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
싸우고 또 싸웠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싸웠다.
‘왜 그토록 싸우고 또 싸웠던 걸까?’
오랜 싸움 탓인가?
왜 이런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탓에 나도 지치기 시작했다.
몸이 지친 건 아니다.
단순히 지겨울 정도로 싸워서 지치기엔 난 너무나도 강했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이란 별호도 날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날 표현하려면 천하제일 앞에 고금(古今)이란 수식어가 하나 더 붙어 줘야 했다.
내가 지친 건 마음이었다.
밥 먹고 싸우고, 똥 싸고 싸우고, 자다 깨서 싸우고…….
이게 과연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것일까?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 빌어먹을 걸 시작하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아니, 그동안 그리 보내 왔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반드시 끝을 봐야 했다.
20년.
이런 고민을 시작한 후, 다시 그만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난 해냈다.
무림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무림일통을 이뤄 냈다.
그뿐인가?
나의 세력은 두 개 나라의 국력을 합친 것보다 커, 세상 여덟 개 나라의 왕들이 내 눈치를 보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건 곧 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는 소리다.
그런데 말이다…….
왜 이리 허무한지 모르겠다.
분명 목적을 이뤘는데!
아무도 넘보지 못할 힘을 갖게 되었는데!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내 멍청함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내 탓이다.
목적에 사로잡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무조건 직진이었고, 앞을 막는 건 이유를 불문하고 거둬 냈으니까.
오랜 세월 그리했기에 이리된 것이다. 또한!
개천지보(開天之步).
고금천하제일이란 별호를 갖게 한 내 무공의 근원인 심법.
정종 중의 정종인 심법이지만 조급함이 날 이리 만들었다.
기어야 할 때 걸었고, 걸어야 할 때 뛰었고, 뛰어야 할 때는 날았다.
그 탓에 부작용이 생겼고, 또 그 탓에 흉포한 성격이 되어 결국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이걸 깨달은 것 자체가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난 많이 망가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신이 붕괴되어 고금천하제일이 아닌 노망난 늙은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나와 만날 수 있는 건 믿음직하고, 자식처럼 내 옆에 붙어 있는 네 명의 제자들뿐이었다.
내 제자들?
훌륭하다.
광폭하게 변해 버린 내가 무림일통을 할 수 있었던 건 이 녀석들의 도움이 컸다.
장제자인 구봉이는 착한 놈이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고아인 녀석이 불쌍해서 데리고 다니다가 제자로 삼은 녀석이었다.
둘째 세진은 단순한 놈이었다.
아마 내 유일한 친구였던 장가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 빌어먹을 장가 놈이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리 광폭하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과한 행동을 할 때마다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리던 장가 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셋째 곽아는 여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가 왜 내 제자가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곽아는 예쁘다.
천하제일미는 좀 과하고, 그래도 한 성의 제일미 정도는 된다.
여자라서 그런지 다른 녀석들이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을 곽아는 참 세심하게 챙겼다.
넷째이자 우리 막내. 악군이는 정말 똑똑한 녀석이다.
무림일통을 이리 빨리할 수 있었던 것도 대부분 이 녀석 머리에서 나온 계책 덕분이었다.
어제 녀석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사부, 우리 천하일통도 해 볼까요? 사부가 황제가 되시고, 대사형이 승상이 되고, 이사형은 대장군이 되고, 사저는 그냥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라 하고.”
“넌 뭐 할 건데?”
“그냥 사부와 사형, 사저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을래요.”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정말 나나 다른 제자들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놈이었다.
정이 많은 성격이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읍참마속이라고, 공명도 마속을 벨 때는 고민하고 울었다는데 이 녀석은 그런 게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가 시퍼런 칼날과도 같다.
공을 세운 놈은 하늘을 걷게 만드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줬고, 반대인 놈들은 반드시 죽였다.
수하들이 나만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악군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모두가 내 앞에서 무릎 꿇었고, 나와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었다.
날 두려워하지 않는 건 오로지 제자들뿐.
마치 자식이 부모 대하듯, 내가 아무리 구박을 해도 녀석들은 내게 달라붙었다.
광폭한 나도 놈들만큼은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 뒤를 이을 사람들도 녀석들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뒤 난 참선과 명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근데 뭘 해야 하지?
머리가 완전히 굳었다. 생각의 폭도 너무 좁아졌다.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 되려면 뭘 해야 하는 걸까?
‘다시 시작할까?’
달려오느라 채워 넣지 못한 개천지보의 구간을 채워 넣는다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제 나도 손주 재롱 볼 나이인데……
제자들도 앞으로 할 게 없으니, 혼인해서 애들도 낳을 텐데.
‘그 애들 가르치는 걸 소일 삼아 나도 평범하게 살아 볼까? 뭔가, 지금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다.
하면 되지.
실행에 옮기지 않는 생각은 무의미하고, 나는 그런 무의미한 행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했으면 하면 된다. 어차피 그것 외에는 할 것도 없다. 내가 잘하는 것의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되도 않는 참선과 명상 따위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이제 늬들이 알아서 해라.”
“사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봉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녀석의 눈에는 내 광증에 대한 염려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네가 대사형이니까 네가 이제부터 성주 해라.”
남은 제자들을 향해서도 말했다.
“너희는 구봉이한테 잘하고. 네 대사형이 순한 만큼, 네놈들이 더 잘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구봉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부!”
“왜?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사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됐고, 이제부터 구봉이 네가 성주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을 곁눈질하며 당부했다.
“네 사제들 통제 잘하고. 그나마 네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 정도로 살아남았지, 저놈들이 하자는 대로 다 했으면 천황성의 반은 날아갔을 거다.”
구봉이가 물었다.
“사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혹시 사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했습니까?”
그 물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고민이라는 것 좀 해 보게. 그리고 덜 심심하게.’
진심이었다. 저놈들이 사고라도 치면 나도 걱정이란 걸 했을 테고, 그럼 생각이란 것도 했을 것이다.
“늬들이 다 알아서 해 쳐 먹으니 내가 할 게 없어, 할 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끽해야 나가서 싸우는 것밖에 더 있었냐. 그나마도 이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사부, 그건…….”
“그만! 더 이야기하면 정말 화낼지도 모른다.”
“사부…….”
어쩔 줄 몰라 하는 구봉이를 보며 세진이 말했다.
“사부, 또 뭐 때문에 심술 난 겁니까? 말을 해야 알죠. 사부가 자꾸 그리 노망난 것처럼 행동하시니, 대사형이 매일 안절부절못하는 거 아닙니까?”
저거 말하는 싸가지 보소!
“이놈의 새끼가 사부 앞에서 노망이라니! 그런 건 뒤에서 까는 거야, 이 무식한 놈아!”
냅다 옆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고, 재떨이는 잘 날아갔는데 말이다.
녀석의 손가락 앞에서 빙빙 도는 재떨이. 안에 담겨 있던 담뱃재마저 작은 기운 안에 잡혀 있다.
‘어라? 요놈 봐라? 저 무식한 놈이 언제 개천지보 팔보까지 올라갔대?’
멍청해서 몇 년 후에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미 한참 전에 팔보에 오른 수준이다.
‘아니지. 그보다!’
저놈의 주둥아리를 한 대 쳐야 속이 풀릴 것 같아, 주변에 던질 것이 있는지 찾았다. 아니, 찾으려 했다. 그런데.
“우어! 우어어어어어!”
이 뭔 소리냐?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졌다.
세진이 놈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뜬금없음에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의 새끼야! 노망은 내가 난 게 아니라 네놈이 났나 보구나. 갑자기 왜 쳐 우는 건데?”
“우어어어어어!”
여전히 통곡하는 놈을 보니 화는 사라지고 당황스러움만이 남았다.
옛날 애정의 몽둥이로 가끔 제자들을 훈계할 때, 모두 울었는데 유일하게 실실 웃던 놈이 바로 저놈인데 말이다.
‘아니, 그 전에 저놈이 우는 걸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놈이 왜?
여기서? 그것도 지금?
저리 서럽게 우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제, 왜 그래?”
“사형, 왜 그러십니까?”
우는 걸 처음 보기는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 당황들 해서 묻는 말에 세진이 울면서 말했다.
“사부가 곧 죽을 건가 봐! 우어어어!”
“…….”
순간 방 안에는 아무 소리 없이, 오로지 세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재떨이를 던졌는데 내가 막아 버렸어. 이게 말이나 돼? 사부가 어떤 사람인데? 기력이 떨어지신 거야. 곧 돌아가실지도 모른단 말이다. 우어어어어!”
“……!”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 사부가 노망이 나도! 벽에 똥칠하는 한이 있더라도! 잘 모시려 했는데, 그런 것도 없이 바로 가시려나 봐! 우어어어어!”
아! 저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새끼!
“사제!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사형! 미쳤어?”
내가 아무 말 하지 못하자, 다른 녀석들이 내 눈치를 보며 세진을 마구 구박한다.
세진에게 화가 나는 한편으로 뭔가 깨닫는 것도 있었다.
‘아! 저 무식한 놈이 저런 걸 고민하고 있었나?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됐나?’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윽고 이상한 게 뭔지 깨달았다.
주변을 살폈다. 내가 찾던 게 눈앞에 보인다.
일어나서 그걸 손에 잡았다.
녀석들 대가리가 커져서 이걸 써 본 지도 20년은 넘은 것 같은데.
그러나 손에 쥐니 착 달라붙는 것 같다.
‘멍청한 녀석 일깨우는 데 이만한 게 없지!’
난 그걸 세진에게 휘두르며 외쳤다.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지! 야, 이놈의 새끼야! 내가 아직 환갑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그냥 죽으라고 제사를 지내라, 이놈아!”
“악! 사부, 아파요!”
“기력이 떨어졌다며! 곧 죽을 거라메! 그런 곧 죽을 늙은이한테 맞으면서 아프다는 말이 나와!”
“사부, 왜 갑자기 기력이 돌아오셨어요! 이건 아니잖아요!”
“그냥 입 닥치고 맞아!”
신나게 두들기고 있을 때 남은 녀석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부끄럽다, 사제…….”
“맞아도 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