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
가볍게 생각했던 시그탑은 기분이 상했다.
‘진심인 건가, 이게 내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목검이든 진검이든 상관없었다.
‘설마 내가 궁지에 몰려 진심으로 상대할 리는 없지 않은가!’
스르르릉.
시그탑의 검집에서 검이 뽑혔다. 잘 벼린 검날에 순간 눈이 부신 듯했다.
‘역시 이런 걸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건가?’
보통 아이라면 이런 검날을 눈앞에서 보면 위축되기 마련. 하지만 로라스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시그탑은 검 끝을 그에게 향하게 하고는 포스를 운용했다.
시그탑은 단순하게 작은 시골 마을의 기사가 아니었다. 에듀 남작의 인품에 반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곁에 있으나, 나이 열일곱에 기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실력 있는 기사.
그 이후 이 영지에서 20년 가까이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았으니, 지금 그의 경지는 웬만한 기사단의 단장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당연히 포스도 범상치 않은 경지.
반쯤은 장난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일개 소년이 감당할 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공자, 하늘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드리지요.’
시그탑은 태연스러운 로라스가 놀란 모습이 보고 싶었고, 또 그럴 거란 확신을 했다. 하지만.
“시그탑 경. 제가 원하는 대련은 이런 게 아닙니다.”
“……!”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하는 로라스를 보고 시그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경, 그건 저와 경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포스를 더 끌어올리는 순간 로라스가 다시 하는 말에 시그탑은 순간 맥이 빠졌다.
“공자, 혹시…….”
그리고 뭔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주군에게 뭔가 전수받았다면 베스타인가의 포스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기사들의 포스는 모두 같은 게 아니다. 가문마다 각기 다른 기운이 있다.
하지만 로라스에게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기운을 상쇄시킬 정도의 실력자라면 반드시 느껴져야 할 기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면 무속성. 역사상 그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사람은 대부분…….’
시그탑은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다른 속성을 뚜렷이 보였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분명 무속성이었고, 그런 속성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마스터 오브 마스터. 속칭 초월자라 불린 무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죽었다 깨도 말이 되지 않았기에, 시그탑은 다른 하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설마 마성의 인을 받은 것인가?’
그때 로라스가 말했다.
“시그탑 경, 지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
“그런 거 아닙니다. 다만 공력, 아니 포스를 일으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로라스는 옅은 미소까지 지은 후 탓하듯 말했다.
“그래서 경의 의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불필요한 의문은 의혹과 의심이 될 것이고, 그것들은 경과 저의 관계를 좋지 못한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 것입니다.”
시그탑은 이게 아홉살의 소년이 할 수 있는 말인지 의심하며 말했다.
“공자, 이 문제는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대련을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 몸에 맞춰서 말입니다.”
로라스는 봉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검을 마주해 주세요.”
시그탑은 의혹을 가득 품었으나 결국 로라스의 말대로 봉 끝에 자신의 검을 갖다 대었다.
“경은 이제 검을 휘둘러 제 봉을 떼어 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이제 제가 처음 대련을 하는 관계로 속도는 서서히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로라스의 말에 시그탑은 생각했다.
‘이 봉을 떼어 내라고? 이게 대련이라고?’
로라스가 말했다.
“이 대련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시그탑 경의 실력이라면 금세 알아차리실 터. 시작하시지요.”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의 대련. 하지만 시그탑은 검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스르릉.
시그탑이 검을 움직이고, 봉이 그 뒤를 따르면서 가벼운 마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서서히 올려 달라고 했지?’
시그탑은 일단 별생각 없이 좌우로 검을 휘두르며 검을 떼어 놓으려 했다.
스르르르르르릉.
계속되는 가벼운 마찰음이 들리며 시그탑의 검은 로라스의 봉을 떼어 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움직임을 연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그탑은 이 대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서로가 서로의 무기를 맞닿은 채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이건 보통 집중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거기에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거리를 끊임없이 파악하고, 힘의 방향은 물론이고 그 크기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떼어 놓으려는 자가, 붙으려는 자보다 훨씬 유리한 대련. 아니, 애초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수련법이었다.
“몸 풀기는 끝났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여하간 이 대련의 목적을 깨달은 시그탑이 그리 외쳤고, 로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만한 기사가 영지에 있고,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건 아마 큰 행운일 터.’
시그탑의 생각대로 이 대련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황성에서도 이건 절정의 벽을 앞둔 고수들에게 권유하던 방법이었으니까. 그마저도 그냥 그 감을 익히기 위해서 권유했을 뿐, 이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건 절정 이상의 고수들만 가능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도를 해 주고 싶지만.’
깨달음의 경지는 저 높은 곳에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제약이 많았다.
로라스는 어느새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그탑을 보며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이만한 페이스메이커도 없다. 나이가 들어 경지에 이른 후에 가르치기 시작하면 제법 쓸 만할 테지!’
로라스는 이 대륙에서 기사란 자들과 검사, 격투가라 불리는 무인들의 수준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역사서에 나온 내용들로 그 위력을 짐작할 뿐이었고, 지금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사인 시그탑을 기준으로 계획을 잡고 있었다.
‘절정에 이른 무인. 나중에 이만한 수준의 무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게 되겠지.’
여하간 시그탑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사실 그의 보법과 검의 궤적은 지금의 로라스가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그탑 본인이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새로운 대련 방법의 효능과 거기에 따른 효율을 알아보기 위해 정직한 움직임을 보였다.
덕분에 로라스는 10여 분 이상 봉을 그의 검에 붙여 두는 데 성공했다.
“훌륭하십니다.”
이렇다 할 기술은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버틴 것만으로도 시그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잠시만 쉬지요.”
전신에 땀이 흥건한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후우우우!”
안정된 호흡으로 빠르게 심장의 박동을 늦추는 로라스를 보며, 시그탑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눈앞의 소년을 한 명의 무인으로 생각한 그였다.
“이제 반대로 하지요.”
호흡을 가다듬은 로라스의 말에 시그탑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검을 들어 내밀었다.
스릉.
가벼운 철음과 함께 검과 봉이 다시 부딪쳤다.
“시작합니다.”
로라스는 짧게 말하고는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시그탑은 로라스가 또 무슨 신기를 보여 줄지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기대한 만큼 놀라운 걸 보기 시작했다.
시그탑은 단순히 로라스의 봉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힘을 주어 막고 튕겨 내며 봉의 움직임을 검의 거리 안에 가두려 했다.
스르르르르릉.
하지만 그럴 때마다 봉은 작고 큰 원을 그리며,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거리를 벗어났다.
그 움직임에 시그탑은 깨닫는 게 있었다.
‘끊임없는 원이라. 이게 말이 쉽지.’
그 정도 되는 기사는 어떤 순간에도 원하는 검초를 펼칠 수 있다. 그 경지는 그야말로 몸이 기억할 정도의 수련을 통해서나 가능한 법.
그렇게 정해진 검로를 따라가는 데 익숙한 시그탑은 로라스와의 대련에서 수많은 검의 궤적을 보았다.
자신이 평생 익힌 검로를 벗어나지 않음에도 수많은 선택지를 보이는 그런 움직임.
그건 시그탑에게 처음 맛보는 무한한 자유와도 같았다.
타아앙!
어느 순간 검이 로라스의 철봉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시그탑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듯 계속해서 검을 움직여 나갔다.
초점은 정확하지만 마치 멍해 보이는 그의 눈.
시그탑이 지금 무슨 상태에 이르렀는지 깨달은 로라스는 봉을 거두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깨달음이 빠르군. 역시 재능이 있어.’
그의 움직임을 계속 확인하며 로라스는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그탑이 알지 모르나 사실 이 수련은 거리감과 힘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과 더불어 한 가지 효능이 더 있다.
‘분명 훌륭한 몸이나 따로 내근(內筋)을 단련시켜 본 적은 없었겠지.’
그나마 수많은 실전을 거쳤으니 남들보다는 발달되었을 것이나 그건 한계가 있을 터.
내근이란 건 내공을 운기조식(運氣調息―몸 안의 기를 돌리고 호흡을 조절한다는 뜻으로 내력을 증가시키는 양생법.)으로 쌓는 것처럼 외공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유역후가 창안한 외가무공법이라 그렇다.
간단히 말하면 근육 내부를 단련시켜 내공을 이용할 때 효율을 높이기 위한 무공이다.
여하간 로라스는 시그탑과 함께, 자신의 무공의 형을 잡음과 동시에 이 내근을 단련시킬 생각이었다.
‘시그탑에게 알려 주면 자연스레 다른 기사들에게도 전파될 테지. 다른 기사들도 이 훈련을 할 만한 역량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몇 가지 다른 문제들도 떠올랐지만 로라스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우선.’
로라스는 다시 봉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뭔가 크게 깨달은 게 있나 보네.’
그리고 여전히 춤추듯 검을 휘두르고 있는 시그탑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 *
열 살이 되었다.
그간 많은 발전이 있었으나 가장 좋은 건 역시 키가 컸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세 치…… 9센티나 말이다.
다만 키가 큰 만큼 살이 붙지 않은 건 아쉽긴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훈련으로 내근은 확실히 키웠으니 속도가 더딘 건 절대 아니라는 것에 위로를 삼았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만족스러운 날들이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충실감.
전생에 나는 목적을 잃고 결국 스스로 이게 ‘삶’인가 하고 의심한 걸로 기억한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로라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시간이…….’
오후 2시. 티타임이다.
반시간 단위로 계획된 내 하루에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건 이 시간뿐이었다.
“네. 잠시만요.”
아이답게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화답했다.
차를 마시고, 같이 과일을 먹었다.
내게는 그냥 쉬는 시간이지만 어머니는 이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니 내게도 의미 있었다.
“어머니, 다시 가 봐야 할 듯싶습니다.”
“조금만 더 쉬지. 어제도 늦게까지 책을 읽은 걸로 알고 있는데.”
저 아쉬운 얼굴에 발목이 잡히면 그날 밤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빠져나와야 했다.
“충분히 쉰 듯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응?”
“부탁드린 책은 아직인가요?”
“조금만 기다려라. 다음 주에 들어올 상단이 가지고 온다 하니.”
“네, 알겠습니다.”
뻔히 아는 사실을 물은 건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고, 그 목적을 달성하여 빠져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마을을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마을의 아이들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귀찮긴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다.
별 소음 없이 나를 뒤따라 달릴 뿐이라 방해되지 않았고, 결국 내가 돌볼 사람들이란 자각 때문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별게 없는데.’
평상시 티타임에서 쿠키나 비스킷이 나오면 챙겨서 아이들에게 주곤 했는데, 오늘은 과일이 나왔기에 녀석들에게 챙겨 줄 것이 없었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주니 녀석들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살짝 스쳤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따로 챙겨야겠군.’
과자 한 조각도 나눠 먹는 애들이었고, 그것을 볼 때마다 즐거웠음을 순간 깨달았다.
마치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람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항상 예외란 게 있으나,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노인에게는 욕망에 관해 절실함이 없다. 마치 다 이뤄 본 것처럼 느긋함만 있을 뿐.
‘좀 악착같아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든 과하면 좋지 않다. 유역후가 했던 후회를 나까지 할 수는 없다.
‘적당히! 좋잖아.’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뿌우웅! 뿌우웅!
망루에서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보통 저 나팔 소리는 몬스터들이 보일 때, 또는 어떤 집단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급히 마을 입구로 달려가니, 사내들이 이미 무기를 쥐고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버지와 기사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드리프의 외침에 망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가문의 깃발입니다.”
다행히 마을에 다가온 건 몬스터들도 아니고, 마적단들도 아니었다.
열린 마을 문 밖으로 커다란 깃발의 문양이 먼저 보였다.
날개 달린 사자.
내게도 익숙한 문양이었다. 지금도 저택 거실 중앙에 걸려 있는 문양이었으니까.
저 문양은 오베른 제국 황가 다음가는, 아니 실제로는 황가 이상의 권력을 상징하는 베스타인 가문의 문장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