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9화 (19/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9)

공작은 그런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지켜본 후 입을 열었다.

“밤이 늦었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따라 일어섰다.

“내일 보자꾸나.”

공작이 나가면서 하는 말에 아이들은 생각했다.

오늘 같은 기회가 한 번 더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아직 아이들은 몰랐다.

기회란 늘 그렇듯이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이다.

* * *

베스타인 공작은 약간의 포만감을 느끼며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흐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별일도 아닌 것을.’

따지고 보면 정말 별일 아니다. 중요한 행사이긴 하나 그 아이들 때문에 자신의 머릿속이 시끄러워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생각나는 건.

‘놈…… 내 말만 들었더라도.’

역시 로라스. 그리고 그의 부친 에듀가 떠올라서일 것이다.

똑똑똑.

“공작님, 헤르메스가 와 있습니다,”

밖에 서 있던 가드들이 노크와 함께 방문자가 있음을 알렸다.

‘해가 뜨면 올 것이지.’

공작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시간에 헤르메스가 자신의 방문 앞에 있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군, 에르페유입니다.”

공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 바깥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쟤는 또 왜?’

공작은 짜증이 확 났다.

‘이것들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의 수족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이 개인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 너무 잘 안다.

“모두 들어와!”

방문이 열리고 집무실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공작은 기가 찼다.

헤르메스와 에르페유만이 아니었다. 아란데일과 레빙스턴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베스타인 공작가의 4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이들이 전부 모인 것이다.

‘시끄러워지겠군.’

바깥에서는 경외를 담아 4개의 기둥이라느니, 검이라느니, 수호자들이라니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네 명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적은 아니나 남보다 못한 사이라 정의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이들 모두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모두 모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용케 다 모였구나.”

그 탓에 명령 없이 이들이 이리 모두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로라스 때문이리라.

“주군, 이번에 최종 합격자들 중 로라스라는 아이. 제게 맡겨 주시면 쓸 만한 재목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헤르메스의 말에 에르페유가 소리치듯 말했다.

“무인으로 타고난 아이에게 괴이한 손짓이나 가르치겠다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보시는가?”

“괴이한 손짓?”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나풀거리는 손짓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그 미친년 머리카락을 지금 보여 주마!”

헤르메스가 언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손을 드는 순간이었다.

움찔.

순간 싸한 느낌에 헤르메스는 급히 손을 내렸고, 에르페유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싸늘한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용건만 간단히.”

공작의 나직한 목소리에 에르페유가 먼저 답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주군의 아이언 핸드가 둘이 될 것입니다.”

“주군, 마나의 축복을 받은 아이입니다. 제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헤르메스도 지지 않고 하는 말에, 공작의 시선이 아란데일에게 향했다.

“경은? 무슨 용건인가?”

“시험 설계를 했을 때부터 보고드렸다시피, 공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아이의 재능은 군사의 재질. 포스를 타고났다 하니 전선의 지휘관으로서 그만한 재목은 없겠지요.”

아란데일은 슬쩍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를 쳐다봤다.

‘너도냐!’

그런 의미가 담긴 사나운 시선이 쏟아지자 아란데일은 다시 공작을 보며 말했다.

“저 두 사람과 다툴 생각은 없으나, 반드시 일정 시간은 군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력도 좋고, 마법도 좋으나 지휘관의 재능을 망칠 수는 없지요.”

공작은 레빙스턴에게도 물었다.

“경도? 이들과 같은 이유로 날 찾았나?”

“이 시간에 이들이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고…… 괜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따라온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다?”

“명령하시면 최선을 다할 생각은 있습니다.”

결국 욕심은 난다는 뜻에 공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난놈은 난놈이구나.’

이 네 사람이 자신의 수하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대륙에 명성을 날리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아이 하나 데려가겠다고, 자신의 화를 살 것을 알면서도 이리 왔다면.

공작은 정리가 필요성을 느꼈다.

“뜻은 알았으나 이미 그 아이의 쓰임새는 정해졌어.”

“주군!”

공작의 폭탄 발언에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불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잠시 맡길 수야 있지.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공작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알고 모두 나가!”

그의 축객령에 사람들은 슬쩍 눈치를 봤지만 공작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 시간을 방해하면, 나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심도 깊은 대화’란 소리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황급하게 일어나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하아!”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순순히 물러날 놈들은 아닌데…….’

한마디 했으나 저놈들의 욕심을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올 것이 뻔했다.

‘누구에게 붙여 준다…….’

자신의 옆에 둘까도 잠시 고민하는 공작.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애쉬!”

순간 공작 앞에 흐릿한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애쉬.

아는 사람에게는 공작의 그림자라 불리는 그는, 어느새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네가 확인했지? 누구에게 어울린다 생각해?”

“주군의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네 의견을 묻는 거다.”

“포스, 마나는 물론이고 제 살기에도 즉각 반응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공작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제 기술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익히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제게 맡겨 주시면 양지에서 쓸 수는 있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은 난다는 말이군?”

“어느 누가 욕심이 나지 않겠습니까? 직접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것입니다.”

애쉬가 자신을 보며 하는 말에 공작이 물었다.

“티가 나는가?”

“죄송합니다, 주군. 주제넘게 짐작했을 뿐입니다.”

“보기야 제대로 봤어. 그 녀석 에듀의 아이라더군.”

“들었습니다.”

공작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쉬워. 항상.”

“그래서 더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시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합니다.”

“흘러가는 대로라…….”

공작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내 욕심에 그게 가당치는 않지.”

* * *

아이들이 어제 식사 자리가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을 눈치챈 건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왜 지금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공작님께서 오늘 다시 보자고 하셨습니다.”

영지로 돌아가라는 교관들의 말을 들은 아이들이 항의했다.

“바쁘신 분이다. 어제 한 번 뵈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인 줄 알아야지.”

교관들의 대답에도 몇몇 아이들은 끝까지 남아 있기를 주장했다.

“성적에 따른 상은 각자의 영지로 보낼 것이다. 너희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고, 너희 부친께서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성적에 맞춰 따로 어떠한 지시가 내려갈 것이다”

교관들이 그리 말했지만 납득한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떠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쟤들은요? 쟤들은 왜 준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이 가리키는 건 멀뚱히 지켜보고 있는 로라스를 비롯한 네 명의 아이들.

“그건 나도 모르고, 너희 역시 알 권리가 없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시, 너희에게는 불이익만 있을 뿐 어떤 이득도 없다.”

교관들의 단호한 경고에 아이들은 짐을 챙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일어난 후 커다란 막사에는 이제 로라스와 포플러, 그리고 린델만이 남았다.

“어제 식사가 마지막 시험이었던 것 같지?”

아란의 말에 포플러가 로라스에게 말했다.

“네 덕분에 나도 남은 것 같다.”

자신들이 남은 이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어제 공작과의 식사에서 음식을 먹은 아이들만 남았다.

정확히는 로라스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음식을 다 먹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적으로 최선을 다해 먹은 것이 인정된 듯했다.

로라스가 미소만 짓자, 포플러가 린델을 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안 거냐?”

“어떻게 알긴, 뭐가?”

“너 어제 울면서까지 억지로 먹었잖아.”

린델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난 그 식사 시간도 시험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알았다고?”

“당연한 거 아니야. 여태 레빙스턴 님이 하신 말씀 중에 아무 의미 없는 말은 없었어. 그분 입에서 시험 종료라는 선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방심해서는 안 되지.”

린델은 슬쩍 로라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걸 눈치챈 게 로라스와 나, 둘뿐라는 게 오히려 신기한 거지.”

린델은 다시 아란과 포플러를 보며 말했다.

“너희는 지극히 운이 좋은 케이스고. 너희도 로라스가 알려 줘서 먹었지?”

아란과 포플러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너무 많이 와 버렸네. 그냥 밥 먹는 걸로만 끝났으면 딱 좋았을 텐데.”

중얼거리듯이 한 내 말에 아란이 반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밥은 편하게 먹어야 한다는 소리지, 무슨 소리긴.”

얼렁뚱땅 답변을 넘겼다. 최종 합격자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잠시 그리 잡답을 하고 있을 때, 레빙스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시험 종료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최종 합격자가 네 명이라니. 역대 이리 많은 사람이 합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레빙스턴은 린델을 보며 다시 말했다.

“린델.”

“네, 레빙스턴 님.”

“넌 너희 집이겠구나. 아란데일 경에게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공작을 만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으나, 린델은 이미 예측이라도 한 듯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

“네.”

“매지스터 헤르메스가 너를 지목했다. 너는 앞으로 그녀에게 교육받게 될 것이다.”

아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헤르메스 님이라면 마법사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내게 해될 것은 없다.”

“하지만 저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의는 없다. 원치 않으면 네 집으로 돌아가라. 그녀가 널 잡지는 않을 것 같으니.”

아란이 고개를 숙였다.

‘이 녀석이 제일 빨랐지?’

나를 제외하고 그 꺼림칙한 기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게 아란이었다.

“인상 펴. 너는 훌륭하게 해낼 거야.”

“로라스…….”

“날 믿지? 이번에도 믿어. 너는 그리될 테니까.”

이게 위로가 된 건지, 아니면 체념한 건지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포플러가 에르페유라 불리는 기사에게 교육을 받는다는 발표에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로라스.”

마침내 레빙스턴이 내 이름을 불렀다.

“너는 대기한다.”

“대기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새로운 말이 나올 때까지 숙소에서 대기한다.”

또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에 갈 생각만 하자.’

시험 종료를 선언했으니 그리 오랜 시간 잡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할 것을 찾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역시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해.’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힘. 그것에 욕심이 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