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0)
토벌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2년 후쯤 되면 같이 따라가도 될 것 같은데.’
칠백이 넘는 대규모의 병력이다.
기존 토벌대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오백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놀랍게도 에렌에서 지원군이 왔다.
지원군의 규모는 이십여 명의 기사. 백여 명의 궁수와 같은 숫자의 창병들.
며칠 전 소란은 그 때문이었다.
여태 없던 일이었고, 미리 연락도 받지 못한 탓에 지원군을 마적단이나 몬스터의 습격이라 착각한 것이다.
‘지원군이 우리 정규 병력보다 더 낫다는 거지?’
우리 영지가 얼마나 가난한지 새삼 느껴졌다.
‘조금씩 달라져야지.’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기준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척박하다.
토벌대가 산맥으로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가셨구나.”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여태 그래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효과가 있는 것일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손에도 힘을 주신다.
운기조식하여 은은하게 내력을 전해 드리니 창백한 두 뺨에 이제야 홍조가 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다 드렸다.
토벌대가 떠난 지금 내가 할 일이 있었다.
영지로 나갔다.
많은 이들이 토벌하러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내가 찾은 건 ‘토벌’이라는 특수한 시기에만 찾아오는 상단.
“공자님!”
집 한 채를 빌린 상단에 가니 서른 명쯤 되는 사내들이 날 반겼다.
“그대 이름이?”
“렘 아리사라고 합니다, 공자님.”
“어째 매번 책임자가 바뀌는 것 같군.”
“이 시기에는 늘 바빠서…….”
렘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난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규모가 작으니 경험 많은 상인이 아니라, 경험 삼아 신입 상인들을 보내는 거겠지.’
그래도 때마다 꾸준히 상단을 보내는 것을 보니, 아예 이득이 없는 것도 아닐 터.
“우리 영지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니, 담당자가 매년 바뀌는 것도 이해는 한다.”
“아닙니다, 공자님. 락이 규모는 작다 하나 마정석의 품질은 최고 아닙니까?”
“역시 규모가 작아 계속 담당자가 바뀐다는 거군.”
렘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오해십니다. 총단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담당자를 지정해 달라고 말입니다.”
제법 마음에 든다.
‘내 나이가 어려 보여 대충 흘려들을 줄 알았는데, 이런 적극적인 반응이라니.’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며 말했다.
“그러면 서로 편하지 않겠나. 매번 담당자가 바뀌니 큰 거래를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큰 거래라시면?”
대번에 눈빛이 바뀐 렘이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제게 맡기실 일이 있으면 성심을 다해 처리하겠습니다.”
그에게 준비한 상자를 내밀었다.
달칵.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렘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
그에게 건넨 건 바로 내가 쓰던 마나석이었으니까.
원래 영지의 재정을 담당하는 드리프에게 처리를 부탁하려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내 발전을 위해 참은 걸 알기에 더 채근하지 않고,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님, 이건…….”
“만져 봐도 된다. 그러면 마나석의 품질 확인 따위는 해 볼 필요도 없을 터이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저도 룬을 다룰 수 있습니다. 재능이 없어 세 개의 룬은 포기하고 진로를 바꿨지만.”
렘은 확신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최상급 마나석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럼 말이 더 쉽겠군. 그거 처분하면 무엇을 가지고 올 수 있지?”
“후우우!”
렘은 흥분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하긴 감출 수가 없으리라.
내가 사용하여 크기가 조금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공자님…….”
“말하게.”
“먼저 이 마나석의 출처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의심이 드나? 이 작은 영지에 어찌 그런 물건이 있는지?”
내 반문에 렘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이런 물건은 절대 흔치 않으니까요. 물론 이곳 락에서도 마나석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늘 산맥을 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매지스터 헤르메스가 우리 영지에 선물로 보낸 물건이니까.”
“헤르메스 님 말입니까!”
“그래.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봐도 좋아. 대신 확인만 하고 누구에게도 이야기는 하지 마. 그만한 물건이면 소란이 일어나기 충분하지 않겠어?”
“…….”
“다시 묻지. 이걸 자네에게 맡기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지?”
렘의 표정이 굳는다. 아마도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 것이다.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에 따라 난 그에게 이걸 맡길지 말지, 또 그와 어디까지 함께할지 결정할 것이다.
“공자님.”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절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겨 주실 수 있습니까?”
“맡긴다면?”
“저희 상단은 작습니다. 솔직히 말해 총단에서 이곳을 배정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걸 왜 이야기하지?”
렘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셔야 하니까요. 제값을 받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중간에 의심하시면 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공자님이 선택하실 문제이니까요. 공자께서 100% 절 신뢰하지 않으시면 전 물건을 맡지 않을 겁니다.”
맡지 않는다고? 진심인가?
정직한 건 좋지만, 순진한 건 안 된다. 특히 상인이라면 말이다.
“분명 그 물건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상단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익도 많이 생기겠지요. 그 전에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렘은 계속 말을 이었다.
“말뿐인 신뢰! 전 믿지 않습니다. 공자님도 절 쉽게 믿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걸 만한 것이 지금의 제게는 없습니다.”
“…….”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어찌하면 제가 공자님의 신뢰를 살 수 있습니까?”
순진한 게 아니라 영리한 사람이었다. 내게 공을 떠넘김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책을 선택하려 한다.
‘그래, 이 정도는 영리해야 제값을 받을 테고, 앞으로 파트너로 삼을 수도 있지.’
렘에게 몇 가지 조건들을 말했다.
“이걸 확실하게 처리하면 믿고 맡기지. 할 수 있겠나?”
렘이 내게 다시 상자를 내밀었다.
‘너무 어려운 시험이었나?’
그리 생각할 때 렘이 굳은 결의가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는데 못 한다고 하면 어리석은 거지요. 결과를 가지고 이 물건을 다시 받으러 오겠습니다.”
흡족한 답변.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 *
로라스를 만난 렘은 곧바로 상인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모두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합니다. 제대로만 하면 우리 상단은 엄청난 기회를 잡게 될 테니까요.”
렘의 말에 상인들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들 중에는 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렘의 상재를 인정하고 그 밑으로 모인 이들.
그의 입에서 엄청난 기회란 말이 나온 이상, 분명 엄청난 기회가 생길 터.
게다가 렘이 요구한 것은 힘들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바쁘게 움직입시다. 토벌단이 돌아올 때까지는 모두 처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이득까지 다 챙길 수 있을 테니까요.”
상인들이 급히 밖으로 나갔고, 방에 홀로 남은 렘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너무 흥분한 건가?’
사실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본단인 황금상단의 큰 상인들도 이런 거래를 제안받으면 흥분할 것이다.
그만큼 마나석의 가치는 컸다. 그리고 헤르메스라는 이름의 가치도 마나석만큼 컸다.
왜 헤르메스가 이 변두리 락의 영주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는가? 그리고 그 선물이 왜 아이에 불과한 로라스에게 전해졌는가?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단 그걸 손에 넣어야 한다.
‘그냥 바로 제안을 수락했어야 하나.’
렘은 순간 그런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코흘리개 아이가 제안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대하던 그 언행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위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분명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어도…… 어쩌면 이번 선택으로 내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
렘은 펜을 들고 종이에 뭔가 부지런히 적기 시작했다.
수많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종이를 채워 나갔다.
그 내용은 로라스의 조건, 자신이 확인해야 할 것, 그리고 결과를 어찌 이야기할지 구성안 등,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건 렘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막연하게 머릿속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눈으로 보면,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이 명확해진다.
사각사각.
렘은 쉴 새 없이 적어 댔고, 그것을 완성한 후 눈으로 보며 다시 정리했다.
‘이건…….’
그리 생각에 생각을 더하던 그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보였다. 정리하고 나니 로라스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영지를 키울 생각인가?’
로라스가 내민 조건은 대부분 정보였고, 그 정보를 총합하면 그런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쉽지 않을 텐데.’
영지를 키운다.
이건 모든 영주들이 목표로 하나 실제로 그것을 이룬 영주는 많지 않다. 특히 하늘 산맥 근처의 영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비옥한 토지가 있으면 뭐하는가?
언제 마물들의 습격이 이어질지 모르는 땅이다.
그나마 락이 에듀 남작과 그 수하 기사들의 활약에 비교적 안정되었다는 평판을 듣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로는 한계가 있다.
‘철없이 생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로라스도 그 점을 잘 아는 듯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듯했다.
‘하긴 막대한 자금이 있으면 시도를 해 볼 수 있긴 하다.’
그가 마나석을 처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
‘단순하게 용병을 모아 치안을 강화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하지만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만 구축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분명 뭔가 길이 보일 듯했다.
‘길이 보인다고 해서, 그 길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그 아이……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지?’
렘은 멍하니 자신이 쓴 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느껴졌다.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분명 느껴졌다.
‘대체 왜?’
렘이 서른 초반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상단을 꾸릴 수 있었던 건 상재도 있지만, 돈에 관한 동물적 감각이 있어서다.
렘은 지금 심한 돈 냄새를 맡고 있었다.
‘급할 거 없다. 일단은 내가 할 건 신뢰를 사고 이득을 얻는 것. 그리고 무엇을 할지 지켜보면서 투자를 결정하는 것.’
렘은 그리 정리했다. 아니, 정리하려 했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투자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때 해야만 더 빛을 발휘하는 법.
‘며칠을 새우더라도 해야지.’
본능적인 감각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라 했고, 격렬하게 생각하라 명령하고 있었다.
렘은 이 본능의 근거를 찾기 위해 기꺼이 날을 새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