고 재미있는 게 많을 테니, 이제 그 입 좀 다물고 운기조식이나 해. 네 수준에서는 시간이 정말 금이다.”

“네, 주군.”

한 달 넘게 걸리는 여정이다.

그 기간 동안 테라의 입문 무공을 신경 써 주며, 나도 운기조식에 힘쓸 생각이었다.

지금 시간이 중요한 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니 말이다.

마차는 계속 굴러갔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나도 불침번을 서겠다는 말에 에팔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인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부담 갖지 마라.”

“그리 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불안해서 그러느냐? 내가 데려온 병력은 모두가 정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의무를 다하고 싶은 마음뿐 그런 생각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내 말에 에펠란트가 미소를 지었다.

“부친께서 정말 교육을 잘 시키셨구나.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너 같은 아이는 보지 못했다.”

“과찬이십니다.”

“나도 들은 게 있다. 벌써 병력을 지휘하고 같이 훈련한다지? 영지민들도 그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한다고 하던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락은 작은 영지이니까요. 모두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에펠란트는 내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감탄밖에 안 나오는구나. 내 아들 놈이 너를 반만 닮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정말 괜찮다. 아니, 그럼 오늘만 나와 함께하겠느냐?”

“남작님께서도 불침번을 서십니까?”

“순서가 되면 해야지.”

이건 좀 의외다.

남작의 말대로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닌데 말이다.

에펠란트는 금방 그런 의문을 해소시켜 줬다.

“나도 기사다. 전장에서는 지휘관의 입장이니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수 없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느냐.”

아버지가 그를 엄청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모두가 잠든 밤.

그와 함께 야영지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는 적막한 분위기에서 생각을 좀 하기 위해 불침번을 자청했는데, 그와의 대화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생각 이상으로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듯했다.

“네 부친과는 실버 스워드 대회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실버 스워드.

황실에서 주최하는 대회로, 30세 이하의 기사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런 말 하기 뭐하다만 내가 손꼽히는 우승자는 아니었어도, 그래도 나름 우승 후보였는데 말이지.”

에펠란트는 본선 32강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가문의 기대가 커서 낙담했는데 네 부친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됐다.”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때 내 상대가 네 부친이었고, 대회 우승자도 역시 네 부친이었으니까.”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에펠란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십 선에만 드는 게 목표였는데. 네 부친 덕분에 오히려 더 돋보였다고 할까? 사람들이 명예로운 패배라고 수군대더군.”

“…….”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때 네 부친의 나이가 고작 열아홉이었다. 열아홉에 포스 유저. 그때 사람들의 반응이 엄청났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으나, 에펠란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난사람이었지, 네 부친은. 어린 나이에 우승까지 했는데도 거만함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성격이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지.”

“그랬군요.”

“너도 네 부친을 많이 닮았다. 벌써부터 이리 두각을 드러내니. 네 부친이 세운 최연소 우승자 타이틀이 여태 깨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네가 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런 공명을 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게 영지에 도움이 되고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는 방법이라면 생각해 볼 만도 했다.

‘기회가 되면, 뭐.’

염두에는 둬야겠다.

* * *

“우아!”

에렌의 큰 건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테라는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락만을 봐 왔던 녀석에게 에렌은 충격 그 자체일 터.

“너무 감탄할 거 없다. 우리 락도 이리될 것이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얼른 한몫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의욕을 앞세우는 녀석을 보고는 바깥을 쳐다봤다.

확실히 발전된 도시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이곳이 간직한 문화는 상상 이상이다.

가끔 제국의 수도가 황제가 있는 파이펫이 아니라 이곳 에렌이라 착각하는 외국인도 있을 정도이니까.

그렇게 별 탈 없이 에렌성에 도착했다.

“동행하는 건 여기까지구나. 그동안 즐거웠다.”

“감사드립니다. 남작님과 함께 오는 동안 배울 것도 많고, 즐거움도 컸습니다.”

“여기 계속 머무르는 한 다시 볼 날이 있을 거다.”

그렇게 에펠란트가 돌아가고, 응접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 페컴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결국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페컴은 흥이 난 얼굴로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저녁에나 돌아오시니. 그 전에 성 구경이나 할까?”

“감사합니다.”

페컴의 안내로 성안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사실 시험 때 성에 머무른 적이 있어, 생소하지는 않았으나 페컴의 안내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첨탑 같은 곳도 올라가고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방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군요.”

“역시 알아보는구나. 맞다. 이곳은 편의를 위해 설계된 곳이지, 방어를 위해 설계되지는 않았다.”

자신감인가?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황제가 존재한다지만 이곳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세계다.

내전이 아님에도 영지전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감히 에렌성을. 차라리 수도 파이펫이 공격당하고 함락되었으면 되었지, 이곳은 난공불락이다.”

그런 성을 자신이 관리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페컴은 집사임에도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에렌에 있는 마탑과 기사단의 숫자만 합쳐도 웬만한 소국은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지. 게다가 이름이 좀 있는 길드나 용병단은 반드시 여기에 거점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니.”

“대단하군요.”

“그 대단함도 공작 각하의 명성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분이 이곳에 계시니 난공불락인 게다.”

개인 한 명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말이지만 별 이상하게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당연한 거다.

공작 영감은 트렌센더스(Transcendence―초월자) 아닌가?

그렇게 페컴과 함께 성안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였다.

쿵쿵쿵.

어디서 공사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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