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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3화 (23/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

‘하아! 놀랄 일이네.’

개천지보를 운기하면서 내심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며칠 전의 깨달음으로 내후년에나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개천지보의 이보에 올라섰다.

‘세상일 모른다더니, 무인이 문인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구나!’

하긴 고대의 어떤 무인은 도덕경의 문장으로 천하제일이 되었다고 하던데.

공교로운 일이다.

유역후가 이 무슨 따분한 책이냐고 집어 던지지 않고 그걸 가르침 삼았다면 지금의 나, 로라스가 있었을까?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 참으로 당연한 말에 이토록 놀라운 힘이 있었다니!’

중용 편이 또다시 떠올랐다.

‘성실하고, 집중하여, 지속하라.’

반성이 되었다.

분명 난 남들과 다르다.

유역후라는 전생을 가진 나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천재의 수준을 넘어선다.

충분히 자만이라는 씨앗에, 나태라는 열매를 맺을 이유가 된다.

오늘의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되었으리라.

그래서 어쩌면 다시 유역후와 같은 후회를 했을 확률이 높을 터.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오늘의 깨달음을 앞으로 내 삶의 지침으로 삼기로 했다.

“로라스, 자느냐?”

그때 문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닙니다, 아버지.”

문을 여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자지 않는다면 아비와 이야기나 하지 않겠느냐?”

“들어오십시오.”

아버지는 내 방에 들어오시더니, 마치 내 방을 처음 본 것처럼 둘러보셨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으셨다.

그 모습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아버지께서 왜 오셨는지 알 만했다.

벌써 몇 차례 경험한 나도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는데, 당신은 얼마나 가슴이 뛰시겠는가?

“오늘…… 내가 좀 못난 꼴을 보였지?”

“아닙니다. 멋있으셨어요.”

“확실히 네가 복덩이다. 내 생명을 구하더니 이제는 그런 깨달음까지 주는구나.”

“네?”

생명을 구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

잠시 당황하던 아버지가 급히 말씀하셨다.

“네가 태어남으로써 내가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보다 네게 포스 서클레이션을 알려 주기로 하고, 깜빡하고 그냥 왔지 뭐냐.”

“제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편하실 때 알려 주셔도 되는데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피곤은, 몸에 힘이 넘치는 것 같구나. 포스를 방출하여 살짝 허기가 질 뿐이지.”

그때였다.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친 것은 말이다.

오늘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나라고 다를까?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아버지와 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당으로 직행했고, 그 탓에 시녀 하나가 고생을 해야 했다.

많이 먹고 많이 떠들었다.

고기를 먹으며 심법을 배울 줄은 몰랐다.

행복한 밤이었다.

* * *

스아악!

괴기할 정도의 파공음.

끄르륵.

파공음과 어울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그리고 별달리 포스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매끄럽게 베인 목각 인형.

목각 인형은 바닥에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흔들림 하나 없이 베였다.

‘분명 달라졌다.’

에듀는 자신의 상태와 눈앞의 결과에 그리 확신했다.

‘마스터…… 아직 멀었다 생각했거늘!’

분명 그리 생각했으나 며칠 전 깨달음은 그 경지를 바로 눈앞으로 당겼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경지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베었을 때 느껴진 이질감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의 경지가 손끝이 적응하지 못했다는 증거.

이런 상황에서는 시험해 볼 수 없다.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위험할 수 있다.

‘시그탑이라면 큰 위험은 없겠지만.’

자신의 기사.

어디에 내놔도 돋보여 빛날 무인.

그의 경지는 자신과 함께 마스터를 꿈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신하이면서도 훌륭한 파트너다.

에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제대로 단련한 후에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때쯤이면 깜짝 놀랄지도!’

에듀가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수련을 마무리할 때, 드리프가 찾아왔다.

“주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그게…….”

드리프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에렌의 페컴입니다.”

순간 에듀의 표정이 굳었다.

본가에서 사람이 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부분 방문 이유가 짐작되지 않은 손님은 좋지 않은 일을 달고 왔다.

“안으로 모시게. 씻고 가지.”

“네, 알겠습니다.”

에듀는 급히 몸을 씻고,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상시 편한 차림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그였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래야 했다.

겉모습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정복을 입음으로써 스스로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다.

에듀는 응접실에 들어갔고, 기다리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지요.”

“에듀 남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에듀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페컴.

“어떻게 이런 곳에 직접 오셨습니까? 바쁘신 분 아닙니까?”

빈말은 아니다.

페컴은 본가의 두 번째 집사다.

그는 집사 ‘따위’나 집사 ‘주제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본가에 있는 세 명의 집사들은 웬만한 귀족들은 눈 아래로 본다. 실제로 작위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백작급의 지위지만 본가에 필요한 이들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공대를 받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직접 영지에까지 내려왔다.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에듀 남작님. 10년도 넘었지요?”

하지만 페컴은 그런 에듀의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건 말뿐 아니라,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었다.

에듀는 긴장을 풀지 않으며 생각했다.

‘아직도 우호적인가?’

자신이 본가에 머물렀던 시절. 집사 중 페컴이 제일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시녀 하나가 차를 내왔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차를 마셨다.

“영지가 아담하니 좋습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 부근에서 이 정도로 영지를 꾸릴 수 있는 건 에듀 님이시기에 가능할 테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에듀는 그리 대답했다. 그러고는 미소를 섞으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놀러 오시기에는 너무 먼 곳이 아닙니까?”

“하하하. 하늘 산맥이 있는 곳 아닙니까? 영지가 조금 더 발전하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페컴은 그리 말하며 탁자 위로 작은 상자 하나를 올려놨다.

“이게 무엇입니까?”

“공작 각하께서 에듀님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순간 에듀는 가슴 한편에서 쓰라림이 느껴졌다.

‘아직도 화를 내시는 건가.’

페컴이 그런 에듀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안에 공작 각하의 친필로 적혀 있는 서신도 있습니다.”

에듀는 그 작은 상자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방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에듀 남작님.”

“말씀하시지요.”

“여기에는 저만 온 게 아닙니다.”

“네?”

“매지스터 헤르메스. 그분의 제자가 동행했습니다.”

“그녀의 제자가 왜?”

“그건 따로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분의 부탁을 받고 동행한 것뿐이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페컴이 시종의 안내를 따라 나갔고, 에듀는 다시 한 번 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달칵.

에듀는 마침내 상자를 열었다.

“으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음 소리를 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의 물건을 잡았다.

‘이걸 어떻게…….’

에듀의 손안에 있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건 작은 목각 인형.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 형태이긴 하나 사람처럼 생긴 괴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한마디로 형편없는 인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만지는 에듀의 손길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에듀가 떠는 것을 멈추고, 상자에 남은 서신을 잡을 때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 * *

매번 느끼지만 영지의 새벽 공기는 정말 특별하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절로 강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단순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수련도 기쁜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3년도 채 걸리지 않겠군.’

개천지보 삼보까지 걷는 데 예상했던 시간은 내 나이 열여섯에서 일곱이 될 시기.

하지만 어제의 깨달음으로 인해 대폭 단축될 것 같았다. 어제의 깨달음을 계속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사소한 것에도 정성을 다한다는 건 말은 쉽지만, 지키기가 쉽지 않은 일.

물론 난 지킬 것이다.

‘모르면 모를까. 마음만 단속하면 이보다 지키기 쉬운 것도 없는데.’

깨달음을 머리에 각인하며 정원 한편에 가부좌를 틀었다.

어머니가 기르는 화초의 냄새가 수련에 살짝 방해가 되는 기분이었으나, 연무대의 정비가 아직 끝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후우우우!”

길게 호흡을 내뱉고 심법, 아니 베스타인가의 포스 서클레이션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역시 훌륭해.’

가문의 포스 서클레이션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했다. 무림의 여타 내공심법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았다.

‘무림에서 삼대심법에는 비교할 수 없고, 십대심법에 비교해 살짝 손색은 있으나 그건 포스 서클레이션의 역사가 짧아서 그럴 터.’

서클레이션 구조 자체는 안정적이니만큼, 발전의 가능성은 충분할 것이고, 발전할 것이다.

‘개천지보와도 같은 구석이 있으니,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하여 알려 드리면 의심하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의 수준으로는 아버지에게 심법으로 뭔가 지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길 자체는 제시할 수 있을 터.

시그탑처럼 내근을 단련시켜 드리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응?’

인기척이 들린다.

연무장에서는 미리 이야기해 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으나, 이곳은 정원이니 관리하는 하인이 오고 있을 지도 몰랐다.

살짝 눈을 뜨고 있을 때 인기척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안녕.”

하녀가 아니었다.

“누구니, 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누구지?’

제법 예쁘장한 여자아이다.

“으음. 혹시 네가 로라스니?”

“누구냐, 넌?”

“맞구나. 난 에르자일. 헤르메스 님의 제자이기도 하지.”

‘헤르메스?’

에렌성에서 들은 이름이다.

‘대단한 마법사라고 했는데…….’

순간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마법사의 제자라면 이 아이도 마법사가 아닌가?

“로라스가 아니야?”

다시 물어보는 소녀에게 답해 줬다.

“로라스 맞다. 손님이 온 줄 몰라서 결례를 범했군.”

“어제 늦게 도착해서 몰랐나 보네. 반가워.”

성격이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예의상 그러는 건지 몰라도.

‘보기는 좋네.’

셋째 곽아도 이리 예쁘장했는데 말이다.

“반갑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포스의 기운이 느껴져서 어느 기사분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감이 제법이다. 기운이 미약했을 텐데 말이다.

“잠시 수련 중이었다.”

“으음. 어린데도 대단하구나. 역시…….”

“역시 뭐?”

물었으나 소녀는 뭔가 실수라도 한 듯이 화제를 돌렸다.

“대단하다고. 베스타인 포스 서클레이션은 익히기가 까다롭고, 초반의 성취가 더디다고 들었는데. 열 살인 네가 그 정도 기운이라면.”

나이까지 아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날 알고 있는 듯했다.

‘기운을 읽은 건, 감이 아니라 실력이란 거군.’

그리고 이 에르자일이라는 여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다 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너도 마법사인가?”

에르자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헤르메스 님이 내 스승인데 당연한 걸 묻는구나. 나는 세 개의 룬을 동시에 다룰 수 있어.”

“…….”

“세 개의 룬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니까?”

강조하는 그녀를 보니 뭔가 실수한 것 같다.

“실례 같은데…… 그게 대단한 건가?”

“하아!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영지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에르자일은 나름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 개의 룬을 동시에 다루는 마법사는 많지만, 내 나이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 아마 내가 유일할걸.”

‘아! 칭찬해 달라는 말이었군.’

하긴 곽아도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재능 그 이상을 발하기도 했다.

“대단하구나!”

뒤늦게 감탄하는 척했으나, 너무 늦은 듯했다.

계속하여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

“됐네요. 마법도 모른다면서.”

“그럼 알려 주면 되잖아. 그 마법이라는 거.”

알고 싶었다.

에렌에서 느꼈던 그 꺼림칙한 기분. 마나라는 성질에 대해서 말이다.

“히힛!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마법이란 게 알려 준다고 해서 뚝딱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에르자일이 웃으며 하는 말에 나도 마주 웃어 주며 말했다.

“그건 봐야 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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