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22화 (222/225)
  • < 222. 책임 >

    [월드컵 8강 신화를 작성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환영합니다!]

    “와아아아아!”

    게이트를 빠져 나오는 선수들은 커다란 함성과 함께 흔들리는 현수막의 글자를 확인하곤 놀란 얼굴이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환영식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을 언질로 대충 듣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것이다.

    몇몇 선수들은 부끄러운듯 머리를 긁었고, 몇몇은 기다려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말했다.

    인파에 섞여 같이 박수를 쳐주던 축구협회 관계자들 중 몇이 임종철 감독과 선수들에게 다가가 준비한 무대로 안내했고, 일동을 대표해 임종철 감독이 먼저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임감독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가장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

    “우승이 목표였던 만큼, 8강이란 결과로 국민 여러분들을 만족시키긴 힘들겠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임종철의 말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협회 관계자였다.

    8강이란 성적을 거두고도 죄송하다니.

    환영식에 참석한 일반인들도 예상 밖의 한 마디를 들은 탓에 어리벙벙한 얼굴로 두 눈을 잔뜩 키웠는데, 임종철 감독은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제 능력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분명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동을 대표해서 제가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축제 분위기를 예상하고 환영식을 준비했던 관계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떤 식으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꽁꽁 얼어버린 공기 때문에 숨쉬는 것조차 불편할 지경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도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선수들 또한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그런 분위기를 녹인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임종철 감독이 안쓰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향해 사람들은 하나된 목소리로 박수와 함께 소리쳤다.

    “괜찮아! 괜찮아!”

    “고개 드세요, 감독님! 다음 대회에서 우승하면 됩니다!”

    “맞아요. 8강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역시 최고의 명예는 우승이죠!”

    “다음 대회에서는 우승을 기대하겠습니다!”

    “와아아아!”

    기운내라며 고개를 숙인 임종철 감독을 응원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

    8강이란 역사에 남을 기록을 작성해놓고 고개를 숙인 감독이나, 그런 감독을 위로하는 국민들이나,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사람들을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런 현장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임종철 감독은 천천히 허리를 일으킨 후 다시 마이크를 잡았고, 위로를 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말문을 연 뒤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8강이란 기록은 절대 얕보일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계를 상대로 당당하게 결과를 냈다는 의미이니까요. 2002년의 4강이라는 역사적인 대기록보다 조금은 모자라지만, 분명 다시 경험하기 힘든 성적이긴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보다 높은 곳을 꿈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이 분위기가 그 전화점이 되길 바란 겁니다.”

    “···.”

    “축구 강국이 되기 위해선 항상 우승을 목표로 경기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회에 참가하는 모두가 목표로 하는 우승이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16강, 8강, 그리고 4강에 만족해선 안된다는 겁니다. 그게 강국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테니까요. 저는 비록 실패했지만···, 제 다음을 이어줄 감독은 분명 그 목표를 달성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짝짝짝짝!

    임종철 감독이 단상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8강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자는 짧은 연설.

    사람들은 환영식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연설 내용에 감동한듯 진심을 담아 손바닥을 마주쳤다.

    몽상가의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선지 그 말이 임종철 감독의 입에서 나온 탓에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다들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박수에 고맙다며 자리를 벗어난 임감독의 뒤를 이어 김수용이 자리에 올랐다.

    그동안 주장으로서 훌륭한 모범이 되었던 김수용을 향해 사람들은 임감독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며 그를 환영했고, 김수용은 겸손하게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말을 시작했다.

    “감독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제가 딱히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가벼운 어조로 말문을 연 수용이 끝에 미소를 떠올리며 웃자 청중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실제로 그보다 좋은 연설이 없을 것이니, 다들 수용의 말에 자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용 또한 잠시간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생각을 정리한 뒤 멈췄던 말을 이었다.

    “어려운 대회였습니다. 하지만 분명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대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걸 마지막으로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떠난다고요? 그럼 김수용 선수는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기자가 던진 질문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일순 청중들이 술렁였다.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김수용이 국가대표를 떠난다니.

    그의 나이가 아직 30살인 것을 감안하면 너무도 이른 은퇴였기에 충격이 더 컸던 것이다.

    하지만 수용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다.

    “물론 앞으로 2, 3년은 더 뛸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4년 후에도 제가 최고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우리 나라의 목표가 월드컵 우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지금은 제가 떠나야 할 시기임이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저도 아쉽습니다. 추억이 많은 곳이고, 제게 의미 깊은 자신감을 심어준 팀이기에 고민도 많았습니다. 허나, 지금은 떠나야 할 때임을 제 가슴이 말해주고 있네요.”

    씁쓸한 미소였다.

    욕심이 남아 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수긍한 미소 말이다.

    그런 수용의 기분이 어떨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또 다른 침묵이 잠시동안 이어지던 중, 수용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 저를 대신해 남게 될 사람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들이라면 분명 제가 해낼 수 없었던 목표를 달성해줄 것이라고 전 믿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란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린 수용은 선수 한 명, 한 명들을 순서대로 눈에 담았다.

    공격수이며 차기 주장을 맡게 될 신형민을 시작으로 이번 대회에서 크게 활약한 최주성, 이경훈과 눈을 마주쳤고, 그렇게 수비수들, 골키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리에 서있는 최재혁을 보았다.

    재혁을 바라보는 수용의 눈빛은 다른 이들을 볼 때와 달리 더욱 아련해졌다.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미드필더.

    하지만 재능은 자신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어린 후배.

    그런 후배의 존재가 부러웠지만, 동시에 수용은 그가 있기 때문에 은퇴라는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이 편했다.

    분명 자신이 떠나도 그 자리를 완벽하게, 아니. 보다 더 뛰어난 능력으로 채워줄 것이 확실했으니까.

    그렇게 다시 시선을 청중들을 향해 돌린 수용은 마지막으로 응원해주셔서 고마웠다며 고개를 꾸벅였고, 떠나는 주장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모두 뜨거운 박수로 작별을 고했다.

    환영식이자 작별의 무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

    “다들 고생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보겠지. 그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고, 훈련 빼먹지 마라. 항상 기술을 갈고 닦아.”

    “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해단하기 전 파주에 모인 선수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짧은 한 마디를 전한 김수용은 떠나는 선수들과 일일이 포옹을 나누었다.

    평생 못 볼 사이는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태극 마크를 품고 함께 뛰지 못 하게 된 것에 아쉬움을 달랜 것이다.

    그렇게 신형민과 포옹을 나눈 수용은 마지막으로 재혁을 앞에 두고 피식 웃었다.

    “네 어깨에 달린 짐이 무겁겠지만, 너라면 잘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무거운 거 아시면 좀 더 나눠들어주시지 그랬어요.”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걸 아니까.”

    “너무 무자비하게 키우시네요.”

    “강한 걸 아니까 강하게 키우는 거야.”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재혁 또한 수용과 비슷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더니 포옹을 나누며 등을 그의 토닥였다.

    “어차피 영국에서 다시 볼 거 잖아요? 눈물을 쏟는 이별은 기대하지 마세요.”

    “너한텐 바라지도 않았어. 리그에서 다시 보자. 이번에 만나면 봐주지 않을 거야. 이제부턴 리그에 모든 걸 걸테니까.”

    “하하하. 물론이죠. 하지만 저도 쉽게 지진 않을 겁니다. 전 아직 ‘현역’ 국가대표니까요. ‘전 국가대표’ 선수한테 지는 건 체면 상하잖아요?”

    “이게 한 마디를 안 지고.”

    감동 없는 재혁의 태도에 수용은 그에게 힘없이 꿀밤을 먹였다.

    당돌한 후배의 태도에 장난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돌함 속에 담겨 있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기에 수용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수용은 잠시간 훈련장 벤치에 턱을 괴고 앉았고, 그런 수용의 옆에 임감독이 앉았다.

    두 사람은 수년간 함께 훈련했던 운동장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냐?”

    “설마요.”

    감동을 가볍게 깨며 대화를 시작한 임종철은 살짝 찡그린 코밑을 슥슥 쓸어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원래 조력자들이 해줄 일이 더 많은 법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제 1막은 그저 소개야. 2막부터가 본편이지. 드디어 제대로 된 막을 열게 된 것을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감독님도···, 아. 이젠 감독님이 아니시죠.”

    협회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강 알고 있었던 수용이 작은 미소를 떠올렸고, 수용의 미소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 임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위원장님이라 부르라는 임종철의 말에 수용은 폼이 안 난다며 큭큭 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유소년 쪽을 맡는다고 하셨죠? 위원장님도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네요. 뜯어 고쳐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맡은 거야. 폐습은 물론 시대에 뒤떨어지는 관행까지 전부 박살을 내버릴 거니까. 그래야 제 2의, 제 3의 최재혁이 싹을 트지.”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꼭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뭘?”

    수용의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종철이 그에게 되물었고, 수용은 잠시간 눈을 감은 후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나라가 꼭 월드컵에서 우승했으면 좋겠습니다.”

    ***

    “다녀왔습니다. 후우. 덥다, 더워.”

    택시를 타고 할머니와 재희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재혁은 반쯤 푼 넥타이와 셔츠 사이로 손부채질을 해댔고, 그런 재혁을 반긴 두 사람은 재혁의 방에 짐을 넣어주는 걸 도와준 뒤 물었다.

    “오빠. 저녁 준비하고 있었는데 밥 먹을 거야?”

    “아, 그게. 약속이 있어서 또 나가봐야 돼.”

    “약속? 누구랑?”

    한국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재혁이 약속이 있다는 것에 재희는 궁금한듯 물었고, 재혁은 동생에게 간단히 대꾸하며 셔츠를 갈아입었다.

    “케이트랑. 호텔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오! 케이트 언니랑?”

    “케이트? 그 예쁜 처자?”

    “네, 할머니. 케이트는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같이 먹어주기로 했어요.”

    “어머, 어머. 오빠.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케이트 언니가 선심 써서 같이 먹어주는 거지.”

    “넌 어째 내 동생이면서 나보다 케이트를 더 좋아하는 거 같다?”

    “응. 나 케이트 언니 동생하기로 했어! 히히히.”

    재혁의 말에 재희가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웃었고, 그런 재희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린 재혁은 구두에 발을 꿰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잘 됐네. 다들 좋아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늦을 지도 모르니까 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할머니.”

    “오야. 조심히 댕겨와.”

    그렇게 문을 닫고 재혁이 떠났고, 오빠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희는 할머니를 향해 재혁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일까 물었다.

    그런 재희의 물음에 할머니는 그저 호호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집을 빠져나온 재혁은 택시를 타고 케이트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최고층에 루프탑 바까지 있는 최고급 호텔.

    케이트는 저렴한 곳에서 머물길 원했지만, 굳이 재혁이 이곳으로 그녀가 머물 방을 잡아주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평소 고집을 부리지 않는 재혁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케이트는 식당 자리에 앉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고, 머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등장한 재혁이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재혁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늦었지?”

    “늦긴 무슨. 정각에 왔는 걸. 어, 그보다 너 땀이···. 잠깐만, 손수건이 분명 여기 있었는데···.”

    날씨가 제법 더웠기에 재혁의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흘렀고, 케이트는 그걸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닦아주려 했다.

    흐르는 땀을 가만 두었다가 에어컨 바람에 감기라도 들면 이래저래 선수로서 고생일테니까.

    그렇게 손수건을 쥔 손을 재혁의 이마로 뻗을 때.

    툭.

    “!”

    재혁이 손을 올려 케이트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그런 케이트를 향해 재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 책임질게.”

    “···뭐? 갑자기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들리는 그대로야.”

    당황한 듯 살짝 어깨를 움츠린 케이트를 향해 재혁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줘.”

    < 222. 책임 > 끝

    ⓒ 권주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