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4)
“전 주군을 위해 강해질 겁니다.”
“전 주군을 위해 더 빨리 강해지고 싶습니다.”
“전 주군을 위해…….”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달라붙는 파리처럼 앵앵거리는 녀석에게 한마디 했다.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든가. 말리지 않는다.”
“주군의 명령이라면 짚을 메고.”
“불길 속에 뛰어들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하지?”
시무룩해하는 표정으로 마보 자세를 잡는 꼬맹이의 이름은 테라.
귀찮아서 한 말이긴 했으나, 녀석은 2년에 걸쳐 그것을 해냈으니 나도 내 말을 지켰을 뿐이다.
“그걸 왜 해야 하는지 궁금한 거지?”
“네. 그렇습니다, 주군.”
반색을 하며 대답하는 테라.
어찌 설명해야 할까?
무공에서 기초의 중요성은 백 번을 말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리고 내외공의 균형의 중요성도 그렇다.
기초를 다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반복적인 수련이 필수적인 요소.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무공을 잘 모르는 이들도, 잘 아는 이들도 착각한다.
무식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기초가 잡힌다는 착각.
그게 틀린 건 아니다.
반복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다준다.
나도 그랬다.
무식과 무지를 넘어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수련에 집착해 왔다.
그래서 그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말이다. 기왕 하는 거 재미있게 하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당연한 말을 듣고 무슨 깨달음을 얻었냐고?
해 보면 안다.
내가 직접 반복하면서 그 성과에 집착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얻을 수 있는 걸 얻지 못하게 되고, 하나로 할 수 있는 걸 둘을 해야 한다.
게다가 난 그 비효율적인 수련의 극에 다다라 봤기에,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나에 해당되는 것이고, 테라는 아니다.
최소한의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수련의 재미는 그 이후!’
이 고비를 넘기면 하나를 배울 때 둘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난 약한 수하를 원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 네가 하는 그 훈련은 하체를 단련시키고, 다음 단계로 나갈 몸을 갖추게 해 줄 것이다. 너도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들었지?”
“어른들이 하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포스를 익히셨다고.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앵앵거리고 하라는 대로 해! 게으름을 한 번이라도 피우는 순간 널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은 취소할 테니까.”
효과가 좋다.
뭔가 결의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마보 자세를 취하는 녀석.
‘운 좋은 줄 알아라. 너는 무식한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한 번 가 봤던 길이니 더 옳은 길로 갈 수 있다.
유역후는 무식하게 제자들을 훈련시켰지만 내게 배우는 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하간 조용해지니 좋았고, 이제 내 수련에 집중할 때였다.
뿌우우우우웅!
그때 기다란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토벌대가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 * *
“우하하하! 내가 널 살린 거야!”
“살리긴 쥐뿔. 그 전에 내가 널 살린 건 잊었냐?”
영지민들이 자기가 더 잘났다고 떠드는 소리.
“이번에 제대로 한몫 챙겼네.”
“얼마야, 우리 몫은?”
“골드 코인 서너 개는 돌아갈 거다. 대박이다!”
용병들이 자신의 분배금에 흥분하며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리 등.
공터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분명 그런 분위기가 맞는데 말이다.
‘왜 저러시지?’
아버지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드리프와 브렌드의 표정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워낙 축제 분위기라 티 내려 하지 않는 것일 뿐.
논공행상 비슷한 행사가 시작됐다.
분배금 이외에 특별히 공을 세운 용병단, 병사들 몇에게 상금이 주어졌다.
이 척박한 땅에 때마다 용병들이 찾아오는 건 바로 이런 공정한 행사 때문이리라.
끝나지 않는 축제는 없다.
밤이 깊었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로 돌아갈 때쯤 시그탑이 와서 말했다.
“공자, 주군께서 영지 회의를 여셨습니다.”
“저도 참석합니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하나 영지 회의에 참석할 자격은 없다. 성인식을 치른 이후에야 자격이 된다는 말을 들어서 물은 것이다.
“네. 이번에는 공자님도 참석하라 하십니다.”
시그탑과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드리프 말이 이번 토벌은 성공적이었으나,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보통 토벌대가 토벌하는 영역은 주변 산, 숫자로 따지면 삼십여 개의 산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십 개를 간신히 채웠다고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공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잡은 마물도 많고, 희생자도 적어서 모두…… 아!”
순간 깨닫는 게 있었다.
평상시 삼십여 개의 산을 토벌하는데, 이번에는 이십여 개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십 개를 간신히 채웠는데도, 평상시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잡았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몬스터 숫자가 늘어났군요. 거의 배 가까이.”
“네. 그래서 무리하지 않고 돌아온 거라고 합니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영지 락은 몬스터를 잡아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
어쩌면 몬스터들이 늘어나는 걸, 더 좋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 영지 상황으로 봤을 때 좋을 게 없었다.
락은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
지금의 치안을 구축하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기사들, 그리고 영지민들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천천히 영지를 확장하려고 했다.
정신 사납지 않게, 적당히 지금의 여유도 즐기면서 그리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해서 나아가려 했다.
‘조금 서둘러야겠네. 정말 몬스터들이 늘어난 거라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영지 발전 계획은 현재 내 성장에 맞춰져 있다. 깨달음과 마나석의 도움으로 성장 속도는 기대보다 훨씬 빠른 상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거실에 들어갔다.
안에는 아버지, 영지의 두 기사. 그리고 에렌에서 온 지원군의 책임자 에팔란트 남작이 있었다.
“또 보는구나, 로라스.”
아버지보다 먼저 에펠란트가 날 반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내게 관심을 보인 기사였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호의 가득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유 없는 호의가 있을 리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지만, 접점이 없으니 그냥 사람 좋은 기사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아버지를 봤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앉거라. 아무래도 너도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입을 여는 아버지의 표정이 지나치게 무겁다.
배에 가까운 몬스터가 늘어났다고 저리 주눅 들 분이 아닌데, 마음이 무겁다.
회의가 계속되었다.
회의의 주제는 역시 시그탑이 오면서 말했던 내용에 관련된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에듀 경. 내가 지원을 온 시점에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오히려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번에 에팔란트 경과 수하분들의 공이 컸습니다. 이 에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공치사할 것 있습니까? 사실 진작 내려와서 몬스터도 잡고, 에듀 경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하하하하.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뭔가 중간을 생략한 듯하지만, 아버지는 호의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팔란트 경이야말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번 토벌전에서 보여 주신 행동만으로도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 제안도 신중히 생각해 주십시오. 일만 잘되면 에렌뿐 아니라 에르페유 백작님도 반드시 한 손 도우실 겁니다. 그러면 몬스터가 지금의 수배가 늘어도 문제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로라스에게도 이야기는 해야 하니까요.”
“물론이지요. 로라스에게도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게 조금도 없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에팔란트는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물음에 아버지는 기사들을 슬쩍 보았고, 세 기사도 나갔다. 그렇게 우리 부자만이 남았다.
“로라스.”
“네.”
“으음…… 말하기가 쉽지 않구나. 네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고민이고.”
말은 해야 하는데 뭔가 내키지 않는 기색이시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가 제게 하지 못할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저 로라스입니다. 붉은 대검 에듀 진 베스타인의 하나뿐인 후계자.”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날 안으셨다.
‘이 양반이 정말 왜 그러시지?’
뭔가 멋진 행동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분이기는 하나, 이렇게 낯간지러운 분은 아닌데 말이다.
“로라스.”
“네, 아버지.”
“내년 초에 가문의 시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느냐?”
그러고 보니 가문의 시험은 3년마다 열린다. 보통 봄에 열리는데, 지금은 겨울이니 몇 달 남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또 거길 갈 생각은 없었다. 내겐 시간 낭비다. 공작, 그 영감의 검은 가끔 생각났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살짝 밀어내며 물었다.
“또 나가야 합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게 좋은 명분은 되지. 네가 에렌으로 가는 것 말이다.”
지금 아버지의 말과 아까 에팔란트의 말을 조합하니 한 가지 결론이 떠올랐다.
“제가 에렌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군요.”
“네가 원치 않으면 보내지 않으마.”
“그러면 내년에는 지원군이 오지 않고 영지의 몬스터들은 우리만의 몫으로 남게 되겠군요.”
“…….”
대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내린 결론이 맞다는 걸 알았다.
“뭘 그리 고민하셨습니까? 갔다 오라 하시고, 갔다 오면 간단한 문제인 걸 말입니다.”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아비가 창피하다. 너를 팔아먹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버지는 락의 영주이십니다. 그것만 생각하십시오.”
“아비가 너 보기 부끄럽구나.”
단 한 번도 당신이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는 걸 알려 줘야 하나?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아버지 에듀는 명망 높은 기사이고, 사랑받는 영주이며, 좋은 남편이고,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난 웃으며 말했다.
“절 어디에 팔려고 하셔도 어려울 겁니다. 제 가치를 맞춰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가벼운 농에 아버지의 표정이 약간은 풀렸다.
“그렇지. 누가 너의 가치를 매기겠느냐?”
“어머니에게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도나 에렌으로 유학 가는 애들이 많으니, 저도 그 핑계를 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다. 그거까지 네게 맡길 수야 있겠느냐. 내가 말하마.”
후회하실 텐데 말이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에렌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과거. 또한 공작의 수족들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는 매우 길었지만 매우 흥미로웠으며, 기억해야 할 것들이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 공작의 관계를 들었을 때는 살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때 공작이 얼핏 보였던 애증이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에렌에 있을 때 누구와도 크게 척을 짓지 않았기에, 별 불안함은 없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하시고,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아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몰랐다면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저도 알았으니 문제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자꾸 노파심에 이야기를 하게 되는구나. 마지막으로 에렌의 사람들은 매우 정치적이다. 그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난 미소로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렸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기도 하고.’
에렌으로 한번 가긴 가야 한다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거긴 이용해 먹을 자들이 많은 곳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