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
“하나!”
“하앗!”
“둘!”
“하앗!”
구령에 맞춰 쉰 명의 사내들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창을 내질렀다.
훈련하는 사내들의 연령은 다양했다.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청년부터, 수염이 덥수룩하고, 어느새 얼굴에 주름이 잡혀 있는 중장년인들까지.
그들 중에는 병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을의 사내들이었다.
워낙 영지의 인구가 적다 보니 병사들 훈련에 시간이 있는 사내들도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물끄러미 그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았다.
병사들도 그렇지만 사내들 모두 일반 성인 남성의 기준은 넘어섰다.
하긴 저러니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을 터.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영지 사람들끼리 단합이 잘되고, 나름 저마다의 성취감을 느끼는 좋은 영지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이방인들로부터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평가를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타파하려면 일단 규모가 커져야 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져야 한다.
사람이 늘면 마물들의 토벌도 용이해지고, 치안이 안정화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사람들이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
‘없어도 너무 없어서 그런 거지.’
기반만 마련되어도 아버지의 지도력이면 부흥은 시간문제일 터.
‘인적 자원도 중요하지.’
그간 미뤄 왔던 건 내 한 몸 제대로 추스를 수 없기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개천지보 삼보에 이른 지금, 이제 슬슬 시작할 때였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훈련이 끝나자 그제야 내가 시야에 들어온 듯,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좋은 영주의 철든 아들.
병사들이나 영지의 사내들이 날 보는 눈빛은 딱 그렇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브렌드 경.”
“공자.”
병사들과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사는 브렌드.
“새로운 훈련법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셨군요. 하지만 포스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제가 좀 보완한 게 있어서요. 브렌드 경만 허락하면 제가 잠시 이들의 훈련을 주관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훈련 책임자는 브렌드.
그런 그를 두고 내가 무턱대고 나설 수는 없다. 당연히 그에게 먼저 동의를 구해야 한다.
“공자께서요?”
“네. 경께 설명을 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옆에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켜보는 것보다는 저도 훈련에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경도요?”
내가 훈련을 주관하겠다는 건 승낙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본인도 훈련에 참여하겠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만큼 날 존중하고 있다는 뜻인가?’
시그탑에게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지 들었다 하더라도, 그의 입장에서는 어린애인 내게 뭔가를 배우려고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브렌드를 너무 몰랐군. 나쁘지 않아.’
만족스럽게 그것을 허락했다.
“경이 원하면 그리하세요.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공자.”
브렌드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자께서 우리의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도록.”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공자님도 이제 훈련을 받으시려는 거군요.”
“너무 이르신 건 아니신지.”
사람들은 미소 지으며 이런저런 말과 함께 나를 반겼다. 물론 그것은 존경하는 영주의 아들이 참여하니, 재미있다는 반응이겠지만.
‘어찌 굴린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이들은 내 계획의 초석. 영지 발전의 바탕이 되어야 할 자들이다.
‘그러려면 강해져야지. 아주 많이!’
나는 그들 앞에 나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 소개는 생략하겠다. 나는 훈련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대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
“당분간 훈련은 혹독할 것이다. 정말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약속할 수 있다. 제대로만 따라 주면 그대들이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영문 모를 표정에 호기심 어린 표정들. 몇몇은 불신과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로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 이건 내게 너무나도 쉬운 일 아닌가.
‘경험시켜 주고 보여 주면 따라올 것이다.’
더 큰 꿈. 그게 뭔지 그들은 몇 달 내로 알게 될 것이다.
“모두 전투 무장을 하고 집합한다.”
갑자기 전투 무장을 하란 말에 모두가 망설인다.
“안 들리나! 모두 무장을 하고 집합한다!”
브렌드가 그리 외치고는 먼저 움직이자,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뒤를 따라갔다.
내 명령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은 내 권위가 서지 않았으니까.’
이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저들 입장이라도 쉽게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세우면 되지. 권위.’
물론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뀔 것이다.
수십만 천황성의 무인들을 손가락 하나로 움직였던 경험과 기억이 있는 나다.
고작 수십의 사내들을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다.
‘이것도 그들의 복이지. 내게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건.’
역시 삼보에 이르니 좋다. 할 게 너무 많아졌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처리할 생각이다.
* * *
“헉헉헉!”
‘이거 뭐 하기도 전에 골병드는 거 아냐?’
영지민들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기존의 훈련과는 전혀 다른 훈련이었다. 아니, 단순해도 너무 단순했다.
지금 로라스가 시킨 건 전투 무장을 한 채로 달리고 있는 것뿐이다.
쉽게 말해서 전투 무장이지, 그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가죽이 철에 비해 가볍다지만, 말 그대로 가벼울 뿐이지 기본적인 무게는 상당하다. 거기에 무기는 물론이고 석궁까지 착용했다.
그런 전투 무장을 한 채로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보통 이쯤 달리면 쉬어야 하는데, 쉬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영지민들은 물론이고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영지의 병사들도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는 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속도다.
“너, 너, 너. 대열에서 빠져 쉰다.”
그러다 로라스가 몇을 지적하며 달리는 걸 멈추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왜 멈추나! 안 달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어린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상하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 탓에 불만은 잔뜩이나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낸다. 공자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것이냐!”
무엇보다 기사인 브렌드가 군소리 하나 없었다. 오히려 뭐라 입을 열려 하면 저리 한마디씩 해서 입을 다물게 했다.
“언제까지 쉴 건가? 대열에 합류하라!”
누구도 로라스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쉬고 달리게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계속 누군가를 쉬게 하고, 달리게 하길 멈추지 않았다.
“모두 그만!”
해가 떨어지고 마침내 로라스의 입에서 훈련 종료가 선언되었을 때 제대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대자로 뻗어 누웠으며, 브렌드마저 다리가 떨리는지, 자신의 창을 지팡이 삼을 정도였다.
“브렌드 경.”
그런 브렌드를 부르는 로라스.
그렇게 브렌드와 로라스가 공터 한편으로 가고 나서야, 병사들과 영지민들은 불평을 털어 낼 수 있었다.
“지금 뭐 한 거냐?”
“공자님이 뭔가 기사 소설이라도 읽으신 거 아냐?”
“누가 이야기해야 해. 무작정 이리 달리게 하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해.”
불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한 사내가 말했다.
“말을 해도 내일 하고, 일단 집에서 쓰러져야지. 여기서 쓰러졌다가는 집에 못 간다.”
사내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로라스와 브렌드가 돌아왔다.
슬슬 정리하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보며 로라스가 물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정리하고 있습니다. 집에 가야 하니까요.”
누군가의 대답에 로라스가 말했다.
“집? 훈련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순간 훈련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훈련은 이제 시작이다. 모두 그대로 자리에 앉도록.”
로라스가 다시 하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브렌드를 향했다. 하나같이 뭐라고 말이라도 해 달라는 표정들이었다.
“오늘 식사는 여기서 할 것이다. 준비하고 있으니 참도록.”
하지만 브렌드는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거기에 자신도 대열 앞에 털썩 앉아 버렸다.
“뭣들 하는가? 모두 자리 잡고 앉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대로 주저앉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향해 로라스가 말했다.
“크게 숨을 쉰다.”
두 번째 훈련이 시작되었다.
* * *
토니는 마흔다섯의 헌터다.
마을 일이라면 힘든 일, 궂은일 모두 앞장서서 나서서 하다 보니 제법 따르는 이가 많았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가 없네.’
나름 리더 격이나 그 사실에 대해 토니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끈기는 아직 뒤처질 생각이 없으나, 하루가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훈련에 꾸준히 참여하며 체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오늘 훈련은 정말 무리였다.
‘대형 마물에게 쫓길 때나 이리 달려 봤지.’
숲에서는 괜찮다. 움직이는 것도 패턴이 있고, 체력 분배하는 법도 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방식은 도저히 맞지를 않았던 것이다.
영주의 어린 아들은 그런 것을 모르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했지만, 계속 이런 훈련이라면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크게 숨을 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로라스가 다가왔다.
“공자님!”
“앉아 계세요.”
토니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이 어린 공자님이 또 무슨 허무맹랑한 훈련을 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힘들지요?”
뜻밖에 그는 따뜻한 말을 건네 왔다.
“솔직히 힘에 부칩니다, 공자님.”
“압니다. 그대는 오늘 다섯 번이나 쉬었습니다.”
“그건!”
“일단 들으세요.”
토니가 입을 다물었고 로라스는 말했다.
“대단합니다. 나이가 적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다섯 번밖에 쉬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늦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왜요? 그냥 대충 쉬게 하고, 달리게 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기사 흉내라도 내는 줄 알았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면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게 무슨…….”
“계속 호흡을 고르세요. 시작합니다.”
토니는 깜짝 놀랐다.
로라스의 크지 않은 손이 자신의 안쪽으로 훅 들어왔기 때문이다.
“호흡을 차분히. 들이마시고 내쉬고.”
이상한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 둔 채로 차분히 입을 여는 로라스의 말에 따르게 된다.
“이제 이걸 내립니다. 집중하고 느끼기만 하세요.”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몸 안에 열기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 진동이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언컨대 이건 무리한 훈련으로 요동치는 심장의 진동이 아니다. 이건…….
‘설마…….’
토니는 순간 뭔가 떠올렸지만 금세 지웠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래서 갈망했다.
포스.
타고난 자들에게 허락된 그 기운.
노력했다.
정말 미칠 정도로 가지고 싶어서, 기사의 종자도 해 보고, 이상한 집에서 수련도 했다.
그럼에도 가질 수 없었던 게 포스다.
그나마 이 영지에 정착하여 그게 어떤 기운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여기 기사들은 기본 수련법을 아낌없이 풀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걸로 만족하고 포기했다. 분명 그랬는데.
두근두근.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훈련이 힘들어서 박동하는 게 아닌 다른 뜻의 박동.
조금만 혀를 내밀면 맛볼 수 있을 듯한, 그런 아슬아슬한 긴장감.
“서두르지 마세요. 집중만 하세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었으나.
“제가 바른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믿어야 할 신을 눈앞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