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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4화 (2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

에르자일과 같이 내 방으로 왔다.

‘이거…….’

그리고 그녀가 마법의 기본이라는 룬어를 알려 주기 시작했는데.

‘너무 쉬운걸.’

쉬웠다. 정확히는 굉장히 익숙했다.

“그러니까 룬어란 건 뜻글자야. 한 자, 한 자가 세상을 나타내고 언령을 모으는 기운이거든.”

열심히 룬어에 대해서 설명하는 에르자일에게 미안할 정도다.

그 뜻글자라는 게, 유역후도 알고 있는 한자(漢字)와 너무 비슷했다.

“쓰는 게 아니라 그린다는 것에 더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한 자 한 자 익히고 조합이 가능해지기 시작하면 익히는 게 재미가 있어.”

게다가 유역후가 단순한 성격이긴 했어도, 그 지위 때문에 ‘사서’와 ‘삼경’ 정도는 읽은 무인.

“마법을 배운다 함은 기본적으로 삼백 자의 룬어를 알아야 해. 그래서 아까 알려 준다고 해서 당장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 거야.”

‘아가야! 어떤 곳에서는 기본이 천 자란다.’

물론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모르지만.

“그렇군. 이걸 다 익혀야 한단 말이지?”

“그래야 룬 하나를 다루기 위한 공부가 시작되는 거지. 그런데 로라스.”

“응?”

“그런데 나도 귀족이고, 나이도 더 많은데 누나라고 부르지? 말투도 조금 고치고.”

“불편한가?”

“불편한 건 아닌데…… 어색해서.”

아무리 불편해도 반백년을 더 산 나보다 불편할까?

“내게 존대를 받으려면 내게 존중을 살 정도의 실력이 되거나, 인품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 둘 중 어느 한쪽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너 오만하구나?”

“겸손 떤다고 모자란 척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받아칠 말이 없는지 잠시 당황한 그녀를 보니 약간 미안해진다.

‘애들하고 말싸움할 필요 없는데 말이지. 게다가 어찌 됐든 날 가르쳐 줄 스승인데.’

군사부일체라 했다.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스승.

‘사소한 것에도 정성을 다한다고 방금 다짐하지 않았나. 고작 나이 어리다고 마음가짐이 이리 흐트러지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겉과 속은 일치해야 하는 법. 예우를 담아서 말했다.

“에르자일 님, 당신의 실력이 대단함을 알았으니 말은 조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누나라는 호칭은 무리입니다.”

너무 정중해서일까?

“뭐,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고 그냥 원래대로 해. 그게 좋겠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에르자일 님, 여기에 계십니까?”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에르자일 님은 여기 계시다.”

“영주님께서 에르자일 님을 모시라 하셨습니다.”

에르자일이 날 보며 말했다.

“이제야 에듀 남작님을 뵐 수 있겠네.”

“뵙고 오십시오. 마법이라는 게 뭔지 다뤄는 봐야 하니까요.”

“아! 그냥 원래대로 하라니까. 닭살 돋아.”

스승께서 원하신다면야.

“그러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나가는 에르자일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곽아 생각이 났다.

‘그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로라스이지만 유역후의 기억이 있으니 그립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뭘 해도 잘 살 아이들이다.

할 일이 태산이니 그리움은 접어 두고, 에르자일이 적어 둔 삼백 글자의 룬어를 살폈다.

‘확실히 비슷해. 뜻글자가 그렇겠지만.’

집중해서 글자를 봤다.

중원 시절 책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안 한 거지, 못 한 게 아니다.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것보다 몸을 움직여 강해지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난 룬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 * *

“으음.”

에듀는 에르자일이 준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고는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에듀 남작님께 안부 전해 달라 하셨으며, 귀히 써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에르자일은 에듀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특급에 가까운 마나석 아닌가?

이런 변두리 영주, 그것도 마을 수준의 영지를 다스리는 그라면 그런 걸 처음 봤을 것이다.

한참 후에야 에듀의 입이 열렸다.

“과한 예물이구나.”

“기쁘게 보냈으니 기쁘게 받아 주셨으면 한다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다음에는 로라스와 꼭 함께 올라오셨으면 하셨습니다.”

“다음에?”

에듀는 순간 그다음이 언제인지 깨달았다.

아! 그렇군. 헤르메스 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으니…….

“뵙기는 봬야겠지. 노력한다 전해 주거라.”

“네, 남작님.”

“그래, 혼자 와서 심심하겠구나. 이곳이 변두리라 하나 하늘 산맥은 한 번쯤 구경해도 될 곳이다. 내 사람을 시켜 안내하도록 하마.”

“아닙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우연찮게 로라스를 만나 룬어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아! 물론 그 아이가 먼저 청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에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더냐. 상관없다. 기본적인 룬어를 공부하는 기사들도 많으니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

“네.”

“그럼 나가 보거라.”

에르자일이 밖으로 나간 후, 에듀는 다시 상자 안으로 눈을 돌렸다.

‘대체 왜?’

어제의 놀람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자신이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졌다.’

공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헤르메스의 선물은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에듀는 한참 머리를 굴려 봤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답은 하나뿐이다.

에듀는 헤르메스의 상자를 보관함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걸음을 옮겨 찾은 사람은 페컴이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페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주 푹 잤습니다.”

“페컴 님.”

“말씀하시지요.”

“에렌에서 제가 모르는 일이 벌어진 게 있습니까?”

“모르는 일이라 하시면…… 사실 남작님께서 에렌의 일에 신경 쓰지 않은 지 꽤 되시지 않았습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왜 그곳을 떠났는지.”

에듀는 그에게 다시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는, 자신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이었다.

“페컴 님이 직접 오신 이유. 그리고 헤르메스 님이 사람을 보낸 이유.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하하하. 저야 심부름만 할 뿐이지 아는 것이 있겠습니까?”

“에렌의 일을 페컴 님이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질 않지요. 이 사람을 좀 도와주시지요.”

에듀의 직설적인 표현에 페컴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들으셨겠지요?”

“들었습니다. 로라스가 최종 합격자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남작님, 합격자 중 하나가 아니라 합격자입니다. 로라스는 최후의 일인입니다.”

에듀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몇 명의 아이가 더 있다고 하던데요?”

“그 몇 명의 아이들도 남작님의 아드님이 데리고 간 것이지요.”

“그게 대체…….”

“시험에 대해서 발설할 수 없다는 건 아시겠지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로라스가 최후의 단 한 명으로 남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럼 공작님께서는…….”

페컴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각하의 속내를 제가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막연한 생각으로 로라스 공자는 남작님의 핏줄 아닙니까?”

“그럼 헤르메스 님은…….”

“그 역시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시험에 헤르메스 님도 참여했다는 것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가뜩이나 굳은 에듀의 표정이 석상처럼 변했다. 그런 그를 보며 페컴이 다시 말했다.

“남작님, 남들은 잡지 못해 안달이 난 기회가 왔습니다. 그냥 기회도 아니고 로라스가 직접 만든 기회입니다.”

“페컴 님…….”

“이 기회에 각하의 손을 잡으시지요. 아시겠지만 각하께서는 두 번은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에듀 님에게는 다르시군요.”

그가 돌려 말했으나 못 알아들을 에듀가 아니었다.

“마침 헤르메스 님도 나서셨으니 더더욱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분을 통해 뜻을 전달하셔도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에듀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닫고는 살짝 눈을 감았다.

예상했어야 하는데.

어리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아들이 아니었던가?

시험에서 무슨 재능을 보였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헤르메스 그녀까지 이리 나설 줄은 몰랐지만.’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은 특급 마나석을 보냈으면서 원하는 게 없다고 한 것도 뜻밖의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귀하게 써 달라고?’

거기에 속내가 다 담겨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찌 됐든 로라스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마나석 또한 큰 도움이 될 테니.’

에듀는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내고는 눈을 떴다.

“조언 감사합니다, 페컴 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은혜라니요. 전 남작님과 좋은 관계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까?”

“에렌에 있을 때도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시더니…… 제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가 두 손, 두 발 거들고 나설 것입니다.”

페컴은 소리 내어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남작님도 에렌으로 돌아오셔야 할 터. 그때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이야기하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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