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돌아온 미드필더 >
뙤약볕이 특히 뜨거운 날이었다.
한국은 스쳐지나간 태풍도 날리지 못 한 열기에 갇혀 연일 최고 온도를 갱신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도 어린 선수들은 부지런히 가방을 메고 움직였다.
그들이 향하는 실내 경기장엔 커다란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케이 브랜드 어린이 축구 대회.’
매년 여름 방학을 맞아 열리는 케이 브랜드 주관 축구 대회였다.
어린이라는 말처럼 참가 연령이 초등학생에 제한되는 대회였기에 승패에 연연하기보단 어린 유망주라는 싹에 물을 준다는 의미가 더 깊은 대회는 올해로 벌써 6년차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 대회장에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재혁은 흐뭇한 얼굴로 경기장으로 향하는 꿈나무들을 지켜보다가 곁에 다가온 인물을 발견하곤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최재혁 선수! 이게 대체 몇 년만입니까? 다시 만나게 되니까 정말 반갑군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세훈이 아버지시잖아요.”
“하하, 그럼 그럴까?”
재혁의 말에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인 조연호 사장은 재혁과 발걸음을 맞춰 대회장으로 향했다. 간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쌓였던 대화 거리가 많았기에 입이 쉬질 않았다.
그러다가 재혁은 조사장이 못 올 수도 있다는 말을 기억해내고 그에 관해 물었고, 조연호는 이에 호탕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혁이 네가 오는 날이니까. 회의는 전부 내일로 미뤘지.”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럴려고 사장하고 있는 건데? 뭐, 일은 평소에 많이 하니까. 하루정돈 괜찮아. 그보다 양복을 입고 왔어? 너무 격식을 차린 거 아닌가? 운동복이면 된다니까.”
“하하,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요.”
조연호의 질문에 애써 웃어보이며 뺨을 긁적인 재혁은 굳이 케이트가 머무는 호텔에서 대회장으로 바로 왔다는 부연 설명은 생략하고 행사 일정에 대해 물었다.
재혁이 던진 질문에 조연호는 손을 마주쳐 소리를 내더니 옆에 있는 장비서에게서 팜플렛을 하나 받은 뒤 그에게 건네주며 설명했다.
“먼저 9시에 개회식이 있을 예정이고, 마지막에 재혁이 네가 간단히 축사를 해주면 돼. 이후부턴 대회 참관 일정인데···, 목발을 짚고 다니려면 역시 힘들겠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뭐라할 사람은 없을 거야.”
“아뇨. 괜찮아요. 경기장에 왔으면 당연히 경기를 보러 다녀야죠. 에어컨도 시원한데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감기 걸릴 걸요?”
“하하, 그런가? 이거 말이라도 고맙구만. 아참, 그리고 간단한 사인회가 준비되어 있는데···. 폐회식까지 있으려면 힘들테니 이건 대회 중간에 진행하는 걸로 할까?”
초대 받은 사람은 보통 함께 했다는 의미만 보여주면 된다.
조연호 사장도 그 점을 고려해 재혁이 모든 일정을 중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배려한 것이지만, 재혁은 그를 향해 고민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진행할 일정들은 모두 폐회식에 맞춰주세요. 대회 중엔 한창 시합에 열중인 친구들도 있을 거고, 쉬고 있을 친구들도 있을 거잖아요? 모두 빠짐 없이 만나고 싶으니까, 제 일정은 폐회식에 맞춰주시면 됩니다.”
“오오, 그렇게 해준다면 분명 모두 기뻐할 거야!”
“정말 기뻐해줬으면 좋겠네요.”
“하하, 기뻐해주고 말고. 다른 누구도 아닌 최재혁 선수와 만날 기회인 걸!”
조연호 사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이제 재혁의 이야기를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초등학생 시절부터 시작해서 호주로 유학, 그리고 영국으로 이적.
많은 장애물들이 많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실력으로 극복한 재혁의 드라마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열정, 그리고 끊임 없이 노력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어준 것이다.
그만큼 재혁의 영향력이 이젠 거대해졌기 때문에, 조연호 사장은 미안한듯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이렇게 대단한 선수가 우리랑 계속 계약을 유지해도 괜찮은 건가?”
걱정스러운 조연호 사장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케이 브랜드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선 제법 알려진 브랜드였지만, 전세계를 상대로 마케팅을 벌이는 메이저 브랜드들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재혁이 정도의 인지도라면 N사와 A를 테이블에 놓고 보다 좋은 계약 조건을 위해 협상도 가능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계약 조건들이라면 분명 지금 자신과 유지하고 있는 계약을 배로 뛰어 넘을 조건들일 게 분명했으니까.
보다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자신과 현행 유지를 하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연호 사장은 속이 엉킨 한숨을 얕게 토했고, 그런 조연호 사장을 향해 재혁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가 전에도 말씀 드렸었죠. 케이 브랜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라고요. 지금 금액을 따지는 건 그 가치가 달라요. 제가 정말로 필요로 할 때 주셨던 도움의 가치는 지금 제가 받고 있는 돈보다 분명 크니까요. 게다가···.”
잠시 말을 끊은 후 주변을 둘러본 재혁은 눈에 들어오는 어린 선수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케이 브랜드가 꿈꾸는 ‘이상’에 공감하고 있거든요. 오늘 대회도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이라···.”
현재는 과거의 노력이고 미래는 지금의 결과라는 누군가의 격언.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둘은 오늘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과연 어떤 새로운 미래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
월드컵이란 전세계 축구인들의 축제가 끝이 났지만, 축구는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시즌, 새로운 선수, 그리고 리그에 승격해 새로 올라온 팀들까지.
매일 갱신되는 이적들과 새로운 이적설들은 시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환호케 했고, 과연 이번엔 어떤 팀이 챔피언이란 자리에 오르게 될 지를 기대하며 다들 다음 날 신문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영국의 맨체스터 공항.
입국심사를 거치고 지나가게 될 통로에 무리를 이룬 기자들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서 문을 열고 나올 인물을 기다렸다.
그 뒤로 십여 분이 흘렀고, 마침내 열린 문 사이로 전지 훈련을 끝낸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과 과르디올라 감독을 발견한 기자들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사진을 찍어댔다.
마이크를 쥔 기자들은 감독에게 다가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과르디올라 감독님! 전지훈련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번 여름 새로운 얼굴들을 영입했는데요. 혹시 추가 영입이 있을 것인지 궁금합니다!”
“원하던 선수를 다른 구단에 빼앗겼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정이 어떠신가요?”
일단 한 마디라도 들으면 새로운 기사를 하나 써낼 수 있다.
기자들은 어떻게든 한 마디 대답을 듣기 위해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열정적으로 물었으나, 과르디올라 감독은 무심한 얼굴로 할 말이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구단 버스가 준비되어 있는 장소까지 향하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 마디를 주워듣곤 고개를 돌렸다.
“듣기로 최재혁 선수의 부상이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다고 하는데요. 굳이 부상 당한 선수와 재계약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조건도 엄청 쎄다던데. 그러다가 재활에 실패라도 하면···.”
“방금 떠든 기자분.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아, 더 사인에서 나오신 분이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직접 지목을 받은 기자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무어라 대꾸하려 했으나, 그보다 이어지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말이 더 빨랐다.
과르디올라는 발을 멈추려는 선수들에게 얼른 버스에 오르라며 소리친 뒤 다시 기자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우린 여기있는 누구와 다르게 ‘프로’들입니다. 그냥 떠들고 싶다고 떠드는 게 아니고, 하고 싶다고 계약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일을 하기 전에 심사숙고를 하고, 결정한 뒤 진행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재혁 선수와 최근 체결한 재계약은 모두가 만족할만한 사항이었습니다.”
“···.”
“부상 때문에 걱정이요? 재활을 실패하면 어떡하냐고요? 큭큭큭.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단언합니다. 최재혁 선수는 더 강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더 강해진 우리가 이번 시즌 어떤 결과로 시즌을 끝내게 될 지, 한 번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감독님! 떠나기시 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번에 링크 되고 있는 미드필더 선수가···!”
말을 끝내고 등을 돌린 과르디올라 감독이 버스에 오르자 버스 문이 닫혔고, 그대로 공항을 떠나는 맨체스터 시티의 버스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기자들은 허둥지둥 랩탑을 펼칠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대단한 소식은 아니었지만, 시즌이 시작 되기 전 제법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걸 바로 기사로 작성해 올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버스가 공항을 벗어나자 과르디올라 감독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으면서 땀을 식혔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미켈 코치는 낮게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기자들한테 괜한 이야깃거리를 준 게 아닙니까?”
“괜한 이야깃거리?”
미켈 코치의 말에 피식 실소를 흘린 과르디올라 감독.
그는 기자들을 향해 말할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재혁이가 건강한 상태였다면 굳이 내가 나서서 떠들지 않았을 거야. 어차피 경기장에 오르면 실력으로 증명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지금 재혁이는 부상 때문에 재활 중이지. 그렇다면 누가 그에게 힘이 되어 줘야겠나? 함께 팀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해줘야 할 일이 당연한 거야.”
“···.”
“내가 가십거리가 된다고 해도 좋아. 애초부터 내가 지키고 있는 자리는 책임을 지는 자리니까.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움직인 것일 뿐. 서로의 필요가 맞물린 거라고 보면 돼.”
“서로의 필요라···.”
“하지만 말이지. 감독과 그런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선수는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아.”
“!”
이어지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말에 짐짓 놀란듯 눈을 키운 미켈 코치.
그런 미켈 코치를 향해 과르디올라 감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필요하다는 생각은 결국 그 선수가 나에게 ‘믿음’을 줄 때 발생하는 거니까. 이 선수가 경기장에 올라간다면 분명 변화를 줄 거라는 ‘믿음.’ 그리고 믿음이 쌓여 이룬 ‘신뢰’는 결코 평범한 선수라면 쉽게 이룰 수 없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최재혁이란 존재는 내게 있어서 믿음의 상징인 거지. 반드시 지키고, 함께 해야 한다는 상징 말야.”
“믿음의 상징이라. 어렵네요.”
“어렵지만 간단해. 누군가 우리의 믿음을 부수려 한다면, 내가 먼저 그놈을 부숴버리려는 거지. 방금 그 기자처럼.”
“그건 좀 무섭네요.”
“지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지키려면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미소를 교환한 두 사람.
미켈 코치는 잘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눈 좀 붙이겠다며 안대를 꺼냈고, 과르디올라 감독도 팔짱을 낀 채로 의자 깊숙이 몸을 찔러넣었다.
그 뒤로 30분 가량이 흘렀을 때, 구단 훈련장에 버스가 도착했고, 선수들을 포함해 스태프들은 가지고 온 짐을 풀기 위해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간단히 정리가 끝나자 선수들을 향해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내일 하루는 푹 쉬고, 그 다음 날부터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몸 관리 잘하고, 다들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데 집중하도록. 첫 경기는 커뮤니티 실드다. 시즌 시작부터 손쉽게 들 수 있는 우승컵을 놓치지 말자고.”
“네!”
“좋아, 그럼 해산. 내일 모레 보자.”
그 후 코치들에게도 다음 일정을 설명한 뒤 해산을 외치며 몸을 일으킨 과르디올라 감독.
남들이 모두 떠나고 조용해진 훈련장을 돌아보며 과르디올라는 여러 가지들을 생각했다.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사실 그도 사람인지라 쉽게 해결되지 않는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걱정인 이번 시즌 성적에 대한 고민에 빠져 멍하니 복도를 따라 걸었는데.
사아악, 사아악!
“···?”
그의 귓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 소리가 재활실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고, 조심스레 재활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물었다.
“최재혁!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건가?”
“어, 감독님? 감독님이 오신 거면···, 헉.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버스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나?”
“방금까지 이어폰을 끼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땀 때문에 잠시 빼뒀지만요.”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자세를 고친 재혁은 마른 수건으로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며 웃었고, 그런 재혁의 맞은 편에 앉게 된 과르디올라 감독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영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벌써 재활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니.
“제대로 쉬고 있는 건 맞겠지?”
“물론이에요. 휴식도 훈련인 걸요.”
“괜히 부상이 재발하면 모두가 고생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지금 이곳에 제가 있는 거잖아요? 2개월 안에는 꼭 복귀할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이뤄야 할 게 많거든요.”
당당하게 말하는 재혁을 마주보게 되자 과르디올라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잊고만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선수가 어떤 선수인 지를 말이다.
어쩌면 세계를, 아니. 축구계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선수인 최재혁.
그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과르디올라 감독은 방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을 모두 씻어낸 후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자 그럼 이번 시즌은 몇 관왕을 노려볼까? 가뿐하게 더블로 가볼까?”
“더블이요? 그런 걸로 되겠어요?”
과르디올라 감독의 질문에 역으로 되물으며 웃어보인 재혁.
그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항상 세계 최고를 목표로, 은퇴하는 그 날까지 딸 수 있는 타이틀은 죄다 따낼 겁니다. 그게 제가 다시 돌아온 이유니까요.”
<완.>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 224. 돌아온 미드필더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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