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8)
뚜벅뚜벅.
분명 다른 사람들이 걷는 소리와 다를 게 없으나, 공작이라고 생각한 아이들은 긴장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배운 대로 자세를 꼿꼿이 하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건 나뿐이었다.
‘아닌데.’
발소리가 다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체구가 다르고, 걷는 방식이 다르고, 그 포복이 다르다. 같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저건 무인의 발소리가 아니다.
‘제국에 하나밖에 없다는 트랜센더스 (Transcendence―초월자)라면 저런 소리를 낼 수는 없지.’
트랜센더스는 장인이라는 마스터의 상위 개념.
‘무림에서는 초절정의 수준이라고 봐야 하나?’
확실히 그건 쉽지 않은 경지다.
만 명의 무인이 있다면 한두 명만이 절정의 경지를 넘어설 수 있고, 그런 절정고수 백여 명 중에서 또 한두 명이 초절정고수란 수식이 붙으니까.
‘견식을 해 본 적은 없으니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고, 무림에 심법이라는 게 있다면 이곳에는 포스 서클레이션(Force Circulation)이라는 이름을 가진 포스 연성법이 있다.
할 일이 또 생겼다.
‘아버지에게 가문의 포스 서클레이션을 배우면 비교가 가능할 테니.’
여하간 그렇게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렸다.
아이들이 긴장했으나, 예상대로 그는 시종 중 하나였다.
“지금 들어오고 계십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묵직하면서도 완벽한 박자감. 제대로 걸을 줄 알고, 제대로 호흡할 줄 아는 사람이 낼 수 있는 발소리.
“공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꿀꺽.
곳곳에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그 묵직한 발소리의 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들아! 속지 말아라. 그는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 아니라 모든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한 완벽한 무인이다.’
난 그리 말해 주고 싶었다.
“허허허허. 이 할아버지를 기다렸구먼.”
한없이 자상한 눈빛과 목소리로 아이들을 보며, 상석으로 가는 노인.
“앉아, 앉아. 편하게 보자고 했는데 또 쓸데없는 소리들을 했나 보구먼.”
그 목소리에 잔뜩 긴장한 아이들의 표정이 풀리고, 하나둘씩 자리에 앉는다.
서 있는 채로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건 나뿐이다.
“왜 앉지 않느냐?”
그런 날 보고 공작이 물었다.
“먼저 앉으셔야죠.”
내 대답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잽싸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껄껄껄. 지나친 예의다. 그리고 내 앉으라 말하지 않았느냐.”
베스타인 공작은 웃으며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됐지? 이제 모두 앉거라.”
모두들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건지도…….’
초절정고수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무림에서도 보기 힘든 초인.
지금의 내가 유역후라 해도 존중할 만한 그런 고수였다.
무림일통을 한 천황성의 성주였던 내가 무림에서 존중해 줬던 고수가 몇 명이나 있었던가?
기억이 맞다면 소림의 땡중, 곤륜의 노괴, 장백산의 발톱이라 불렸던 활잽이. 세상 통틀어 그 셋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뜻은.
‘내 나이 서른은 넘어야 겨뤄나 볼 수 있겠구나!’
가슴이 뛰었다.
이런 무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는 물론이고, 승부욕에 불을 댕겼다.
‘참아야지.’
로라스로서 유역후의 삶을 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공작을 목표로 한다면 절대 순탄치 못한 삶을 살거리는 생각이 들었다.
또 촌수를 따지기도 힘들지만 그는 어찌 됐든 같은 핏줄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다행이긴 하네.’
저런 노괴가 적이 아닌 한 핏줄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최소 개천지보 칠보는 가야 할 것이고…… 제대로 검을 나누려면 구보(九步)다.’
구보의 경지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성장 방식이라면 마흔은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경지.
“이 할아버지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 너희를 보니 식욕이 더 당기는구나. 함께하자꾸나.”
우리가 식사를 마쳤는지 모르는 것인가?
그는 시종을 불러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도 아이들이 식사를 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아이들마저도 말이다.
‘뭐, 괜히 나설 필요는 없겠지.’
거대한 식탁 위에 다시 요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것일까? 몇몇은 올라오는 요리 냄새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차려진 음식은 아까와 달랐다.
대부분 고기류였다.
“너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다. 이 할아버지가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지.”
베스타인 공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이 먼저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그걸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같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지만 제대로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친네, 심술맞기는.’
몰랐을 리 없다. 분명 배불리 먹은 걸 알고 준비한 것이다.
‘먹자!’
무슨 요리인지 모르지만, 저만한 지위에 있는 자가 빈말은 하지 않을 터.
선물이라고 할 만한 음식이 뭔지 먹어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고기의 맛은 확실히 여느 고기와는 달랐다.
닭고기 맛이 나면서도 더 기름진 느낌. 그리고…….
‘어라…… 이것 봐라?’
단전에서 퍼지는 따뜻함. 그리고 꿈틀거리는 기운.
‘영약이라도 섞었나?’
사양하지 않는다.
배가 터져도 이런 요리는 먹어 줘야 했다. 무엇보다 저 노친네의 의도가 궁금했다.
“먹어.”
깔짝거리고 있는 아란과 포플러에게 한마디 했다.
“배부른데…….”
“배 터지겠다. 더 안 들어가.”
이 꼬맹이들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 이런 고기는 먹어야 한다. 특히 절대 권력을 지닌 자가 준 선물이다.
‘아! 이런 의도인 건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험이 끝나지 않았구나! 이게 마지막 시험이야! 그것도 아주 개 같은 시험!’
슬쩍 베스타인 공작을 보았다.
쉴 새 없이 고기를 입에 넣고 우적거린다. 그의 앞에 놓인 접시. 저 체구에 소화할 만한 음식이 아니다.
입은 쉴 새 없이 먹고 있고, 눈은 부지런히 우리를 탐색하고 있다.
“배가 터져도 먹어. 안 넘어가면 물이라도 함께 마시면서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어!”
순간 너무 과하게 말했던 건가?
깨작거리던 아란과 포플러의 손이 멈췄다.
“끝까지 믿어. 고작 고기 한 덩어리에 너희의 꿈을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깟 것도 못하면서 어찌 이루려고?”
단호하게 다시 이야기해 줬다.
녀석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또 혼자 튀어 보이는 건 사절이다.
즐겁게 먹어야 할 시간에 긴장감이 흘렀다.
‘정말 대폭 수정이 필요하겠는데.’
적당히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공작을 보면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고, 하루에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뀔 정도로 변덕스러운 것이 절대권력자다.
어찌 아냐고?
내가 그랬으니까.
‘고역이었겠군.’
유역후가 공작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열 중에 한 명은 너무 눈에 띄어. 기왕이면 다른 녀석들도 눈치챘으면 좋겠는데.’
있었다. 나 말고 공작의 의도를 눈치챈 이가.
린델.
그는 정말 전투적으로 고기를 먹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억지로 집어넣은 음식이 식도를 막고 있는 듯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에서는 눈물까지 보인다.
하지만 그는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다 먹지 못하더라도 공작이 저런 그를 본다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해 주리라.
내 단호한 경고 때문인지 아란과 포플러도 어느새 먹는 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다.
‘열의 넷이라…….’
이 정도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으리라.
‘그나저나 이거 매일 먹을 수 없나.’
무슨 고기인지 정말 궁금하다.
나도 체내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을 먹기 시작했다.
* * *
‘으음!’
파라일 린 베스타인 공작은 미소 지었다.
자신이 주는 것도 받아먹지 못하는 놈들에게는 관심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공작의 시선이 한 아이에게 쏠렸다.
‘에듀의 아들이라…….’
반가움과 미움이 교차했다.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에듀는 그가 애지중지했던 핏줄이었다.
순간 공작의 뺨이 부르르 떨렸다.
‘멍청한 놈!’
에듀만 생각하면 남는 건 애증뿐이다.
그런 공작 앞에 그의 아들이 나타났다.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잘도 먹는구나.’
다른 아이들은 억지로 먹는데 로라스는 그런 게 없다.
배가 고파서, 또 너무 맛있어서 먹는다는 듯이 보는 이가 배부를 정도로 잘 먹고 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지만 아까 들었다. 억지로라도 먹으라는 말.
그걸 강요했다는 건, 저 어린 녀석이 자신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뜻 아닌가?
총명한 놈이다.
보고서에서도 그랬다.
눈여겨봐야 할 아이 둘. 그게 로라스와 린델.
다른 게 있다면 로라스는 수하 모두가 탐을 내고 있다는 점.
‘재능은 타고난다는 건가?’
에듀도 그랬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 아꼈던 것이다.
‘그런 것까지 제 아비를 닮지는 않았겠지?’
공작은 그리 생각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은 것이다.
타악.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억지로 먹는 게 곤욕이었는데 공작이 식사를 마치니 자신들도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어느새 식탁에서 계속 음식을 먹는 건 로라스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주변에 있던 시종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게 생애 마지막 식사라도 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먹는 모습에 사람들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신기한 건 공작은 포크를 내려놓았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로라스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공작의 입이 열렸다.
“그리 맛있더냐?”
로라스를 향한 물음이었다.
“맛있습니다. 언제 이런 요리를 다시 먹을 수 있을지 모를 만큼요.”
그리고 공작을 향한 대답.
“껄껄껄. 네가 제대로 먹을 줄 아는구나.”
“이런 요리를 하는 분이 저희 영지에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리사가 있어도 네가 있는 곳에서는 먹기 힘들 것이다.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하핫!”
공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게지. 내 식탁이 아니고서야 어찌 특급 마정석을 향신료로 한 록크 고기를 맛볼 수가 있겠느냐?”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자신이 남긴 접시를 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요리. 하지만 그 재료는 절대 평범치 않았다.
‘록크라면…… 특급 몬스터로, 구경조차 힘들고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신조 아닌가? 게다가 향신료로 특급 마정석을 사용했다고?’
록크 고기의 효능은 모르나, 특급 마정석의 효과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같은 부피의 금보다 수십 배 비싼 것이 특급 마정석.
마정석은 단순하게 마법의 재료가 아니다. 모든 것을 활성화시키는 그야말로 마법의 돌이다.
마법사에게는 마나를, 무인에게는 포스를. 제작자들에게는 꿈에 그리는 재료.
가끔 하급 마정석을 섭취했다는 말은 듣지만, 그 누구도 특급 마정석을 그리하지는 못했다.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자신의 무기에, 마법에 조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게 특급 마정석이니 말이다.
그런데 눈앞의 요리에 그것이 섞였다면…….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로라스가 자신의 요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순간, 시종들이 와서 음식을 싹 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이들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