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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7화 (2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

깨달음을 갈고닦으며, 규칙적인 삶을 유지했다.

열심히 산다는 것.

매일 그 충족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정말 몸살 날 정도로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영지민들의 인사에 계속 고개를 숙였다.

귀찮기도 하지만 저들의 호의 어린 표정을 보면 답례는 빼먹을 수가 없다.

특히 저들의 호의는 아버지가 쌓아 온 신뢰와 마찬가지다. 그 신뢰에 내가 먹칠할 수는 없다.

그 정도만 감수하면 이 산책은 너무나도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떠한 의미 없이 앞에 있는 길을 걷는다.

오전의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

근래는 분명 그랬다.

“주군!”

이 꼬맹이들의 방해만 없으면 말이다.

“말했지. 난 아직 귀족의 아들이지 귀족이 아니고, 넌 기사도 아니라니까. 주군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그래도 한번 충성을 맹세했으니 주군이지요.”

눈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꼬맹이.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을 어쩐다?’

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내가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이 꼬맹이에게 시달리게 된 건 이레 전이었다.

―검은 그렇게 휘두르면 안 돼. 수백 번을 휘두르더라도 내가 목표한 지점에 정확히 닿아야지.

영지에 몇 없는 남자애들끼리 서로 칼싸움을 하는 건, 여러 번 보아 왔다.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무를 앞에다 두고 목검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애들 칼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나, 나름 진지한 표정에 그리 한마디 해 줬을 뿐이다.

검을 잡는 법과 휘두를 때 그냥 팔이 아닌 상체와 하체를 적당히 움직이는 법도 알려 주긴 했다.

그건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가볍게 던진, 그냥 알려 준 것에 불과했다.

그때부터였다.

주군 주군 하며 따라오더니, 이윽고 자기들끼리 영광과 정의의 빛 기사단이라는 괴이한 단체를 결성. 이렇게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귀찮아 정색을 하며 혼을 내자 다른 아이들은 모두 포기했는데, 이놈은 아니다.

“정말 혼나야겠구나. 경비 아저씨한테 잡아 가라고 할까?”

“그래도 주군을 향한 제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릴 때 한번 뭔가에 꽂히면 정신 못 차리긴 하지만 이건 중증인데.’

이 꼬맹이를 어찌할까 하다가, 꾀가 하나 생각났다.

‘애들은 애들 방법으로 상대해 줘야지!’

난 녀석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 너의 청에 내 조건을 하나 건다. 난 아무나 내 신하로 받아들이지 않아. 그러니 네가 대장이 된 후에 날 찾아와라. 그럼 받아들여 주마.”

“정말이십니까?”

“네 주군이 될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닭살이 돋는다. 하지만 기사 이야기에 심취한 아이에게 이보다 더 잘 통하는 게 있을까?

“알겠습니다. 주군의 명예를 위해 제가 대장이 되어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믿고 기다리마!”

결의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러가는 녀석.

“이제 됐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 내가 꼬맹이 수발을 들어 줄 상황이 아니다.

여기서도 열여덟은 돼야 성인 취급해 주니, 고작 열 살짜리 꼬맹이가 미성년들의 대장이 될 리 만무할 터.

‘저러다 말겠지.’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저 녀석도 며칠, 아니 고집을 보아 몇 달은 갈지 모르지만 여하간 제풀에 지쳐 떨어질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자경단이 되면 보자꾸나.’

방해물이 떨어져 나갔으니 다시 여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2년 간 충실히 살았다.

여러 가지 기연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첫 번째 목표인 개천지보 삼보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더 빠르게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포스 서클레이션도 같이 수련해야 했기에, 결과가 조금 늦게 나왔다.

후회는 없다.

내 목표는 나만 강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또 가문의 포스 서클레이션이 꼭 불필요한 것도 아니고.’

여하간 그간 세웠던 계획을 일부 실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가장 먼저 찾은 건 드리프였다.

기사이면서도 영지의 재정을 담당하는 다재다능한 무인.

“공자님, 오셨습니까!”

“바쁘십니까?”

“안 바쁩니다. 그리고 공자님이 오시면 바빠도 시간을 내야죠.”

그는 언제나 날 반가워하고 공손하게 대한다. 영주의 아들이라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새로 만드신 수련법에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저희끼리 연습할 때는 잘되었는데. 브렌드가 병사들을 지도하면서 애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건 드리프가 날 한 명의 무인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그탑에게 속근 수련법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가지 수련법을 알려 주고, 드리프와 브렌드는 그를 통해 또 전수받는다.

그들은 처음에 시그탑이 가르쳐 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그탑은 남의 공을 채 가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게 전수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 후부터 드리프는 물론이고 브렌드 역시 날 무인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브렌드 말로는 병사들이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건 아마도 병사들에게는 포스가 부족해서일 겁니다. 새로운 수련법은 포스를 기반으로 하는데.”

“그럼 어떡하지요? 답이 없지 않습니까?”

곤란한 표정의 드리프.

보통 포스 서클레이션은 기사마다 다르고, 극비리에 친인들에게만 전수된다.

그래도 이 영지, 정확히는 아버지에게 뼈를 묻을 생각을 하는 그들이기에 기본적인 수련법은 병사들은 물론이고 영지민들로 이뤄진 자경단에도 가르치지만, 자신만의 비기를 내놓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것도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까요.”

“혹시 가문의…….”

“아닙니다. 여하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완할 테니까. 그보다.”

드리프에게 마나석을 드밀었다.

“공자님, 그건 왜…….”

“이걸 팔아 주십시오.”

“공자님!”

경악한 그를 보며 말했다.

“제게 더 이상은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치 않다니요……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보물입니다.”

“그럼 더 잘됐네요. 비쌀 테니까요.”

“안 됩니다, 이건.”

“충분히 이용했습니다.”

정말 잘 사용했다. 어른 주먹만 했던 녀석이 이제는 아이의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로 작아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드리프는 다시 한 번 거부했다.

“마나석에 충분하다는 말은 존재치 않습니다. 포스와 마나는 무한대이니까요. 공자님이 이제 영지 재정까지 생각해 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지만 이건 아닙니다.”

사실 마나석을 계속 이용하면 도움은 된다. 하지만 개천지보 삼보에 이른 이상 예전처럼 효용성을 가지지는 못한다. 그럴 바에는 돈이 최고다.

“드리프 경, 제가 언제 거짓을 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갖다 파세요. 그걸로 전마를 몇 필 구하고, 기사들의 무구부터 새로 갖추세요.”

“…….”

“곧 토벌전 시즌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드리프의 시선이 마침내 마나석에 쏠렸다.

그런 그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석이다. 이 세계에서 그야말로 영약 같은 물건 아닌가. 탐욕의 눈빛을 보일 만도 했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안 되겠습니다. 공자님의 생각이 정 그러시면 주군께 말씀하십시오. 주군께서 팔라 하시면 그러겠지만…… 지금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거부하는 그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이걸 팔아 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자식 입장에서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 영지의 기사들은 다 좋은데 모두 고지식하단 말이야.’

불만은 있으나 달리 보면 확실히 이만한 기사들도 또 없다. 아버지가 수하가 아닌 친구처럼, 어쩔 땐 귀한 손님처럼 대우해 줄 가치가 있는 자들이다.

“어쩔 수 없군요. 제가 계속 사용할 수밖에.”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음은 잘 알지만, 공자님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도 영지의 엄청난 발전이 될 테니까요.”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 * *

쪼르르르.

파라일 공작은 젊었을 적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찻물을 찻잔이 아닌 큰 잔에 가득 따랐다.

“마실 텐가?”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아란데일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옛날에는 이런 걸 왜 마시나 했지. 이런 걸 먹을 바에는 차갑게 만든 술 한 잔이 더 매력적이었거든.”

“저도 그랬습니다.”

아란데일의 대답에 공작은 피식하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되지만 자네는 그래선 안 되지. 아직 한창인데.”

공작이 웃으면서 던진 말에 아란데일은 왠지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주군이 이런 식의 농을 하시는 분이었던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하여 철혈이라고 불리는 주군이다.

“지루해. 옛날에는 그럴 틈이 없었는데.”

공작이 다시 던진 말에도 아란데일은 한참을 침묵했다.

지루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작은 지루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지루해서는 안 됐다.

하루에도 그의 승인을 받아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북부는 요새 한창 시끄럽더군요.”

마침내 아란데일이 입을 열었을 때는, 공작은 두 잔의 차를 마신 후였다.

새로운 대화 주제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안 시끄러운 적이 있던가? 곧 토벌의 시기지?”

“네, 그렇습니다. 본가에서도 따로 토벌대를 꾸리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규모를 좀 늘리려 합니다.”

“나쁘지 않아. 요새 힘쓸 일이 없으니까. 알아서 잘해 보게.”

“이번에는 락 지역으로도 토벌대를 보낼 생각입니다. 몇 번 지원 요청은 있었으나 여력이 되지 않아 보내지 못했으나, 올해는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란데일은 그리 말하며 조심스레 공작을 살폈다.

“나쁘지 않겠지.”

별다른 감정 없이 대답하는 공작.

아란데일은 그제야 자신이 모시는 분의 속내를 알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로라스는 이대로 둘 생각이십니까? 교육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본인이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굳이.”

“하지만 재능 있는 아이입니다.”

“재능 넘치는 애들이 어디 한둘인가.”

공작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어느새 시선은 아란데일을 향해 있었다.

“보통 재능입니까? 재능 있는 아이들은 많아도 사물을 보고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을 가진 건 드뭅니다. 그중 로라스의 재능은 유례없이 뛰어납니다.”

“그뿐인가? 마나 감응력 때문에 헤르메스가 탐내고, 에르페유 또한 무인의 자질에 탐을 내서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 여러 가지 재능이 뛰어난 아이긴 해.”

아닌 척하지만 흐뭇해하는 표정을 짓는 공작을 보며 아란데일은 확신했다.

자신의 주군도 그 아이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자신의 임무는,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하는 것.

사실 그도 욕심이 났다.

포스도, 마법도 다 중요하지만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은 절대 흔치 않은 일. 그런 아이가 병법까지 배우면 지휘관으로서 최상이 되는 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왜 주군이 계속 지켜만 보고 있느냐는 것인데.’

가문의 시험이 끝난 지 2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주군은 집사를 락에 한 번 보낸 것을 빼고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분인데.’

아란데일은 그리 생각하며 말했다.

“허락하시면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교육은 빠를수록 좋을 테니까요.”

“내버려 두게.”

공작은 흐뭇해하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억지로 데려오면 반발만 살 뿐이지.”

“…….”

“돌아가 봐. 할 일도 많잖나.”

아란데일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올리고는 방을 나갔다.

공작은 찻잔을 잡았다. 미지근해져 있는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지. 그 재능이라면 알아서 내게 올 거야. 젊었을 때는 그걸 몰라서 서둘렀지만 이제는 아니야.’

공작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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