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23화 (223/225)
  • < 223. 와인 한 잔의 밤 >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했는지 케이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 어느 누가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듯 결혼을 해달라고 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재혁은 오히려 본인이 당황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이게 갑자기였어?”

    “얼굴을 보자마자 결혼을 해달라는 게 그럼 갑작스러운 게 아니야?”

    “아, 그런 말이었구나. 역시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묻는 게 더 좋았을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평소와 다르게 양뺨이 바짝 달아오른 케이트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도리질쳤고, 그런 케이트를 마주보면서 재혁은 어색하게 이마를 긁적였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

    그래도 자신은 나름대로 케이트를 볼 때마다 감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모자랐던 건가?’

    재혁이 이마에 올렸던 손을 내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좋아한다는 의미를 전달한 적은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해준 적은 없지 않던가.

    혹시 그게 문제였을까?

    고민이 이어지자 재혁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연애를 떠올려 보려다가···, 금방 포기했다.

    과거의 삶을 포함해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와 진지하게 교제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삶에선 운동밖에 하질 않았으니 특별히 연애를 경험해볼 기회가 없었고, 이전의 삶에서도 매일매일 입에 풀칠하기에 바빠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재혁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내가 모태솔로였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은 해보지도 못 할 2회 연속 모태솔로.’

    한 번 하기도 힘든 걸 두 번 연속 해냈다는 자부심···, 같은 게 떠오를리 없었다.

    오히려 당혹스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어떤 말로 말문을 열어야 할지, 한 번 떠오른 고민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둘 사이엔 그동안 느껴보지 못 한 침묵이 자리하곤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어색함은 웨이터가 주문을 도와주는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진득하게 남았다.

    웨이터는 주문을 위해 테이블을 찾았다가 난감한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식사 메뉴는 조금 더 생각하실 시간을 드릴까요?”

    “네.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렇다면 마실 것부터 먼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뭘로 드릴까요?”

    “저는 물···.”

    “저는 와인으로 주문 할게요. 이거 주세요.”

    “와인?”

    “아, 그건 칠레산 레드 와인으로 보통 와인들 보다 도수가 조금 높은 편인데 괜찮으신가요?”

    “네.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물을 주문한 재혁과 달리 레드 와인을 고른 케이트.

    평소 술과는 거리가 있었던 케이트인지라 그녀의 낯선 모습에 재혁이 당황해 되뇌었고, 그런 재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케이트는 가느다란 검지를 곧게 뻗어 가리키며 주문을 끝냈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재혁이 케이트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와인 마실 줄 알아?”

    “아니. 이번에 처음 마셔보는 거야. 왜? 이상해?”

    “그런 건 아닌데.”

    새침한 목소리로 답하는 케이트를 마주보면서 재혁은 그녀의 대답 속에 묘하게 날이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색한 얼굴로 뺨을 쓸어내렸다.

    도저히 그의 상식으론 이해가 힘든 분위기에 조용히 콧잔등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는 사이 웨이터가 주문한 음료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재혁에겐 물을, 케이트의 앞엔 붉은 와인을 따라준 뒤 코스 메뉴 주문을 받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식사 코스까지 주문을 끝냈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며 물과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고층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의 모습이 제법 예뻤지만,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을 아직 두 사람은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식전 메뉴를 시작으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웨이터가 들고 온 접시들을 둘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음식에 대해 설명했다.

    “광어 회 위에 주방장님께서 직접 제조하신 특제 승도 소스를 끼얹은 에피타이저입니다. 위에 올려놓은 캐비어와 함께 한 입에 드시면 좋습니다.”

    “다음 요리는 랍스터의 꼬리 부분으로 만든 샐러드입니다. 새순들과 볶은 해바라기 씨들이 곁들어져 있어 신선하면서 고소한 맛이 특징이죠. 살짝 가미된 송로버섯 향을 찾으시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이 다음 요리는 와규 채끝 스테이크입니다. 으깬 송로버섯과 함께 저온 숙성된 고기로···.”

    평소 이런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던 재혁과 케이트는 웨이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음식들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사실 설명을 들어도 처음 듣는 식재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둘이 내리는 평가는 맛에 집중되어 있었고, 제법 입에 잘 맞았기에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메인 요리가 담겼던 접시까지 깨끗하게 비우자 디저트를 가져오겠다며 웨이터가 빈 접시들을 가지고 돌아갔고,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재혁은 건너편에 앉은 케이트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취했지?”

    “아니이? 하나두 안치했는뎅?”

    “···.”

    취했네.

    그것도 엄청나게.

    자연히 흘러나올 뻔한 대답을 삼킨 재혁은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케이트의 상태가 저래서야 애써 준비한 것들을 모두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재혁이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조그만 상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케이트가 그를 향해 말을 붙였다.

    “야아, 최재혁. 너어, 나한테 대체 왜 그래에? 내가 우스워 보여?”

    “갑자기 왜?”

    “너어는 내가···, 응? 그냥 마악···.”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체처럼 구부러진 혀로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는 케이트는 잠깐 말을 멈춘 후 잔에 남아 있는 와인을 모두 비워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결혼하자구 하면 그냥 할 거 같아 보였어?”

    “···?”

    “그게 그렇자나···. 평소에는 먼저 연락두 없구···, 항상 내가 찾아가야 하고···, 그렇게 찾아가면 맨날 다쳐있구···.”

    말이 이어질수록 케이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재혁에겐 그 어떤 때보다 또렷하게 들렸기에,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녀의 말을 경청했고, 그렇게 한동안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케이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혁을 슬쩍 훔쳐본 뒤 말했다.

    “그리고 너···, 나한테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잖아···.”

    “!”

    “매번 대충 넘어가려고만 하고···, 어물거리고···, 말도 안해주고···. 그러다가 갑자기 결혼하자니.”

    부끄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취기가 오른 와인 때문일까.

    홍조를 띤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면서 케이트가 물었고.

    “너···, 정말로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응. 좋아해.”

    “!”

    그런 케이트의 질문에 재혁은 고민없이 곧장 대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반쯤 감겨 있던 케이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들은 것처럼, 뜻밖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순간 말을 잊은 케이트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재혁을 바라보았고, 그런 케이트를 향해 재혁이 계속 말했다.

    “우스워보여서도 아니고, 결혼하자고 하면 해줄 것 같아서도 아니야. 평소에 먼저 연락도 못하고, 항상 기다리게만 하고, 애써 찾아와주면 난 매번 침대에 누워만 있었지만,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내가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이게 거짓이 아니라는 거 말야.”

    “···.”

    “매번 대충 넘어가려고 해서 미안해. 어물거리고, 제대로 말도 안해주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결혼하자고 하다니. 내가 바보였어.”

    재혁의 말이 계속 이어지자 케이트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원피스 끝자락에 양손을 꼭 모은 채로 고개를 숙인 케이트는 말이 없었고, 그런 케이트를 향해 재혁이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네가 몇 번이고 묻는다면, 확신이 필요하다면, 나는 계속 대답해줄 수 있어.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내가 꿈꾸는 미래에 네가 꼭 함께 해줬으면 한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해줄 수 있어?”

    재혁의 말을 자르고 마침내 고개를 든 케이트가 물었다.

    촉촉히 젖은 눈가와 홍조로 물이 든 뺨,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

    그제야 재혁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여린 소녀를 걱정시켰는 지를 말이다.

    재혁은 소녀가 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힘을 담아 대답했다.

    “응. 계속 좋아해줄게.”

    “앞으로 평생···?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나한테 싫증이 났다고 해도 너한테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죽는 날까지 계속, 네가 노력한 것처럼, 나도 노력할 거니까.”

    “바보야. 싫다는 사람을 왜 붙잡아?”

    “그야 이제부턴 내가 널 더 좋아할 거니까.”

    “!”

    재혁의 마지막 말에 케이트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고, 하얀 어깨가 크게 떨렸다.

    하지만 방금까지와는 분명 다른 떨림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기에 재혁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안주머니에 넣어 두고 있던 상자를 꺼내 손에 쥐었고, 천천히 케이트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줄래?”

    재혁의 프로포즈에 케이트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소녀는 얼굴을 가린 채로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고, 조용히 흐느끼다가 조그맣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 축하합니다!”

    “지켜보는 제가 다 힘들 정도였네요. 하하하. 이건 준비한 디저트입니다. 원래는 메뉴에 없는 건데, 특별히 축하를 기념하기 위해 주방장님께서 공을 들여주셨어요. 반지 모양의 초콜릿 공예랍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최재혁 선수 그리고 케이트 양.”

    케이트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식당 직원들과 다른 손님들이 새로운 커플의 탄생을 축하하며 둘을 위해 박수를 쳐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어준 최재혁이었기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앞으로 이어질 그의 인생을 축복했다.

    그렇게 재혁이 건넨 상자 속에 담긴 반지를 약지에 끼워보던 케이트는 뒤늦게 재혁이 무릎을 굽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그를 일으켰다.

    “너 다리 다쳤잖아! 그러고 보니 목발은 어디다 두고 여기까지 걸어왔어?”

    “그게, 프로포즈를 할 건데 목발을 짚고 오면 조금 그럴 거 같아서 로비에 맡겨뒀지.”

    “이 바보, 멍청이! 그러다가 또 다치면 어쩌려고!”

    “잠깐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보다 너 술 다 깼어?”

    “그러고 있는 널 보니까 술기운이 다 날아간 거야! 하여간 이 바보는···!”

    감동도 잠시였을 뿐.

    현실로 돌아온 케이트는 재혁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린 뒤 목발을 가지러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직원이 그녀를 만류한 탓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좋은 날에 찾아온 손님의 발걸음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며, 직원이 그녀를 대신해 내려간 것이다.

    이에 괜한 사람에게 수고를 시켰다며 한숨을 토했던 케이트는 슬쩍 고개를 내려 약지에 끼워둔 반지를 찾았다.

    보석에 대해 잘 몰라서 얼마짜린지 몰랐지만, 그래도 보고 있기에 예뻤으니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케이트를 살펴보던 재혁도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어찌어찌 일이 잘 해결된 것에 만족한 것이다.

    그렇게 디저트를 향해 포크를 뻗으려던 재혁은 잠깐이라며 손을 올린 케이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잠깐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케이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생각해봤는데, 역시 바로 결혼을 하는 건 좀 아니야.”

    “그런가?”

    “우리 제대로 연애를 하던 것도 아니었잖아. 그런데 결혼부터 시작이라니. 이건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겠어.”

    “참고로 그거 환불 안 된다.”

    “누구 맘대로 환불을 해? 환불 할 생각 없거든?”

    재혁이 장난스런 목소리로 반지를 가리키며 말한 것에 케이트는 혀를 삐죽 내밀면서 답했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라며 묻는 재혁을 앞에 두고 케이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짧은 탄성과 함께 손을 모았다.

    “역시 시간을 좀 가져야겠지?”

    “시간?”

    “응. 시간. 일단 우리 둘 다 어리고, 난 아직 대학생이잖아? 그러니까···.”

    빙긋빙긋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케이트가 말했고, 케이트의 말에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인 재혁은 이어지는 케이트의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모든 건 내가 졸업을 한 다음에 정하자. 너도 이제 겨우 프로 생활 2년차인데, 흐트러지면 안되니까. 우리 둘 다 할 일은 꾸준하게 해야지.”

    그런 식의 시간이라···.

    재혁의 반응을 살핀 케이트는 혹시 마음에 안 드냐고 되물었으나, 재혁은 그런 케이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아니. 역시 너답게 굉장히 똑부러지는 계획이구나, 싶어서.”

    “그래? 그럼 너도 동의한 거지?”

    배시시 웃으면서 의견을 묻는 케이트를 향해 재혁이 그렇다고 답했고, 두 사람의 저녁도 조용히 끝이 났다.

    계산을 끝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한 두 사람.

    케이트는 자신이 머무는 층의 버튼을 눌렀고, 재혁은 손을 뻗어 로비로 향하는 층의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케이트가 재혁의 손을 가로막으면서 잔뜩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물었다.

    “···그냥 갈거야?”

    < 223. 와인 한 잔의 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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