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에필로그 >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2022년, 5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만원 관중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함성 소리를 들으면서 22명의 선수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보내···! 지금 패스를 보내!”
“막아! 패스가 이어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아!”
“크윽, 늦었어! 이미 뚫렸다!”
“망할! 지금 저녀석을 보내버리면···!”
투웅···, 투웅···, 투웅!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 사이로 스며든 하얀 유니폼의 7번, 신형민은 가슴에 달린 토트넘 엠블렘을 휘날리며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공을 목표로 전력을 다해 달렸고, 마치 그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확하게 그가 원하는 위치에서 멈추는 패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떠올렸다.
이렇게 딱 떨어지는 패스를 보내줬는데···.
‘이걸 못 넣으면 그건 공격수 자격이 없는 거지!’
뻐엉―, 철썩!
“아자아! 이걸로 역전이다아!”
“고오오올! 후반 32분, 벼락같은 슈팅으로 마침내 토트넘이 앞서나가는데 성공합니다! 골대의 탑 코너를 찌르는 신형민 선수의 예리한 슈팅을 에데르손 골키퍼가 막아내지 못 했습니다!”
“저런 슈팅을 패널티 아크에서 때려버리면 골키퍼로선 막아낼 방법이 없죠! 기뻐하는 토트넘 선수들, 이제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타이틀은 토트넘이 가져가게 됩니다!”
“흥분한 토트넘 선수들, 신형민 선수를 둘러싸고 놓아주질 않네요! 확실히 클래스가 느껴지는 마무리였습니다! 과연 유럽의 정상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자랑스런 한국의 공격수죠!”
“하지만 이곳에 있는 한국 선수는 신형민 선수만 있는 게 아닙니다!”
“···후우.”
신형민의 득점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았던 재혁은 양손을 쓸어올려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살폈다.
남아 있는 시간과 양 팀의 점수가 그의 두 눈에 새겨지듯 들어왔다.
후반 32분 48초에 2대1로 한 점 뒤지고 있는 상황.
시간도 촉박하고, 상황도 나빴기에 객관적으로 본다면 패색이 짙은 경기였다.
하지만 재혁은 자신이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 경기도 이길 자신이!
삐이이익!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주심이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고, 제수스의 발끝을 떠난 공이 굴러 재혁에게 닿았다.
공이 재혁의 발밑에 놓이자 토트넘 선수들은 순간 주변 공기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선수들 중 최재혁에 대해 모르는 선수가 없었으니까.
최연소 유로피안 트레블의 주역.
백투백 더블 타이틀.
커리어만큼이나 화려한 개인 수상 내역들까지.
그만한 타이틀들을 단순히 운이라던가, 팀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개인 실력을 토대로 쌓아올렸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선수들은 재혁의 발 아래 멈춘 공을 주시하며 침을 삼켰다.
그렇게 멈추었던 공을 툭툭 건드리면서 방향을 재던 재혁이···.
뻐엉!
“!”
근육이 잔뜩 돋아난 오른발을 휘둘러 패스를 차보내자 모두가 헛바람을 삼켰다.
높은 자리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중계진들도 놀란 얼굴로 온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최, 최재혁 선수의 패스가···! 길게 뻗어 나가는 최재혁의 패스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사네에게 바로 이어집니다!”
“사네 선수의 영리한 움직임이에요! 센터백과 측면 수비수 사이에 잠깐 벌어진 공간을 제대로 읽고 파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걸 정확히 예측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패스로 연결한 최재혁 선수의 기술은 무어라 설명할 방법이 없군요!”
“지금 설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부드러운 터치로 공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사네 선수, 그대로 박스 안으로 침투하면서···. 슈팅―, 고오오올! 토트넘이 역전하기 무섭게 바로 동점 골로 맨체스터 시티가 응수합니다!”
“3분 사이에 두 골이 터졌어요! 정규 시간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경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와아아아아!”
방금까지 초상집 분위기였던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기세를 높였다.
이대로 역전을 당해 경기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선수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어내 준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토트넘 팬들은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다 잡은 경기라고 생각했거늘, 이걸 이렇게 따라잡다니.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기보다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목소리를 모았다.
경기가 완전히 끝나기까지 남은 10여 분이라면 다시 한 번 우위를 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양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복잡하게 뒤엉켰고···.
삐이이이익!
그 소리들을 가르는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주심은 휘슬을 쥐고 있던 손을 내리더니 토트넘 쪽의 골대를 가리켰고, 맨체스터 시티에게 프리킥이 주어진 것에 맨시티의 팬들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모두 하나가 되어 한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최재혁! 최재혁!”
당당하게 팀의 프리킥을 전담하는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한 최재혁.
지금까지 찬 프리킥의 성공률이 3할에 육박한다는 괴물같은 기록은 뒤늦게 찾아온 기회와 함께 관중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중계진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이크에 손을 바짝 모아 쥔 캐스터와 해설자는 떨리는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경기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맨체스터 시티가 25미터 지점에서 프리킥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이 프리킥이 모든 걸 결정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요리스 골키퍼가 신중하게 벽을 세우고 있네요. 상대가 최재혁이라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부족하지 않을 상대지요.”
“마침내 준비가 모두 끝났는지 선수들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심이 휘슬을 짧게 불었고요. 최재혁 선수가 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한 발, 두 발···!”
“찼습니다! 높게 뜬, 수비벽 위를 가뿐하게 넘은 최재혁 선수의 프리킥! 벽을 넘자마자 깎아지면서 골대를 직접 노리고 날아갑니다! 요리스 골키퍼가 공의 궤도를 읽고 몸을 날려봅니다만···!”
“아아! 막지 못 합니다! 양손을 길게 뻗어봅니다만 요리스 골키퍼의 양손은 이미 공이 지나간 자리를 움켜쥐고 맙니다!”
“고오오올! 후반 45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 시간 2분에 터진 맨체스터 시티의 역전 골! 토트넘 선수들이 허둥지둥 공을 가지고 센터 서클로 돌아와서 경기를 재개해봅니다만···, 경기 끝났습니다! 이번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팀은 맨체스터 시티입니다!”
“승리의 주역이 된 최재혁 선수를 향해 선수들이 모여드는 군요! 후반 마지막에 보여준 그 실력은 역시 왜 지금 최재혁이 대세인지를 바로 보여준 장면으로···.”
***
“아, 제기랄! 또 졌어!”
준우승을 의미하는 메달을 목에 걸고서 복도로 내려온 신형민은 고함과 함께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번엔 기필코 이길 것이라 다짐했는데.
리그에서 당한 굴욕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란 무대에서 완벽하게 갚아줄 계획이었는데.
최후의 순간 결국 맨체스터 시티에게 무릎을 꿇고 우승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그는 그 어떤 때보다 참기 힘든 좌절감에 휩싸였다.
그런 신형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김수용이 쓰게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고생했다. 정말 아쉬웠어.”
“제가 오늘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형은 모를 거예요.”
“아냐. 마지막 슈팅만 봐도 알 수 있었어. 그만한 슈팅 동작이 몸에 자연히 밸 정도로 연습을 했던 거잖아? 죽을 만큼 연습했겠지.”
“···하아.”
수용의 위로에 다시 한 번 얼굴을 감싸쥐고 무너진 신형민.
그런 형민을 내려보면서 수용은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 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이미 몇 번이고 한 상태였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형민은 슬쩍 시선을 올리더니 수용의 아픈 곳을 찔렀다.
“하긴, 그래도 지금까지 재혁이한테 전패 중인 형에 비하면 저는 나은 편이죠.”
“너도 재혁이한테 이긴 적 없잖아.”
“그래도 비긴 적은 있으니까 전패는 아니거든요.”
“그거나 이거나.”
“전패랑 무승인 거랑은 분명 의미가 다르다니까요.”
그렇게 한동안 서로 같니, 다르니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둘은 그래봐야 비참해지는 건 자신들뿐이라며 말을 아끼기로 했다.
형민은 몸이 완전히 지쳐버린 탓에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복도에 자리를 깔았고, 그런 형민의 옆에 수용도 앉으면서 둘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었다.
“그래서 형은···, 진짜 대표팀으로 안 돌아올 거예요? 최종 선발은 다음 달이에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만한 기량을 아직까지 유지할 정도면 강감독님도 충분히···.”
“큭큭. 최종 예선까지도 뛰지 않았던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너희들은 내가 없어도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자신을 가져. 무려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과 준우승팀의 베스트 멤버들이잖아?”
“···.”
“난 적당할 때 떠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툭툭, 환한 얼굴로 형민의 어깨를 두드린 수용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너희에게 미래를 부탁하마.”
“후우, 알겠어요.”
수용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대화가 길어져봐야 같은 말이 돌 뿐이었으니, 수용이 말한 것처럼 현재에 남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나 나누겠다며 바닥에 붙어 있던 엉덩이를 턴 것이다.
그런 형민의 말에 잠시 손을 마주쳐 소리를 낸 수용이 뺨을 긁었다.
“재혁이라면 이미 갔을 걸?”
“네? 가다니요? 축하연으로 벌써 갔다고요?”
“아니, 거기가 아니라. 런던으로.”
“런던이요?”
결승이 끝나자마자 런던으로 떠났다니.
대체 왜? 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얼굴이 기우뚱 기울여지는 형민에게 수용이 웃었다.
“4년을 고대하던 날이 드디어 오늘이잖아? 그러니까 바로 간 거지.”
“아.”
그제야 왜 재혁이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비행기에 올랐는 지를 알아차리고 형민도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바보 녀석이 굳이 목줄을 차러 가버렸네요.”
“글쎄. 그래도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커플이잖아? 축복해주자고.”
어깨를 으쓱이며 서로를 마주본 두 사람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리며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복도를 떠났다.
***
영국.
옥스퍼드.
학생들로 붐비는 대학가는 오늘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모두 평소와는 다른 차림새였다.
학사모와 학위복.
졸업식이 열리는 오늘 강당으로 향하는 학생들은 지난 몇 년간의 고생을 통해 입을 수 있었던 모자와 가운을 걸치고서 기쁜 얼굴로 졸업이라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케이트도 거울을 바라보며 모자를 고쳐쓴 후 강당 안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긴장한 기색이 뚜렷했던 케이트는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었고, 자리에 앉자 평소 그녀를 아꼈던 교수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케이트 양, 연설 준비는 잘 했나?”
“네, 에드워드 교수님.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요.”
“하하하. 수석 졸업생인 케이트 양도 연설은 떨리나보구만.”
“아무래도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긴장이 되긴 하네요.”
“너무 긴장하지 말게. 평소대로 하면 돼, 평소대로. 그럼 기대하고 있겠네.”
“말씀 감사합니다.”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교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케이트는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올려 목에 걸린 반지 목걸이를 쥐고서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조금만 더 힘내자. 조금만 더···.”
“에, 그럼 지금부터 모두가 기다렸던 졸업식을···.”
그런 케이트의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고,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
짝짝짝짝!
“와아아아!”
박수 소리와 환호 소리가 뒤섞여 장내를 가득 채웠다.
성공적으로 연설을 끝마친 케이트는 짧게 호흡을 고른 뒤 빙긋 미소를 보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강단을 내려왔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걸로 진짜 끝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감동에 젖으려 할 때, 그녀의 옆에 앉은 남학생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쿡 찌르며 말을 붙였다.
“케이트, 연설 감동이었어.”
“아, 고마워.”
“졸업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니. 크,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내 가슴이 계속 떨리더라고. 하하하!”
이 친구가 누구더라.
케이트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빤히 살피며 미간을 모았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였는데, 추측에 빠져있는 케이트를 마주보면서 남학생은 빙긋빙긋 웃었다.
‘그래. 내 수준에 어울리는 여자면 역시 케이트, 네가 딱이지.’
4년 내내 학과 톱을 유지하면서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을 따낸 것도 대단했지만, 대학 내에서 케이트는 빼어난 외모로 더 유명했다.
백옥같은 피부와 청순한 얼굴, 그리고 쭉쭉 뻗은 기럭지는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모델을 연상케 할 정도였고,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는지 몸매 또한 빼어났으니 대학 내 많은 남학생들은 케이트가 지나가기만 하면 멍한 얼굴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케이트를 공략하는데 성공한 남자가 없었으니.
‘오늘 내가 그걸 해내보이겠다!’
남학생은 자신에 찬 얼굴로 이가 드러나는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케이트에게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같은 수업을 듣긴 했지만 너하고 제대로 대화를 섞어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네 연설을 듣고 용기가 생겼어.”
“용기?”
“그래! 네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잖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같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게 어때?”
“···.”
“내가 이래 보여도 벌써 여러 회사들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줬단 말이지. 아마 취직만 하면 시작 연봉이 최소 7만 파운드 정도는 가볍게···, 응?”
말을 이어가던 남학생은 케이트가 가볍게 한숨을 토해낸 뒤 목걸이를 꺼내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지가 걸려 있는 목걸이는 처음 보는 종류의 악세사리였기에 남학생은 그게 뭐냐고 신기한듯 물었으나, 케이트는 그런 남학생에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행정학 수업을 들을 때 같이 듣던 친구였구나?”
“오, 날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역시 우리 인연은···.”
“내가 기억한 게 아니야. 내 친구인 아멜리아가 기억하고 있던 거지.”
“아, 아멜리아?”
“그래. 아멜리아. 기억 안나? 네가 신입생 파티에서 가지고 놀다가 버렸던 여자애.”
“···.”
“나랑 같이 몇 년간 같이 스터디 그룹을 유지하던 친구였거든.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때 아멜리아가 신신당부를 해줬던 친구인 게 지금 기억이 났네.”
“아니, 그건 오해가 좀 있었던 건데···.”
“오해?”
케이트가 얇게 뜬 눈으로 남학생을 노려보며 되묻자, 남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남학생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둔 케이트는 이내 목걸이에서 빼낸 반지를 손가락에 걸었고, 남학생은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켜보겠다고 밝은 목소리로 반지에 관해 물었다.
“이야, 반지 되게 예쁘네. 혹시 가족한테 선물 받은 거야? 지금까지 안 끼고 왜 목걸이에 걸어뒀어? 아깝게시리.”
“약속의 증거거든.”
“약속의 증거···?”
“응.”
되묻는 남학생을 향해 케이트는 왼손을 들어 약지에 낀 반지를 보이면서 말했다.
“나 오늘부터 유부녀야.”
“···유, 유부녀? 거, 거짓말. 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 아닌데. 내 남편이 누군지도 알려줄까?”
목소리를 떠는 남학생을 마주보던 케이트는 이내 시선을 옮겼고, 방청객들 중 한 명을 가리킨 뒤 손을 흔들면서 밝게 웃었다.
남학생은 케이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서있는 남성, 최재혁이 케이트가 그런 것처럼 밝게 웃으면서 같은 반지를 낀 손을 흔드는 것을 확인하곤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해댔고, 다시 정면으로 돌린 케이트는 지나가는 듯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재혁이가 지금 받는 주급이 얼마더라···.”
“···.”
“아, 어차피 이번 시즌이 끝나면 재계약 협상을 하기로 했으니까. 굳이 지금 알 필욘 없겠네. 뭐, 내가 그 돈을 가지고 자랑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말이지.”
케이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학생은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 있었다.
***
“중간에 왜 갑자기 나한테 손을 흔든 거였어?”
“아, 그거. 사정이 좀 있었거든.”
“그래? 반지도 벌써 끼고 있네? 나보고 다시 껴달라고 할 거라며?”
“그것도 사정이 있었거든.”
“복잡하네.”
“복잡했지만, 의외로 간단히 해결 됐어. 히히, 능력이 좋았거든.”
“능력이 좋아? 어, 오늘은 먼저 팔짱도 껴주네? 졸업이 좋긴 좋은가 봐?”
“응, 엄청! 그러는 너는 안 좋아?”
“아니, 나도 좋아.”
케이트의 물음에 환한 얼굴로 미소를 떠올린 재혁이 그의 팔에 달라붙어 있는 케이트를 내려보며 말했다.
“4년 씩이나 기다리느라 힘들었거든.”
“겨우 4년 밖에 안 걸린 거야.”
“뭐, 아무렴 어때. 이제부턴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꼬옥, 케이트를 품은 팔에 힘을 주었던 재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케이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님.”
그런 재혁의 행동에 잠깐 볼을 붉힌 케이트는 뭔가를 각오한 얼굴로 생긋 옅은 웃음을 띠더니 손을 뻗어 재혁의 넥타이를 쥔 후.
“바보야. 부탁을 할 땐 성심성의껏 진심을 보여야 하는 거야.”
“!”
“···이렇게 말야.”
그대로 재혁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 다음 말했다.
혀끝을 타고 들어온 케이트의 숨결에 잠깐 눈동자를 키웠던 재혁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머리를 긁었다.
“나 다음 주부터 국가대표 소집 훈련이 있는데···.”
“그런데?”
“강감독님한테 다리 풀렸다고 혼나면 너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나이 먹고 체력이 떨어진 네 탓이지.”
“호오, 그렇게 도발을 하시겠다? 내 체력이 과연 어디까지 닿나, 오늘 한 번 끝을 봐볼래?”
“꺄악! 바보야, 간지러!”
인생의 새로운 막을 함께 연 재혁과 케이트, 두 사람.
둘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것을 또 한 번 약속하며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에필로그 끝.>
< 225. 에필로그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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