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7)
그 믿음을 확인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려 준 대로 쓰고는 나왔는데.”
아란이 말했고.
“아! 난 몰라. 떨어지면 내가 책임져.”
베르체가 날 흘겨보며 말한다.
“웃기는 소리 하네. 로라스가 왜 책임지냐? 로라스가 아니었으면 진작 떨어졌을 게.”
방에 같이 있던 아이가 톡 쏘며 말했다.
“일단 널 믿고 썼으니까 이제 물어봐도 될까? 그게 무슨 뜻인 거야?”
반반이라 생각했는데, 포플러 이놈도 내 말에 믿음을 가진 듯했다.
총 여덟 명.
방에 있는 아이들, 포플러와 그를 추종하는 아이 두 명.
내가 나온 지 몇 분 안 돼 홀에서 나온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답이 아니라고 해도 실망하지는 말고. 솔직히 이번 시험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거니까.”
내 대답에 아란이 물었다.
“쓰여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미로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니까. 하늘에서 미로를 내려다보면 그런 모습일 거야.”
설명이 부족한 듯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알려 줬나 보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미로에 쓰여 있었다는 거지? 베스타인(Vestain)이란 글자가 말이야.”
포플러가 물었고, 난 아예 바닥에 그림을 그려 주기 시작했다.
축약해서 그려 줬으나 미로가 워낙 큰 탓에 시간이 꽤 걸렸다.
여하간 완성하고 애들에게 물었다.
“이게 미로였다. 보여?”
“어…….”
“이렇게 보니까…….”
애들이 한마디씩 했고, 난 말했다.
“우리 시야에는 나무와 수풀로 된 벽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나무와 수풀의 종류가 달라. 그리고 그 두께, 그러니까 폭도 달랐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이리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시험.
안은 모두 똑같은 길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길이와 폭이 다 달랐다. 그리고 먹을 것과 도구들이 놓여 있던 공터들.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이렇게 그려 보니 알 수 있었다.
Vestain.
미로는 바로 그걸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걸 어떻게 알았어?”
“이게 가능해?”
“미로가 이랬던 게 확실해?”
보고도 믿지 못한다. 당연한 거였다.
‘이틀이나 걸렸으니까.’
아란이 충격을 받은 듯 내 옷을 잡고 묻는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이걸 대답해 주려면 한도 끝도 없기에 대답은 간단했다.
“훈련하면 알아. 그것도 많은 훈련.”
이 대답에 아이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여하간 혹시 나중에 따로 묻더라도 당황하지 마. 이건 엄연하게 사실이니까.”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곤란하군요.”
아란데일은 아이들의 답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해답을 제출한 아이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의 예상도 하지 않았다.
‘비슷하게, 의도를 조금이라도 눈치챘으면 족하다 생각했거늘.’
정답자가 무려 아홉 명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알려 줬겠지.’
하지만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났고, 그 천재가 답을 유포했을 거라는 결론은 지극히 타당했다.
“가장 먼저 제출한 아이가 누굽니까?”
아란데일의 물음에 레빙스턴이 대답했다.
“로라스라는 아이입니다.”
“역시!”
그리고 아란데일이 뭐라 하기 전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에르페유.
아이언 기사단의 단장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권신이라 불리는 사내.
“그놈 실력만큼이나 머리가 좋구나.”
큰 목소리에 아란데일이 그에게 말했다.
“에르페유 경, 이 시험은 머리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만…….”
“그래도 멍청하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지. 과연 내 제자답다!”
순간 모인 이들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로라스가 언제부터 아니, 왜? 당신의 제자지요?”
헤르메스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에르페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될 거니까. 그 녀석 내가 힘을 쓰기도 전에 날 쳐다봤단 말이지. 기운 자체를 읽을 줄 아는 아이. 당연히 내가 거둬야지.”
당시 시험에서 아이들에게 시험한 건 포스와 마나, 그리고 살기.
그중에서 포스를 담당한 건 에르페유였고, 그는 곧바로 로라스를 자신의 제자로 점찍었다.
누가 침 바르기 전에 자신의 제자로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라 확정한 헤르메스는 그 선언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로라스는 마나를 타고난 아이.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아이가 허접한 기운 하나 읽지 못할까? 그 아이는 내 거예요.”
“개소리! 남자애야. 당연히 내가 가르쳐야지.”
“개소리? 잡소리를 하시네요.”
“뭐라? 잡소리? 여자!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누가 누굴 봐주는 건지. 항마력도 없어서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맞아 본 적이 없으니 넘을 선, 못 넘을 선 구분을 못 하는구먼.”
순간 헤르메스가 지팡이를 내밀었고, 동시에 에르페유는 주먹을 내밀었다.
“그만!”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아란데일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두 분께서 착각하고 계시는데, 아이들의 처우는 주군께서 결정하십니다. 지금 싸워 봤자 주군의 화를 살 뿐, 이득이 없을 테니 그쯤 하시지요.”
단호한 아란데일의 말에 헤르메스는 물론 에르페유도 주먹을 거뒀다.
하지만 각자 한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 멍청한 사람들이 운이 좋다더니. 딱 그 짝이네.”
“한 대만 맞아 보면 그 입이 쑥 들어갈 텐데. 아쉽군.”
그 말에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다투려 할 때, 레빙스턴이 엄중하게 말했다.
“여하간 결과는 이리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군께 보이기 전까지 경거망동들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행사는 제 책임하에 있습니다. 뭔가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 말고! 알아서 다른 곳에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평상시 목소리를 잘 높이지 않는 레빙스턴이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명분까지 그가 가졌으니,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레빙스턴이 아란데일을 보며 말했다.
“예상보다 많은 숫자지만 모두 합격시키려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란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답을 써냈으니까요. 어차피 나중에 교육받을 때 능력이 되지 않으면 버텨 내질 못할 테니까요.”
“그럼 그렇게 결정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레빙스턴은 그리 말하며 경고하듯이 얘기했다.
“시험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접촉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 *
모든 시험이 끝났고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예상대로 합격자의 수는 총 열 명.
보통 두 명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거라는 시험에서, 열 명의 합격자라는 건 대단한 숫자라고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합격하지 못한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예전에 떠난 아이들보다는 나았다.
상위 합격자이기에 저마다 기회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무슨 교육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어수선해진 아이들을 보며 교관이 말했다.
“내일 너희는 공작님을 뵙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간단한 교육을 받을 것이다.”
린델이 물었다.
“무슨 교육입니까?”
“간단한 예절 교육이다.”
교관은 분명 그리 대답했는데 말이다.
‘간단한 교육은 쥐뿔…….’
어떻게 줄을 서고, 공작이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그야말로 허례허식의 극치를 보여 주는 교육.
여기 모인 아이들 모두 귀족이다.
영지 하나 없는 몰락 귀족도 있으나,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은 갖추고 있단 말이다.
하나 그 모든 소양은 그들의 교육에 비하면 자유분방한 게 분명했다.
여하간 눈에 띌 생각은 없기에 지시한 대로 충실히 따랐다.
‘어차피 이제 집으로 갈 생각이고.’
원래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중간쯤 가려던 게, 본의 아니게 여기까지 와 버렸다.
‘열 명 중 한 명.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튀어 보이지는 않으니까.’
여기서 가장 튀는 아이는 린델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 누구도 그가 미로를 뚫고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터. 여태 막내 제자보다 머리 좋은 녀석은 못 봤지만, 저 녀석도 그에 준하는 지식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르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다 좋은데 밥은 먹이고 해야 할 거 아니야? 배고픈데.’
동작 자체는 별로 힘들 것도 없지만 귀찮음, 짜증을 억누르니 심력이 소비되는 느낌이다.
‘단것이 먹고 싶구먼.’
아이처럼 정말 단것이 그리웠다.
“공자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공작님을 뵐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 예절 교육―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자세는 어찌해야 하는지도 교육이라 부를 수 있다면―을 담당한 부인의 종료 선언에 아이들은 꼿꼿한 자세를 풀었다.
“후아! 몸에 쥐나는 줄 알았다.”
“이거 대체 왜 해야 하는 거야?”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도 공작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두 눈을 빛내며 크게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덜컥.
그때 방 안의 문이 열리며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시종이 와서 말했다.
“시장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녁을 준비해 뒀으니 이리로.”
‘이제야 밥을 주는 건가. 참 빨리도 준다.’
구시렁대면서도 배를 채울 생각을 하니 기분은 좋아진다. 다른 아이들도 말은 안 했지만, 잽싸게 시종의 뒤를 따라붙는 걸 보면 말이다.
“우오!”
긴 타원형의 거대한 식탁. 그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식탁 위에는 그야말로 없는 음식이 없었다.
네발 달린 동물, 날개 있는 동물, 심지어는 이 내륙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짠내 나는 요리까지.
말 그대로 산해진미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좀 부티 나는 아이들도 특정한 음식을 신기하게 보는 걸 보니, 귀족들이라 해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듯했다.
“공작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기를 하시지요. 만나 뵐 때 배에서 소리라도 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페컴이란 집사가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진즉 주고 그런 말을 하든가.’
생색내는 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으음!”
음식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런 음식들은 처음이다. 영지 내에서도 잘 먹었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고기와 빵뿐이다.
영지 사정에 그렇게 먹는 것도 나름 사치라 생각했는데, 오늘 이 식탁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호수와 우물의 차이다.
‘뭔 이런 생각까지.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요리를 맛보여 줄 생각을 해야지.’
머리로 반성을 하는 사이에도 두 손과 입은 쉼 없이 움직였다.
정말 맛있다.
입에서 녹는다는 구라고, 기름기가 혀와 입 전체를 막으로 감싸는 느낌. 거기에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의 충만감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도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입이 짧은 여아 베르체마저 세 접시 이상 덜어 먹은 걸 보면 말이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고, 디저트로 차와 다과가 나왔다.
이것도 보통 차가 아니고, 보통 다과가 아니었다.
보통 단맛이 도는 차를 내놓겠지만, 밥 먹은 걸 감안했는지 기분 나쁘지 않은 떫은맛이 입 안에 머문다.
떫은맛이 과하다 싶을 때 은은한 달짝지근한 맛이 도는 이름 모를 과일 한 조각을 먹으면 그만.
“곧 공작님께서 오십니다. 이곳으로 직접 오신다고 하니 모두 준비해 주시지요.”
페컴의 말에 아이들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기 시작했고, 그사이 시종들이 식탁을 깨끗이 치웠다.
뚜벅뚜벅.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