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1)
두두둑. 두두둑.
뼈 뒤틀리는 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묘하다.
‘이제야 들리는군.’
생소하지만 익숙한 소리.
그간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뭔가 어색했다.
물론 지금 신체로는 뼈마디가 덜 여물었지만, 폭풍 성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잘 자라고 있는 상황.
그 탓에 근육으로 인해 뼈와 뼈 사이가 뒤틀어지는 건 당연했지만, 전에는 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약간 의아한 상황이었다.
‘내외근을 전부 단련시키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소리가 난다면 많이 늦었지.’
그 생각이 들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머리를 만졌다.
‘천령개도 아직 닫히지 않았어!’
천령개는 정수리를 말함이다.
보통 갓난아이는 정수리를 덮는 뼈가 없다. 그래서 닫히지 않았다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이 구멍이 있던 자리가 천령개다.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가장 빠르고 적합한 통로.
하지만 성장하면서 천령개를 덮는 뼈가 자라난다.
그래서 천령개가 열린 상태에서, 닫히더라도 덜 여물었을 때 내공을 익혀야 한다. 무공을 이른 나이에 배워야 하는 것도 이 구멍과 상당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천령개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이긴 하나 분명 열린 상태다.
‘내가 왜 이걸 지금 알아차렸지?’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일말의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미리 알았다면!’
그랬다면 극상승의 효율을 뽑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개천지보의 수련도 엄청난 효율을 내고 있긴 하다.
“하하하하하.”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를 더 탐내다니! 나도 어쩔 수 없네.’
그러지 않기로, 느긋해하고 가진 것을 소중히 하고, 작은 것에도 정성을 기울이기로 했는데 말이다.
이리 본능적인 욕망이 불쑥 튀어나온 걸 보니 유역후가 얼마나 탐욕적인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지.’
그대로 가부좌를 틀었다.
코와 입으로 호흡하되, 기운은 천령개 쪽으로 받아들였다.
“후웁!”
호흡을 몇 번 하지 않았음에도 강렬한 기운이 단전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상시 코와 입으로 전해지는 기운을 거르고 걸러 단전에 저장했다면 이건 직통으로 통하는 느낌.
그만큼 천령개가 열려 있는 건, 내력을 증강시킬 때 엄청난 효율을 뽑아낸다.
‘오히려 늦게 알아서 다행이네. 내근이 단련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 강렬한 기운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도리어 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째 하늘이 날 돕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이리 운기조식했다면 욕심에 오히려 망쳤을 터.
마치 세심한 안배처럼 깨달음을 얻고, 다음 단계로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도록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가.
그 누구도 천령개가 열린 상태에서 개천지보 삼보의 심법으로 운기조식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후우욱!”
운기조식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급하게 먹는 떡이 체하는 법.
방법을 알았으니, 외공과 균형을 잡으며 수련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호흡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렘이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이번 상단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들어오라고 해.”
“네, 공자님.”
‘빠르네.’
시험을 한두 가지 낸 것이 아니니 최소 보름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반이나 단축했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렘이 들어왔다.
“왔나!”
“네, 공자님.”
“혼자 온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물론 결과물도 가지고 왔습니다.”
렘이 종이 뭉치를 내게 건넸다.
상당한 양의 종이 뭉치에는 글자도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상단의 모든 역량과 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했습니다.”
짤막하지만 내 능력이 이 정도라는 걸 드러내는 렘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생색낼 만한 속도긴 하지. 이게 정확한 정보라면 말이지.’
그걸 확인해야 한다.
그런 내 속내를 읽은 것인지, 렘이 말했다.
“몇 가지 정보는 옛날 것들입니다. 또한 불확실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업데이트하려면 정밀 조사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합니다.”
“변명은 아니고?”
“전문적으로 정보를 취급하는 길드라고 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각 영지마다 인원을 주둔시키지 않는 한 몇 가지 내용은 시간이 걸릴 일이다. 그걸 알아내려 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고 말이다.
렘이 가져온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고, 그가 말한 것처럼 모호한 것들도 있었다.
‘나중에 몇 가지 확인하면 될 터.’
그에게 마나석이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이제 저를 신뢰하시는 겁니까?”
“신뢰는 아직 멀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 네가 이걸로 내게 무엇을 가져올지 확인한 후에 그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늦지 않지.”
“그 말씀은 제가 이걸 어찌 처분하는지 맡기시겠다는 뜻입니까?”
내 속내를 읽으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에게 마지막 테스트를 했다.
“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처음 본 사람이다.”
“…….”
“대답이 더 필요한가?”
꿀꺽.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 * *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빛.
내 속내를 읽는 건 한참 멀었지만, 최소한 내가 왜 이런 정보들을 원했는지 알아차리길 바란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쓸데없는 질문이었군요. 얼마나 걸릴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대답에 난 웃을 수 있었다.
“5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방을 나가던 렘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공자님, 제가 하나 조언할 게 하나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무슨 일이든 계약서는 쓰셔야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제가 이 마나석만 가지고 도망을 칠 수도 있는데 증거는 남겨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음이 났다.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이건 반드시…….”
“난 내 물건을 남에게 강탈당하고 허허 웃는 사람이 아니다.”
“…….”
“시험해 봐도 좋아.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만약 내 눈이 형편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말이야.”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보낸 후에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5년이라…….’
그리 대답은 했지만 시간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겠지만, 표면상으로 내 어린 나이가 문제가 된다.
‘개천지보 삼보에 오른 이상 감각의 문제가 남았는데…….’
또 이 육체가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필요가 있다.
‘남은 건 수련뿐인가? 마음대로 영지 바깥으로 나갈 명분도 필요한데.’
이것저것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좋았다.
목표가 있으니 해야 할 것이 생기고,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토벌 시기이니 영지에 젊은 사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들이 많다.
“공자님, 좋은 하루입니다.”
나를 알아본 사람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자신들도 그리 배불리 먹는 형편이 아님에도 찐 감자 한 개라도 주려는 사람들.
내가 영지를 부유하게, 강하게 만들려는 이유는 별거 아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해서다.
이 평화를, 그리고 이들과 어울릴 때의 작은 행복을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밑거름은 준비되었고 이제는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천 리 길을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면 된다.
물론 그 천 리 길은 매우 즐거운 여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이게 무슨 행패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에서 여관, 술집, 음식점을 전부 소화하여 외부인들과의 정보 교류처, 성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락 놀이터’의 주인인 사라.
날 볼 때마다 얼른 성인이 돼서 술 한잔 마시러 오면 영광일 거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다.
“돈 준대잖아! 왜 술을 안 주는 건데!”
“말했잖아! 토벌 기간에는 술 안 판다고!”
가 보니 한 덩치 하는 사내와 사라가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술집에서 술을 안 팔면 어쩌라는 거야!”
덩치의 외침에 사라의 앙칼진 대답이 쏟아졌다.
“미쳤어! 모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몬스터 토벌하러 갔는데 지금 술이나 팔고 있게. 신전에 가서 무사 귀환을 바라도 모자랄 판에!”
“젠장! 뭔 마을이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어! 며칠 늦어서 토벌대에 합류도 못 해서 짜증 나는 판에! 잔말 말고 술이나 내놔!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꺼져. 아니면 지금이라도 두 쪽 휘날리면서 달려가든가! 그럼 돌아올 때 주지 말라고 해도 먹일 테니까!”
덩치의 기세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소리치는 사라. 역시 이곳 락의 사람답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둘의 다툼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언제든 나설 태세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여자 아니면 나이 든 노인이란 게 살짝 문제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이게 정말!”
그때 덩치가 때리기라도 할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저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을 사람들이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순간 주춤했다.
앞에서 덩치와 맞서던 사라마저 경악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경비병! 경비병을 불러와!”
“어림도 없어! 시그탑 님! 시그탑 님에게 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뭐지?’
저 덩치가 정말 위협적이긴 하나 락 마을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여자, 노인들이긴 하지만 정말 싸움이라도 나면 사내 하나 정도는 쉽게 찜 쪄 먹는다.
결과야 어찌 됐든 외부인에게 기세 싸움에서 밀릴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응?’
좀 더 가까이 가서야 알았다.
‘뭐냐!’
덩치의 등에 가려져 보지 못했지만 그의 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법사였냐? 대체 어디를 봐서?’
키는 6피트(1m 80cm가량)가 훌쩍 넘고, 거기에 살집이 풍부하다.
‘몽둥이 하나만 쥐여 주면 딱 산적인데?’
실제로 허리에는 낭아봉을 차고, 옷도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선입견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상했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르니 조금 웃기다.
‘에르자일이 딱 마법사 이미지였는데.’
여하간 사람들이 주춤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마법사란 특별한 존재다.
숫자도 많지 않을뿐더러 마탑이나 자신의 거처에 머무르는 게 대부분인지라, 시골 마을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보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우리 영지에 용병들이 오고, 그중 마법사도 몇 있기에 신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마을 사람도 그리 알기에 저리 두려워하는 거겠지.’
애기가 웅얼거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사람을 죽이는 마법사가 왜 두렵지 않겠는가?
“돈을 주고 정당히 사 먹겠다는데 왜 안 주는 건데! 이리되면 오기로라도 더 마셔야겠다. 당장 술 가져와!”
덩치의 위협적인 외침.
“염병. 그럼 나도 오기로라도 안 팔아! 죽이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사라도 만만한 여자는 아니다. 몸이 주춤할 망정 목소리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끝내 피를 봐야겠다는 거지? 오냐! 오늘이 네년의 제삿날이 될 거다.”
“염병하고 있네.”
손을 뻗어 올리던 덩치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히 어떤 놈이!”
어떤 놈이긴, 나지.
덩치의 눈을 정확히 보며, 난 다시 한 번 말해 줬다.
“당장 손 안 내리면 그 손 스푼도 못 들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