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3)
근골하고 체력은 상관이 없었나 보다.
이레는 누워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번천은 사흘 만에 일어났다.
몸을 풀고 간단한 대련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사흘째.
오늘은 몸이 완전히 풀렸다고 자신하는 놈을 보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흐아아앗!”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어제보다 확실히 움직임이 더 나아졌다. 게다가 저 덩치에 무기가 둔기이다 보니, 위력도 강맹하다.
그것만으로 용병들 사이에서 실력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 본다면 형편없다.
슬쩍 옆으로 피하며 놈의 어깻죽지를 잡아 스윽 밀어 버렸다.
“용기는 좋은데 그리 단순한 움직임은 안력만 좀 통하지 않아!”
또 엎어진 놈을 보며 하는 말에 꽤나 억울했나 보다.
“공자님처럼, 그리 약삭빠르게 피할 수 있는 놈은 많지 않단 말입니다!”
반말과 존대를 교묘하게 섞는다.
‘무식한 놈은 역시 몽둥이가 약이지.’
맷집만큼은 정말 인정할 정도니, 스스로 깨달으려면 상당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난 이놈만 잡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고.’
목검을 들고 말했다.
“약삭빠르게 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내 몽둥이를 받아 내는 사람은 많다는 소리겠지?”
“손모가지 부러져도 모릅니다.”
놈이 의기양양하게 하는 말에 결정했다. 놈의 손목 정도는 한번 부러트려 놔야겠다고.
‘상처도 그렇고 뼈도 빨리 붙는 놈이니 며칠 고생하면 되겠지.’
유역후 시절엔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 이상을 깨닫는 제자들이라 편했지만 이놈은 아무리 봐도 강제적으로 깨닫게 해 줘야 할 것 같다.
“들어와.”
한마디에 득달같이 달려오는 번천. 그리고 허리를 크게 돌려 낭아곤을 휘둘렀지만.
타악!
‘힘들일 것 있나.’
목검을 낭아곤의 중심에 대고 그대로 이리 흘려주면 되지.
파아아악!
역시 힘은 장사다. 바닥이 저리 깊숙이 파이는 걸 보면 말이다.
“으…….”
그리고 신음을 흘리는 번천.
그 힘으로 맨바닥을 쳤으니 손가락이나, 손목에 충격이 가지 않을 리 없다.
빠아악!
그사이 난 놈의 이마를 목검으로 쳤다.
“아아악!”
“덤벼. 왜? 이렇게 막는 사람도 많았던 거냐?”
“우씨!”
놈은 허리를 돌려 낭아곤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고. 물론 그것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으윽! 내 허리!”
많이 아플 것이다. 허리를 그리 비틀어 허공을 쳤으면 말이다.
빠악! 퍼억! 퍼억!
그때부터 놈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그만! 아악! 그만하라니까요!”
멈추지 않았다.
‘이런 놈이 나중에 딴소리할 확률이 높으니까.’
사랑은 듬뿍 베풀어야 하는 법. 놈이 완전히 웅크려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목검을 휘둘렀다.
“그, 그만…… 제발…… 좀.”
“번천.”
“…….”
“번천!”
“네, 공자님.”
쪼그려 앉아, 엎어져 있는 놈과 시선을 마주하며 이야기해 줬다.
“지금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나도 널 도울 수 없다.”
“…….”
“기회를 두 번 주지 않겠다는 말이 뭔지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어?”
내 물음에도 녀석의 굳게 다물린 입은 열리지 않았다.
“좀 깨달아라! 멍청아!”
안 되는 놈, 의욕 없는 놈을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다. 굳이 이놈 아니래도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은 넘치고 넘쳤다.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놈의 입이 열렸다.
“어찌 그리 강하십니까? 공자는…… 어리지 않습니까?”
“둔하기는. 실력이 나이와 비례한다면 노인들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지 않겠냐?”
“…….”
“너는 그 괴물 같은 체력만으로도 남들을 압도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넌 그걸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고. 똥고집 계속 부리면 복수는커녕 어느 순간 어디 뒷골목에 버려진 시체가 될 거다.”
“공자를 따르면 강해집니까?”
확실히 단순한 놈이다. 묻는 게 참으로…….
“그냥 날 믿어. 그거면 된다.”
엉거주춤 일어선 번천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번천. 공자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이놈……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범상치 않은 놈이다. 원래라면 뭔 지랄이냐고 했겠으나.
‘이 정도면 양호하게 큰 거지.’
놈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 이놈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였다.
“네 충성에 마땅히 보답을 받을 것이다. 앞으로 네 은원은 내 은원이 될 것이고,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네가 머무를 곳이 될 것이다.”
가끔 머리 무거울 때 읽는 기사 소설에나 나올 듯한 대사를 내 입으로 이야기한 건 말이다.
* * *
“헤헤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번천이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니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한 후 녀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라에게 달려가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순한 양으로 돌변했다.
너무 급변하니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번천을 그다지 좋지 않게 봤던 집안의 시종과 시녀들도 어느새 그를 웃는 얼굴로 대했다.
이 모든 게 고작 닷새 만에 벌어진 변화였다.
“그리 웃지는 말고. 징그럽다.”
“다른 사람들은 다 좋다고 하던데요.”
“그건 네가 일을 도와주니 그런 거고. 여하간 오늘은 마법이나 보자.”
번천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야 뭔가 좀 휘두르는 재미를 알 것 같았는데.”
“앞으로 더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마법도 병행해야 한다면서.”
번천의 표정이 매서워진다.
번천에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으며, 마법은 그 때문에 익혔다.
마법 이야기에 또 원한에 대한 생각이 난 것 같다.
‘능력도 안 되는데 복수에 사로잡히면 실력도 안 늘 터. 당분간은 조심해야겠구나.’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또 녀석의 심성을 보면 배신할 것 같지는 않지만,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었지만 더 후벼 파서 좋을 게 없다.
다행히 번천의 표정이 금방 풀렸다.
“주군, 그런데 주군도 마법을 아십니까?”
“이야기했잖아. 룬어를 배웠다고.”
“룬어를 배운 것하고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내게는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은근 기대가 됐다.
개천지보를 수련하면서 틈이 생길 때마다 마법을 연습했지만 누군가에게 시험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에르자일이 시범을 보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남이 시전한 마법을 본 적도 없다.
‘번천에게도 배울 것이 있을 터!’
이래저래 그가 내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분명 그리 믿었는데!
“번천.”
“네, 주군.”
“너 대체 마법을 어떻게 익힌 거냐?”
“조금 그렇지요?”
조금 그런 정도가 아니다. 엉망이다.
에르자일이 마법사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으니 그녀의 마법 이론이 틀릴 리는 없을 터.
그에 근거하여 번천이 마법을 쓰는 걸 봤을 때는 엉망 그 이상이었다. 마나를 어찌 깨달았는지 의문이 일 정도다.
“누구에게 배운 거냐?”
“어렸을 때 마법사 집에서 종노릇을 했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본 것도 있고, 그냥 용병 생활을 하면서 마법 책을 사서 혼자 익혀 본 겁니다.”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게 아니면 독학으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게다가 마나를 깨치는 건…….”
번천은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처음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무슨 방법?”
“물의 속성을 느끼기 위해 물에서 살았습니다.”
번천이 마법을 익힌 과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난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체력은 타고났지만, 저런 의지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닌데…….’
옛날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는 어느 왕의 이야기가 절로 떠올랐다.
번천은 그 왕만큼이나 독한 구석이 있었다.
마나를! 특히 원수를 갚기 위해 물 속성의 마법을 배우려 물에서 사는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놈의 덩치가 왜 그리 큰지도 알았다.
하루 종일 물에서 사니 살이 짓물러지는 건 당연한 일. 제 딴에는 물에 더 오래 있기 위해 근육을 단련시켜서 살집을 키웠다고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결국 마나를 깨치고, 물 속성의 마나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동정심 따위도 들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내를 누가 동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녀석이 운이 좋아 제대로 된 스승만 만났다면 이미 대성했을 테니까.
“으음.”
번천에게 말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무엇이 녀석에게 최선이 될 것인지를. 그의 과거와 의지를 알았으니 나도 신중해지고 싶었다.
“번천.”
“말씀하십시오, 주군.”
“마나를 홀로 깨친 건 대단하다. 하지만 그 법칙이 엉망이다. 네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래도 안 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여태 그랬는지 모르지만, 계속 그리하다가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른다.”
번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왜 아닐까?
그리 고련을 해서 얻은 것들이 깡그리 무시당했는데.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내가 더 나은 방법을 알려 줄 테니까.”
“주군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물 속성이 담긴 마법 무기라도 있지 않는 한…….”
“필요 없어. 포스로 갈라 버리면 되니까.”
“포스는…….”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마. 충성에 보답한다고 약속했다.”
고개를 숙이는 번천을 보며 생각했다.
‘제자 하나 더 거두는 거지.’
그런 마음이다.
* * *
번천은 타고난 신력은 있으나 포스가 없다.
그 불굴의 의지로도 포스를 경험할 수 있는 인연은 없었던 듯했다.
‘입문공을 알려 줘도 근골이 굳은 상황이니…….’
번천의 나이는 서른.
개천지보의 입문공을 가르쳤으나 이 세계에서 말하는 포스 유저 소리를 듣게 하려면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일단은 병사들과 영지민을 훈련시켰던 것처럼, 포스부터 느끼게 하고 그의 수준을 봐 가면서 손을 써야 할 것 같다.
다행히 번천이 스스로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천하제일이니, 기대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있었다.
그때부터 번천을 독하게 굴렸다.
“살이 물러질 때까지 물속에 있었지? 이번에는 근육이 터져 나가고, 뼈가 깎여 나갈 때까지 달리는 거다.”
번천에게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는 어떠한 요령도 부리지 않았고, 신체가 정신을 지배할 때까지 내 명령을 수행했다.
너무 열심이라 나조차도 자극이 올 정도라, 나도 외공 공부가 늘어 가는 나날이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제가 바로 주군의 첫 번째 기사란 말입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게 달리기 시작한 나와 번천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치는 소년.
아! 잊고 있었다. 이 마을에 번천만큼이나 기사, 영웅 이런 거 좋아하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약속했었다. 2년 전 여기서 대장이 되면 내 수하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약속대로 제가 여기서 대장입니다.”
“네가?”
“사실 테레스 형은 아직 이기지 못했으나, 얼마 전 성인식을 치르고 토벌대에도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대장입니다.”
어린애라 독기를 부려도 며칠이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약속대로 절 주군의 신하로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주군의 첫 번째 기사입니다!”
“넌 뭐냐?”
소년을 보며 묻는 번천의 목소리가 곱지 않다. 하긴 달리다가 이리 맥이 끊기면 다시 달릴 때 상당히 애를 먹는 건 사실이니까.
“주군을 모시겠다는 그 마음은 가상하지만 좀 더 크면 오너라.”
하지만 의외로 성질은 내지 않고, 나름 곱게 말한다. 분명 그리 말했는데.
“뭐래! 이 곰퉁이 새끼가!”
역시 보통 놈은 아닌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