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6)
‘됐나?’
안력 수련이 덜 되어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향만큼은 정확할 테니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다.
그 기이한 느낌이 사라진 걸 보면 분명 그럴 것이다.
‘대정심을 여기서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대정심은 명상법의 일종이다.
유역후 시절 그의 적은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배교, 혈교라 칭하는 사이한 놈들.
무공보다는 괴이한 사술을 쓰는 그들을 상대하려면 무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물론 자신은 압도적인 무공으로 놈들을 눌러 버릴 수 있었으나, 그래도 귀찮은 건 사실.
그때 배운 것이 대정심이다.
사이한 것은 보지 않고, 괴이한 소리는 듣지 않고, 더러운 것은 입에 담지 않는 법.
소림의 반야경, 무당의 청정심법과 함께 무림 삼대명상법인 대정심.
‘통하네.’
그럴 리는 없다 생각했지만, 워낙 다른 세계라 약간 걱정은 됐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마나라는 힘에 대정심이 통한다면 이후, 이런 공격에 관한 방어는 걱정할 필요 없을 테니까.
“로라스, 뭐 한 거야?”
다리 위로 다시 올라오는 날 보며 아란이 묻는다.
“집중해! 여기를 통과하고 싶으면. 네가 말했잖아. 이상하다고.”
입을 다문 아란의 표정이 굳는다.
이제야 이 시험이 어떤 건지 눈치챈 듯했다. 하긴 두 번째 이야기해 주는 거니 저 정도는 해 줘야겠지.
다시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느껴지는 기운도 없기에 행공을 하니 시험은 금방 끝이 났다.
그다음 날 아침.
“합격자를 발표하겠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레빙스턴이 입을 열었다.
“로라스.”
내 이름이 가장 처음으로 불리자 애들이 놀라고 의아해했다.
하긴 어제 다리에서 내려와 버렸으니 당연한 의문일 터.
그래도 몇몇 아이들은 중반 이후부터 시험의 의도를 눈치챈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합격자는 계속 발표되었고.
“왜 제가 불합격입니까? 어제 한 번도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좀 흔들리긴 했어도 제가 가장 많이 움직였습니다.”
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빙스턴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합격자 발표만 하고 돌아갈 뿐이었다.
“대체 내가 왜?”
탈락한 아이들은 울분을 터트리고.
“뭘 잘못한 거야? 아는 사람 있어?”
울면서 이유를 찾는 애들도 있었다.
포플러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이 시험 혹시……?”
녀석은 통과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통과를 했는지 이제야 짐작하는 듯했다.
“너는 앞으로도 걱정할 거 없겠다.”
아란 다음으로 빨리 반응한 게 포플러였다. 기이한 기운에서는 밀렸지만 포스와 살기를 눈치챈 건 내 다음.
내가 없었다면 이 녀석이 1등이었을 거다.
“맞아, 내 생각?”
다시 묻는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줬다.
아침부터 애들이 저러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거 언제 끝나나. 이제 서른 명도 안 남았는데 슬슬 떨어져도 되려나?’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해 주는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요리를 먹고 싶었고, 목표가 확고한 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직 어린애들이 시험 때문에 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다.’
이제야 아버지가 왜 열심히 할 필요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 * *
이제 떨어져도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다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문제는.
‘왜 떨어트리지 않지?’
그 감응력 시험 이후 치른 시험은 두 개.
암흑 속의 던전을 빠져나오는 시험은 일부러 아이들을 다 내보낸 후에 나왔고, 검의 바람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내용은 찌른 곳 또 찌르고, 벤 곳을 또 베어야 하는 시험도 정확하게 어긋나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험이 시작됐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다 떨어트리려는 건가?”
아이들이 당혹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시험은 합격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그 미로에 다시 진입하는 거였으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정말 다 떨어트릴 작정인가? 입맛대로 고르려고?’
그럴 건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로라스.”
‘아! 이 녀석이 있었지.’
날 부른 애는 유일하게 자력으로 빠져나온 린델이라는 꼬맹이였다.
“정식으로 인사하자. 난 린델.”
“새삼스럽게 인사는 무슨. 로라스다.”
“혹시 이 시험에서 생각하는 게 있어?”
“모르지. 그런데 너는 저번에 이곳을 빠져나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이야기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빈말이 아니다. 이 꼬맹이는 확실히 똑똑하다.
린델이 말했다.
“너만 할까. 그리고 감사 인사가 늦었다. 그때 도움은 잊지 않겠다.”
“무슨 도움?”
“다리 건널 때.”
“아! 그거야, 뭐…….”
감응력 테스트 때 막내 생각이 나서 한마디 해 준 걸,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그냥 한 이야기니 도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
녀석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리 보여도 나도 무가의 자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다.”
손을 홱 저으며 됐다는 시늉을 했다.
‘어린 녀석에게 은혜 어쩌고저쩌고 들으면 내가 민망하지.’
여하간 모두 끝났다는 생각과 더불어 크게 기지개를 폈다. 꽤 재미있는 시험이었다.
“원한다면 여기서 나가는 걸 도와줄게.”
“응?”
“난 나가는 길을 알아.”
나름 큰 선심을 쓴 걸 텐데. 더 이상은 귀찮다.
“괜찮아. 그냥 내 힘으로 한번 해 보지, 뭐.”
“정말 도와주고 싶어.”
기특한 녀석이다. 하긴 어린애들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보면 알은체나 해. 또 아냐. 내가 정말 도움받을 일이 생길지도.”
그냥 한 말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천재들은 나이를 생각하고 상대하면 안 된다.
‘막내가 혈교 잡놈들을 작살 낼 때 고작 열여섯이었는데.’
린델이 막내만큼 할까마는, 최소한 그 비슷한 싹수는 보이지 않는가?
린델은 아쉬운 듯이 말했다.
“꼭 통과하길 바랄게.”
“오냐. 방심하다 길 잃지 말고.”
린델은 쭈뼛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고.
“로라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아란이 다가오며 말했다.
“린델이잖아. 무슨 이야기 했어?”
아란이 린델을 모를 리 없다. 그 사실을 알려 준 게 이 녀석이니까.
“무슨 이야기 했으면?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 능력도 안 되는데 통과돼도 문제야. 나중 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아란을 보며 한마디 더해 줬다.
“마지막 시험까지 올라온 것도 훌륭하잖아. 과욕은 늘 화를 부른다. 잘 생각해.”
이제 열몇 살 꼬맹이에게 먹힐 말은 아니었으나, 꼭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말이다.
나무를 등받이 삼아 기댔다.
내 시험은 이걸로 끝났다.
그사이 애들은 나름 머리를 쓰고, 토론도 하면서 방법을 찾았다.
‘고약하군.’
애쓰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닌 한, 아무 힌트 없이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이 되는 요구를 해야지.’
이 시험의 출제자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공간지각능력.
그것도 어마어마한 재능을 요구하고 있었다.
작은 미로라면 모를까? 이 정도 크기에서 그걸 알아내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린델 같은 아이는 천재적인 머리로, 또는 의도와는 달리 이 미로를 빠져나갔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 어떤 방법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기에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렇게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 * *
다음 날 아침.
집합 장소가 달라졌다.
커다란 홀에 모였고, 지정된 장소에 아이들이 앉았다. 그리고 흰 종이와 펜이 주어졌다.
레빙스턴이 소리쳤다.
“어제 단 한 사람만이 미로를 통과했다. 이번에도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
“…….”
그는 아이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시험에서 느낀 모든 걸 써라. 이번 시험은 그것이다.”
“무엇에 대해 써야 합니까?”
포플러가 손을 번쩍 들며 하는 말에 레빙스턴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느낀 모든 걸 쓰라고 했다. 교관들이 검토 후 합격자를 발표하겠다.”
“너무 모호합니다. 기준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질문은 너희의 권한이 아니다. 지시한 것을 따르는 것. 애초에 너희는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다.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도록.”
불합격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건,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한 명분이다.
‘역시 이런 식으로 합격자를 가리려 했군.’
예측은 했다.
미로가 뭘 나타내는지, 그걸 어느 정도나 파악했는지 알려면 말로 하는 것보다 손으로 쓰는 것이 더 정확할 테니까.
‘느낀 걸 쓰라니. 말도 안 되는 난이도라는 건 알았다는 소리고. 비슷한 거라도 눈치채길 바라는 건가?’
그리 생각할 때 레빙스턴이 소리쳤다.
“모두 작성한 후 교관에게 제출하고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애들은 일제히 종이의 공백을 메워 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펜을 들었고, 움직였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끝났습니다.”
교관이 다가오며 말했다.
“로라스, 시험은 장난이 아니다.”
“장난처럼 보이십니까?”
반문에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교관.
“나가도 좋다.”
교관의 한마디에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혔다.
‘믿는 건 너희의 몫이니까.’
어제 애들에게 아무 말 없이 답만 알려 줬다.
황당하다는 표정과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름 나만의 시험이다.
날 신뢰하지 않는 꼬맹이들을 도와줄 생각은 없다.
믿으면 합격이고, 불신하면 탈락이다.
‘최소 몇 명은 더 통과하겠지.’
그림자처럼 내게 따라붙은 아란과 베르체. 그리고 어쩌면 포플러도 의심 없이 내가 알려 준 답을 적을 것이다.
‘몇 놈이나 날 믿을까?’
그걸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