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0)
성내의 생활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으음! 먹는 건 확실히 영지보다 낫다.’
질 좋은 고기에, 뭔가 상쾌함이 느껴지는 풀떼기들. 특히나 이 크림수프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계속 입에 들어가는 마성을 지니고 있다.
저번에 공작과 함께 먹은 것처럼 특별한 음식은 아니나 만족스러운 식사.
시중을 들던 시종 하나가 빈 잔에 우유를 따라 주며 말했다.
“공자, 저번에 말씀하신 몸을 풀 수 있는 장소에 드나들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주인님께서 공자를 정말 귀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가가 떨어진 곳이 바로 주인께서 쓰시는 전용 연무장이니까요.”
“…….”
“주인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곳입니다. 없는 게 없는 곳인데,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원래 있는 수련장을 쓰게 해 주면서 생색낸다고 하기에는 말이 너무 무겁다.
‘무슨 꿍꿍이지?’
시종이 ‘전용’이란 단어에 힘을 주지 않아도 안다.
유역후에게도 전용이라 형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전용 수련장, 전용 식당. 전용 의자 등등.
특별함이란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아닌가?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제자들과 수하들이 알아서 그런 걸 마련했다. 솔직히 나쁠 게 없었고, 어떤 건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건 공작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니까 시종의 말은 단순히 전용 수련장을 사용할 수 있다가 아니라, 공작의 것을 내가 나눠 받는다는 뜻이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데.’
물론 짐작하는 건 있다. 그리고 나라도 나 같은 아이를 봤으면 욕심을 냈을 것이다.
유역후가 말년에 난(蘭) 하나 키울 때도 그리 재미를 붙였는데, 사람 하나 키우는 재미는 또 어떠할까.
말년에 제자를 하나 더 들일지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여하간 시종의 안내를 받아 그 전용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네.’
연무장이라 하여 외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굉장하네.”
연무장을 보며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고, 시종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렇지요? 에르페유 경도 그렇고, 티 내지는 않았으나 레빙스턴 경도 이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걸 꿈꿨지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시종은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수아비처럼 보이지만 오델리움이란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 충격을 제대로 흡수한다든가, 바닥에 이상한 선들은 사실 마정석으로 운용되는 마법진이라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을 제공해 준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시종은 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내 시선은 한 군데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검 수집이 취미인가?’
벽에 걸린 수많은 검들.
유역후도 한때 저런 취미가 있었다. 강호십대무기라 불리던 무기 중 여덟 개가 내 것이었다.
‘활잽이의 궁, 땡중의 금강저만 손에 넣었으면 다 모으는 거였는데.’
잠시 옛일을 떠올릴 때 시종이 다가오며 말했다.
“멋지지 않습니까?”
“공작님의 컬렉션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인이라면 가지고 싶어 할 무기의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지요.”
대부분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정말 많은 무기들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제법 살기를 풍기는 놈부터 스스로 열기를 뿜고, 냉기를 뿜는 놈까지.
‘마법이라는 게 좋긴 좋군.’
시종의 설명에 꼭 마법 무기란 단어가 붙는다. 제법 신기하다.
‘경지에 이르면 다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편리하기는 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생긴 게 묘하네.’
언뜻 보면 칼이나, 손잡이 부분이 일반적인 생김새와는 다르다.
‘삼단으로 분리시키는 것인가?’
나란히 걸려 있는 흑색 금속 봉을 보니 그런 것 같다.
‘완성시키면 언월도와 비슷하겠네.’
이 무기에 관심이 간 건, 특이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다른 무기들에서 느껴지는 특별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별함이 없어 특별해 보이는 무기.
“이 무기의 이름은 뭡니까?”
물음에 시종은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이건…… 저도 처음 봅니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요.”
“마법 무기가 아니라서요?”
“네? 네! 그렇지요. 마법이 없으면…….”
“그런 걸 공작님께서 이곳에 걸어 뒀다고요?”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는 그를 보고 있을 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놈의 이름은 간단하다. 커터(Cutter)라 불리는 놈들이다.”
“주인님.”
시종이 크게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예를 올렸다.
“공작님, 연무장 이용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손 사이에 무슨.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고민해야 할 문제지만 답은 찰나에 나왔다.
“네, 할아버지.”
공작이 다가와 커터라 불린 칼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에 발레리스의 한 부족을 멸망시키고 얻은 것이다. 마음에 드느냐?”
다시 한 번 커터라는 무기를 보았다.
매력적인 놈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인이 근사한 무기를 보고 설레는 건 본능 같은 것.
“그래 봤자 쇠붙이긴 하지만 근사하긴 하네요.”
“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공작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그래 봤자 쇠붙이지. 쓰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쇠붙이. 안 그러냐?”
“그렇지요.”
공작은 커터를 잠시 보다가 그걸 내게 내밀었다.
“써 보겠느냐?”
사양하지 않았다. 매력 있는 쇠붙이를 싫어하는 무인은 없으니까.
‘호오!’
생긴 것도 근사한데, 잡아 보니 매력이 터질 듯했다.
상하좌우의 균형이 완벽한 건 기본이고, 생각 이상으로 가볍다. 그리고 그 가벼움과 달리.
씨이이이잉.
칼을 휘두를 때 나는 파공음은 웬만한 중무기 뺨쳤다.
“이것도 마법입니까?”
공작은 내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잘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은 걸려 있지 않다. 그래서 제법 괜찮은 쇠붙이지. 안 그러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마스터라 하기에 충분할 듯합니다.”
“그 이상이지. 특급 오델리움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장인은 한 손에 꼽힐 테니까.”
씨이잉! 씨이잉! 씨이잉!
손에 달라붙어 뜻대로 움직이는 커터.
“마음에 드느냐?”
공작의 물음에 대뜸 그렇다고 할 뻔했다.
‘몸이 어려졌다고 생각도 어려졌나. 실수할 뻔했네.’
공작에게 커터를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왜? 마음에 든 게 아니었느냐?”
빤히 쳐다보는 두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마음에 들어도 제 게 아니면 쓸모가 없으니까요.”
“네 것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들게 해야죠. 내 거니까.”
“하하하하하!”
공작은 미친 듯이 웃었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가 왜 웃는지 이해했으니까.
어느 순간 공작이 웃음을 싹 지우며 물었다.
“줄까?”
여기서 바로 달라고 하면 순진한 거다.
나도 미소를 지우며 반문했다.
“조건은요?”
“하하하핫!”
그는 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 * *
‘쪼잔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공작은 끝내 커터를 주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히 줄 만하지 않았나?’
그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했기에 원하는 답변을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주지 못했다.
―할아비 곁에 있겠느냐? 그렇다면 얻는 것이 많을 텐데?
분명 그는 모두 줬을 것이다. 아니, 내가 가져올 자신이 있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데다 자존감이 넘치나, 늙은 사내다. 그렇기에 내가 훨씬 유리한 거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젊은 것만 빼고 모든 것을 가진 권력자. 딱 유역후 아닌가.
하지만 그가 원하는 그 한 가지는, 내가 절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근처에만 살았어도 어떻게 방법이 있었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아쉽다.
그의 것을 조금 빌려 썼더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훨씬 빠르게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님하고 떨어질 수는 없지.’
가족.
유역후가 꿈꾼 그것을 지금의 내가 가졌다.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그걸 포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욕심은 많아서.’
마음속으로 여러 번 공작을 욕했지만, 꼭 유역후를 보는 것 같아 그것도 찝찝함이 가득했다.
‘유역후도 막내를 거둘 때 탐욕이 굉장했으니…….’
그에게는 네 명의 제자가 있으나, 대부분 어쩌다 보니 거둔 것이지만 막내 악군이는 유일하게 욕심을 내서 제자로 만들었다.
뭐가 좋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냥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똑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키우는 재미가 엄청났었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네.’
얻은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공작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그의 제안은 언제든지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니.’
기분이 상할 것이 분명했을 텐데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했다.
‘여차하면 그 힘을 빌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 편안하게 생각할 때 본능적으로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싸아아아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지, 아니야. 권력이란 늘 유혹적이고, 그는 최상위 권력자다. 지금의 나를 엮어 올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공작의 제안은 제안이 아니라 미끼다.
아차! 하는 순간 물어 버리고 마는 미끼.
미끼는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래야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영감탱이. 확실히 무서운 구석이 있단 말이지.’
스스로를 단속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들판. 흔한 레지온 한 마리 안 보일 정도로 완벽한 안전지대.
나도 우리 마을을 이리 만들 것이다.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마을, 그런 지역으로 말이다.
‘시간은 더디게 가는데 해야 할 것들은 점점 늘어나는군.’
그래도 행복한 고민이다.
돌아갈 집이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좋았다.
* * *
“이대로 돌려보낼 생각이십니까?”
공작가의 제2집사 페컴은 그리 묻다가 순간 움찔했다. 옆에 있던 제1집사 트아이가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제넘었습니다, 주인님.”
페컴은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경망스러운 자신의 입을 탓했다.
자신이 이 큰 가문의 두 번째 집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하지 않는 무거운 입 때문이었다.
주인이 원할 때만 입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큰 실수다.
‘내가 어쩌자고!’
이유야 있다.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는 주인이다. 하지만 지금 주인의 표정은 아쉬움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입이 가벼워진 것은.
페컴이 무릎을 꿇고 있으나, 공작은 그는 보이지 않는 듯 트아이를 보며 말했다.
“잘 알아봐.”
집사 트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
공작이 뭘 알아봐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걸 물어야 알 정도라면 트아이는 집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파라일 공작의 속내를 스스로 들여다보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