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
열기가 내려가고 올라오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했던 포스가 자리를 잡는 순간.
“울긴 왜 웁니까? 이제 시작인데.”
토니는 눈이 뜨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손에 잡힌 작은 손을 꽉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경험 잊지 마세요. 노력하지 않으면 한밤의 꿈처럼 사라질 것이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꿈 한번 꾸기를 얼마나 바랐는데.”
“이 두 손은 놓고요. 아직 봐야 할 다른 사람이 많습니다.”
토니는 놓기 싫었지만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신의 손을 잡았고, 그걸 언제까지 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합니다, 공자님.”
토니는 그대로 엎드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보였다.
“저도 고맙습니다. 믿고 따라와 주셔서.”
착각이었을까?
토니는 로라스의 웃는 얼굴 뒤로 커다란 빛을 보았다.
확실히 자신의 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 * *
브렌드는 두 눈을 비벼 봐야 하지 않나 고민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평상시 훈련장의 광경이라고 볼 수 없었다.
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인가?
미친 듯이 웃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주군의 아들이 훈련을 주도했다는 것뿐.
‘대체 뭘 하신 겁니까.’
무작정 달리는 것만 시키더니, 늦게까지 훈련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했다.
예정에 없는 일이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의 말에 따랐다.
사실 로라스에 대해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경애할 수밖에 없는 주군의 아들이며, 동료지만 무인으로서 존경하는 시그탑이 로라스에 대한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 있었다.
브렌드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 이유 중 몇 가지를 경험했기에 오늘 로라스의 엉뚱한 주문에도 군말 없이 모든 것을 이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훈련의 끝.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 수고했다. 힘들겠지만 내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스럽게 훈련 종료를 알리는 로라스를 보며, 브렌드는 당장 달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영지민들조차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로라스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내일 다시 하자. 모두 돌아가도록!”
그제야 엉거주춤 발을 떼는 사람들.
브렌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로라스가 지금이라도 다시 훈련을 하자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 분위기라는 걸.
하나 로라스는 그리 말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훈련장을 떠났다.
마침내 훈련장에는 자신과 로라스만이 남게 되었다.
“공자님.”
그가 참아 왔던 물음을 던지려는 순간 로라스가 먼저 말했다.
“브렌드 경, 그동안 정말 훈련을 잘 시키셨더군요.”
“네?”
“며칠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맛은 보여 줬어요.”
브렌드는 혼란스러웠다.
‘맛?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갑자기 맛 타령을 하는 로라스를 보며 브렌드가 입을 열지 못할 때.
“브렌드 경은 경지가 높아서 며칠 걸리겠군요. 훌륭한 무인이십니다.”
“공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가 우둔해서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궁금한 게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당분간은 그저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브렌드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의문을 더 억눌러야 함을 느꼈다.
로라스가 말했던 그 맛이라는 것. 그것을 알려면 말이다.
* * *
하늘 산맥.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어 그 크기를 모르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산맥을 경외시하지만, 에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하늘 산맥을 낀 영지 중 하나인 락의 영주.
이런 영지가 대부분 그렇듯 오베른 제국에서는 귀족들의 귀양지로 시작되었고, 수많은 도망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도 분명 자신이 책임하에 보살펴야 하는 곳이다.
에듀는 그렇게 노력했고, 실제로 도시급 영지와 비교해도 락은 치안이 안정된 편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에듀의 표정은 심각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에듀의 물음에 시그탑도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안쪽에 있어야 할 마물들이 외곽으로 밀려난 건 확실히 이상합니다.”
“설마 나르크족이 이동한 건 아니겠지?”
나르크.
마물은 아니나 그렇다고 인간이라고도 보기 힘든 이종족을 칭하는 이름.
엘프니, 난쟁이족이니 이종족은 많으나, 나르크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인간보다 두 배는 더 큰 체구도 그러하거니와, 체구만큼 힘도 타고났다. 최강의 전투 민족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종족이다.
이들은 대부분 산속에서 마물들을 사냥하며 산다.
소통도 되고, 인간에 대해 적대적이지도 않으나, 문제는 그들이 배타적이라는 것. 특히 영역에 관해서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유목민족처럼 산을 옮겨 다니는데 자신의 영역을 선포하면 그 누구의 침범도 용납하지 않는다.
에듀가 나르크족을 언급하자 시그탑은 심각히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영역이 어디인지만 정확히 알면 마물 토벌 범위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샤이한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샤이한은 산기슭에 사는 오크족의 전사대장이다.
이종족이나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영지와는 꽤 긴밀한 사이였다.
시그탑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럴 확률이 높겠지만 그는 좀…….”
“왜? 설마 아직도인가?”
“탐욕스러우니까요. 그리 믿지 않으면서 왜 우리에게 부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네. 우리를 믿지 않으면 애초에 부탁도 하지 않았겠지.”
에듀가 산맥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곧 토벌의 시기라 다행이야. 이번에는 좀 규모를 늘려 보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려가지. 확인할 건 다 확인한 것 같으니.”
토벌의 시기.
선발대는 그렇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사실이야?”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나?”
여기저기서 사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믿기지가 않아서 그러지. 그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되는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될 일이고.”
훈련장에는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병사를 제외하고 영지민들의 훈련은 자율적이나, 평상시 일이 없으면 꼭 참석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 터전은 스스로 단련하지 않으면 버티기 쉽지 않은 곳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으나 오늘은 달랐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백여 명에 육박했다. 해야 할 일까지 제치고 미뤄 두면서 참가한 것이다.
“토니 아저씨 봤지? 그분이 어제 우시더라.”
“공자님께 큰절까지 올리시던걸.”
“어디 토니 아저씨뿐이냐?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던데.”
그 이유는 바로 어제 훈련을 받았던 자들의 말 때문이다.
포스 서클레이션.
자신들 입장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그 힘을 만들고 키우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설마…….’
‘영주님이 그랬다면 모를까, 공자님은 너무 어리지 않나?’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무인의 삶을 살던 영지의 사내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바람에 영지의 사내들은 죄다 훈련장에 모였다.
“나오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일제히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고, 웅성거리는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엇!”
모인 사람들을 보며 브렌드는 숨을 토해 냈고, 로라스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배울 의지는 충분하다는 거네.’
만족스러웠다.
배우려는 사람이 의지를 가져야 가르치는 사람도 흥이 나는 법 아니겠는가.
“정렬!”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모인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달린다.”
별달리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말해 이들 대부분 무공을 배우기에는 많이 늦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는 더 노력을 해야 할 터.
탈진 직전까지 달리기를 시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체가 느끼는 모든 불필요한 감각을 무력화시키면, 기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막연한 목표보다는 실체가 눈에 보이면 더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법.’
무리해서 개개인이 내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몸이야 좀 피곤하지만 이것도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고.’
그 모든 이들의 기로氣路(force's road)를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삼보에 올라 기력이 달리는 일은 없지만 내력을 소진하고 바로 보충하고, 또 소진하는 걸 반복하는 건 중노동에 가깝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로, 그리고 혈도 등이 단단해지고 있었다.
“오와 열을 유지한다. 선두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달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점점 지쳐 가는 사람이 늘어 갔다.
‘숫자가 느니 만만치 않군.’
숫자가 많아서 어제보다 더 집중해야 했다.
이들의 체력을 완전히 소진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은 부족한 듯 휴식을 주고, 달리고, 휴식을 주고 하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체력의 한계는 근육으로 확인하면 되는데, 사람의 숫자가 많아서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악착같이 달라붙어!”
한 명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기존 영지민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계획이 수월해진다.
“달려!”
로라스는 그들을 몰아붙였다.
* * *
여름이 끝나고 있었다. 그건 곧 가을이 온다는 것이고, 추수의 시기가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듀 남작의 영지에도 추수의 시기가 다가왔다.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몬스터로 인해 활용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자급자족을 위해 어느 정도의 농사는 짓는다.
추수를 위해서는 그 전에 몬스터 토벌이 필수.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대규모 정기 토벌전이 준비 되었고, 마을에는 용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듀 영지령의 토벌전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인기도 많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신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것과 달리 에듀 남작은 자신들을 귀중한 전력으로 대우해 줬다. 그리고 전리품 역시 공정하게 분배해 줬다.
목숨을 건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의뢰.
그게 바로 에듀 남작령의 토벌전이기에 많은 용병들이 몰려왔고, 마을은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가능하다면 이번에 제가 영지에 남아 치안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토벌전 준비로 한창일 때 시그탑이 찾아와 하는 말에 에듀 남작은 살짝 놀랐다.
시그탑은 토벌전의 핵심 인력 중 하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에듀 남작은 바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토벌전에서 반드시 선봉에 섰던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근래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완벽하게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이 상태로는 토벌전에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그탑의 대답에 에듀 남작은 이번엔 깜짝 놀랐다. 그의 경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자네 설마!”
에듀 남작의 말에 시그탑은 옅은 미소로 답했다.
“주군께서 생각하는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이 시기를 잘 수습할 수만 있으면 꿈은 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그런 이유라면 언제든지 환영하지!”
에듀 남작이 크게 웃으며 기뻐하자, 시그탑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제야 주군의 바로 뒤에 설 수 있을 것 같아 기쁠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도 그 경지는 아직 한참 멀었어. 어쩌면 이번에 경이 나를 능가하겠군.”
시그탑이 비록 자신보다는 못해도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 그런 그가 토벌전에 참가하지 못할 정도의 깨달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잘 넘기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마스터.
무인들을 수식하는 수많은 단어 중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칭호다.
에듀 남작은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은 없겠는가?”
“주군께서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돌아오면 많은 가르침을 청해야겠군.”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주군.”
시그탑의 겸손에 에듀는 은근 기대 어린 눈빛을 하며 말했다.
“로라스는? 근래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고 들었네. 내 모른 척하고는 있었지만, 자네가 곧 그 경지를 본다고 하니 아비 된 입장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군.”
“공자는…….”
시그탑은 말을 하다 말고 미소 지었고, 그 모습에 에듀 남작은 더 궁금해하며 물었다.
“뭔가, 그 미소는?”
“아시지 않습니까? 공자님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번 토벌전에 병사들이나 영지민들의 능력을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내 아들이지만 가끔 믿을 수가 없는 일을 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께서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 주시는 것만으로 그 재능을 다 개화할 겁니다.”
뿌우우우웅!
그때 바깥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에듀와 시그탑은 서로를 잠시 보다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이 뿔나팔 소리는 규모가 있는 몬스터, 또는 무장 병력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