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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5화 (2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

‘이것 봐라?’

아직 쓰기에는 무리지만, 읽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써 둔 룬어를 읽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게 마나라는 거지?’

갖가지 기운이 주변에서 떠도는 것이 느껴졌다.

몰랐을 땐 꺼림칙한 기분이었나, 알고 나니 흥미가 잔뜩 일어났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열기에, 차가운 흐름이 있었으며, 재미있게 뇌전의 기운도 있었다.

‘마나란 것도 내력의 특질과 비슷한 면이 있군.’

확실히 무림의 내공심법과 비슷했다.

널린 알려진 건 열화문 열기, 북해빙궁의 빙기 등이었으나 사실 무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심법은 각기 특성이 있다.

‘으음, 개천지보에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이 천(天)의 기운인가?’

사실 개천지보 내력의 특질은 조화로워 어디에도 잘 어울리나, 굳이 따지면 천의 기운이라 봐야 했다.

‘마법으로 따지면 그럼 바람인가?’

마법에 문외한이나 기본적인 이야기는 들었다.

마법이 불, 물, 땅, 바람이라는 4대 속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알았으니 기운에 손을 대 볼 차례.

천천히 기운을 돋우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똑.

“로라스, 나 왔어.”

에르자일의 목소리였다.

집중이 깨졌으나 상관없다.

스승이 기본적인 실력만 있다면 독학보다야 100배 나은 법이니까.

“뭐 하고 있었어?”

“룬어를 외웠지. 제법 재미있네.”

“재미있어? 그걸 익히는 게?”

에르자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마법 중에서 제일 지루한 건데. 글자가 끝도 없어. 하나의 룬을 다룰 때는 삼백 자가 전부지만 두 개를 다룰 때는 오백 자, 세 개를 다룰 때는 천자야.”

“그럼 너는 천 자를 익힌 건가?”

“기본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거지. 내가 아는 룬어는 이천 자가 넘어.”

“그럼 알고 있는 걸 다 가르쳐 줘.”

“뭐?”

“이천 자. 다 적어 두고 가. 틈틈이 보게.”

“호호호호.”

저건 확실히 재미있다는 얼굴인데?

“로라스, 일단 삼백 자부터 익혀. 그걸 읽을 줄 알게 되면,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미약한 뭔가가 느껴질 거야. 느껴지지 않으면 느껴질 때까지 읽어야 하는데.”

에르자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게 보통 1년은 걸린단 말이지.”

“1년?”

“물론 난 재능이 있어서 반년 만에 그것을 완성했지만. 스승님께서도 그걸 알고 날 제자로 받아들이셨거든.”

그 사실이 매우 자랑스러운지 그녀가 콧대를 세웠다.

‘초 치기는 싫지만…….’

에르자일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배울 수 있을 때 배워야 한다.

“삼백 자 다 익혔다. 아직 쓰는 건 며칠 더 걸릴 것 같지만 읽는 건 문제없어. 그러니 다음 룬어 좀 알려 주지?”

“…….”

“에르자일?”

“말도 안 돼!”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는 그녀.

“다 익혔다고? 내가 남작님을 만나고 오는 사이에? 그걸 다?”

“아직은 읽을 수만…….”

“그게 그거지!”

여자는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다. 지금 그녀가 흥분한 건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한번 읽어 볼래?”

난 룬어를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룬어는 글자보다 발음을 익히는 게 더 힘들다. 딱딱하다 못해 혀가 꼬이는 발음까지 있었으니까.

하나 어렵지 않게 끝까지 읽으니, 그녀의 표정이…….

‘왜 또 그리 멍하게 보이는 건데?’

그때 뭔가 생각이 나자 금방 그녀의 표정을 이해하게 됐다.

곽아가 제 사형들보다 똑똑하다고 우쭐해하다가 막내 악군이의 재능에 짓눌렸을 때 딱 저런 표정이었다.

‘악군이가 난놈이긴 하지. 제 사저의 표정을 보고 그다음부터 셋째 앞에서는 바짝 엎드렸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 처세술에 따르기로 했다.

“사실 룬어를 조금씩 익히긴 했다. 독학이라 이게 맞는지 틀린지 알 수가 없었을 뿐. 게다가 아는 건 이삼백 자뿐이고.”

“그렇지! 미리 익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이걸 다 익힐 수 있었겠어. 이건 우리 스승님도 불가능한 일인데. 진작 좀 이야기하지. 깜짝 놀랐잖아.”

역시나 통하는군.

‘암! 스승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 있나.’

에르자일은 다시 원래 그 예쁘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천 자는 너무 많지 않아? 천 자만 알려 줄까?”

“알려 주려면 제대로 알려 줘야지. 두고두고 익힐 건데.”

“그거 다 쓰려면 팔 아픈데.”

“다 써 주면 멋진 곳에 데려갈게. 하루 종일 저택 안에만 있으면 갑갑할 테니까.”

당근을 듬뿍 주니 그녀도 순순히 응했다.

한참 후에야 이천 자의 글자가 노트 세 권에 빽빽이 쓰였다.

‘됐다!’

그리 생각했을 때 에르자일이 말했다.

“로라스, 이 노트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줘서는 안 돼. 특히 마법사들에게는.”

“룬어는 공통적인 게 아닌가?”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공통적이야. 하지만 달라. 형태와 발음, 그리고 그 뜻 해석이 달라.”

“아!”

이해했다.

하긴 고서의 문장도 그 해석이 다른 게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해석이 맞다고 싸우고 우기는 학사들 여럿 봤다.

“이건 스승님의 룬어와 해석이야. 알려진 게 많지만 최소 삼백 자는, 스승님의 룬어가 더 간결한 형태와 발음을 가져. 그러니까 이건…….”

“비밀이라는 거지?”

“가문의 포스를 가문 내에서만 공유하는 것처럼 이 룬어도 같은 마탑의 마법사만 공유해.”

“그런데 내게 알려 줘도 되나?”

“네 경우에는 이미 스승님의 허락이 있었어. 네게 마법이 뭔지 보여 주라고 하셨거든.”

몰랐던 일이지만, 짐작은 갔다.

“헤르메스 님도 얼마 전 가문의 시험에 참여하셨나 보군.”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뻔한 거지.

“내가 영지 밖을 나간 적이 그때가 유일했으니까. 그 분이 여기를 온 것도 아니고.”

“아니까 하는 말인데, 로라스.”

“말해.”

“같이 마탑으로 가지 않을래? 거기서 제대로 마법을 익혀. 독학이라고 했지만 이렇게 익히는 것도 쉽지가 않아.”

단숨에 거절해서 좋을 게 없다. 협상은 언제나 여지를 남겨 둬야 하는 법.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만 결정하면 남작님은 보내 주실 거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탑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데.”

“나도 아직 결정을 못 했어. 그보다 이 마나라는 걸 다루려면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지? 그거나 알려 줘.”

에르자일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팔 아파. 그리고 이거 다 쓰면 좋은 곳 구경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래야지. 나가자.”

“잠깐만,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지.”

기다리는 게 귀찮다고 말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다만 마법 스승이 남자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들었을 뿐.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에 난 밖으로 나왔다.

받은 게 있으니 확실히 줘야 했다.

브렌드 경에게 하늘 산맥 부근까지 호위를 부탁했다.

사실 혼자 데리고 가도 되지만, 그랬다가는 마을이 발칵 뒤집어질 테니까.

“가자.”

생각보다 빨리 온 에르자일.

‘이건 마음에 드는군.’

예쁘장해서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뻐 보이긴 한다.

‘좋은 일이지. 옷 고르느라 시간을 한참 잡아먹지 않아도 되니까.’

어린 스승을 모시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 * *

“많은 분들이 로라스를 데리고 있길 원합니다.”

페컴은 떠나면서 에듀에게 마지막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했다.

“모두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공작님이 예물을 보내신 이상 그들도 눈치 보지 않을 겁니다.”

“그래 봤자 이제 열 살인 아이입니다. 지나친 관심이라 생각됩니다.”

페컴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아이가 아닙니다. 사실 이번에는 최종 합격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휘관의 자질. 로라스는 그것을 극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페컴은 본능적으로 좌우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시야가…… 그래서 아란데일 경마저 로라스를 탐내는 겁니다.”

에듀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묻는 것만으로도 페컴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가는 질문일 터.

‘로라스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되니까.’

그리 생각한 에듀는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페컴 님.”

“그럼 다시 뵐 때까지 평안하시기를.”

“그때까지 무탈하시기를.”

옛날 인사법으로 인사를 나누고 페컴은 돌아갔다.

“으음!”

에듀는 나직이 침음성을 냈다.

어찌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정리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니 썩 내키지 않은 것이다.

‘로라스만 생각하자.’

자신이 이 작은 영지에 갇혀 외부 출입을 안 하는 건 오롯이 자신의 선택. 하지만 로라스에게까지 그런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총명한 아이이니 뭘 해도 잘 대처할 것이다.’

에듀는 자신의 결정을 다시 확신하며 로라스를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아버지.”

“지금은 연무장에 있을 시간 아니냐?”

비정상이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하게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연무장에 있어야 했기에, 그곳에 찾아갔는데 허탕을 친 것이다.

“아! 시간이……. 찾으셨습니까?”

로라스의 대답에 에듀는 어깨 너머로 룬어가 빼곡히 적힌 노트를 보며 말했다.

“룬어를 익히고 있었느냐?”

“아! 재미있어서 수련도 잊었군요.”

“재미있어? 룬어가?”

“적당히 머리도 쓰고,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게 나쁘지 않습니다.”

역시 자신의 아들은 하늘이 내린 천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룬어를 재미있다고 할 수 있겠나.

“마나에 흥미가 있다면 아비가 도울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해 보겠느냐?”

“저야 좋지요.”

로라스가 흥미를 보이자 에듀는 마나석을 꺼내서 내밀었다.

“뭡니까? 혹시 마정석입니까?”

“마정석을 가공하여 만든 마나석이란 거다.”

“마나석요?”

“마정석은 쓰임새가 많다. 하지만 마나석은 오로지 마나를 위한 보물. 이걸 만들려면 같은 크기의 마정석 세 개가 필요할 정도지.”

“비싸겠군요.”

에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필요한 건 세 배의 마정석이지만 가공할 때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에 서너 배 값이 올라가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그걸 왜?”

“기본적이 룬어를 익혔다고 들었다.”

“네. 에르자일이 알려 주고 갔습니다.”

“룬어를 읽을 때 그걸 손에 쥐고 읽어라. 포스 서클레이션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럼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로라스가 그걸 바라볼 뿐 가져가지 않자 에듀는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받으래도.”

“아버지, 그리 비싸면 팔아서 영지에 필요한 데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에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물 준 이가 절대 그걸 원치는 않을 것 같구나. 나 또한 그러고 싶질 않다. 네게 도움이 되는데, 그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구나.”

“영지가 우선이지요. 저는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의심하지는 않아. 그래도 아비의 마음이거니 하고 받아라.”

로라스는 잠시 에듀와 마나석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성취를 이뤄 아비에게도 보여 주려무나. 우리 가문에도 잘하면 마법사가 탄생하겠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가 돼야죠. 마법은 그냥 재미 삼아.”

에듀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재미로 마법을 한다라.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뒤집어질 것이다. 여하간 뭔가 성취를 이룬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나중에. 네가 어느 정도 마나를 익힌 후에!”

“네, 알겠습니다.”

“손님들 접대하느라 할 일이 밀렸다. 가 보겠다.”

“네, 아버지.”

에듀는 로라스의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마지막 결정은 로라스에게 달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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