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21화 (221/225)
  • < 221. 떠나는 자, 남는 자 >

    평생을 축구와 함께 해 온 과르디올라 감독은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여러 종류의 선수들을 만났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선수, 재능은 평범했으나 노력이 대단했던 선수, 몸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 머리로 축구를 하는 선수 등등.

    성격들이 천차만별이었던 것처럼, 선수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들이 뚜렷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 속한 만큼 다들 남들과 경쟁했을 때 자신있는 구석들이 한두 가지씩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재혁의 존재는 단연 특별하다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단언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은 지금껏 수없이 만나봤다.

    재혁에겐 그 이상이 있었다.

    바로 본질을 보는 눈.

    과르디올라가 본 최재혁은 축구를 본질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자질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수 최재혁이 아닌, 사람 최재혁을 곁에 두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그런 과르디올라의 말에 재혁은 머쓱했는지 간지러운 콧등을 긁적였다.

    “절 너무 좋게 봐주신 거 아닌가요?”

    “후후, 과연 그럴까?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니 모두 이야기하도록 하지. 지난 며칠 동안 구단으로 최재혁, 너에 대한 문의가 몇 번이나 들어온지 알고 있나? 무려 14번이야. 같은 구단이 수차례 문의를 넣은 것도 있지만, 적어도 10개의 다른 클럽들이 너를 주목하고 있다는 이야기지.”

    “생각보다 많네요.”

    “그냥 많기만 한 것도 아니야. 그 구단들 중엔 감히 자신들이 최고라 칭하는 구단들도 있으니까.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같은 곳들처럼 말이지.”

    지난 시즌 유럽의 챔피언이 된 것은 그와 재혁이 속한 맨체스터 시티였으나, 과르디올라 감독은 감히 최고라는 단어를 다른 구단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올해는 자신들이 정상에 섰지만, 명가라는 것은 일 년만에 뚝딱 완성하는 게 아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쌓아올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들이 속한 맨체스터 시티는 강호라 불릴 기반은 닦았지만, 명가는 되지 못했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 부분을 짚으면서 재혁에게 계속 말했다.

    “최고는 최고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들이 보기에 최재혁, 너는 그들이 쌓아 올린 명성 위에 올라설 자격을 갖춘 선수인 거지.”

    “자격이라···.”

    “그렇기 때문에 난 너를 꼭 붙잡고 싶은 거다. 지난 1년을 함께 하면서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너라면 그들이 쌓아 놓은 최고라는 ‘기준’을 확실히 부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믿게 됐으니 말이다.”

    “!”

    최고의 기준을 부순다는 말에 힘을 준 과르디올라 감독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니, 단순히 진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결연하기까지한 그의 의지가 눈빛을 타고 바로 전해지는 듯 했다.

    재혁은 그런 과르디올라를 향해 무어라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잠시간 눈을 감은 재혁은 생각에 잠겼고, 물컵을 기울여 목을 축인 과르디올라 감독은 계속해서 말했다.

    “최고의 기준을 부수겠다는 건 다른 구단들의 존재를 부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오히려 난 그들을 존중하고 있어. 그만한 탑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을지 대강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거지.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있다. 너와 함께라면 그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

    “그래서 오늘 너를 찾아 이곳에 온 거란다. 밤늦게 불쑥 찾아오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하루라도 빨리 네 생각을 듣고 싶었거든.”

    “확실히···, 이렇게 찾아와주신 게 정말 놀랍긴 해요. 설마 감독님께서 오실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 했거든요. 제 머리 상태를 보시면 바로 아시겠죠?”

    반나절을 침대 위에 누워있던 탓에 뒤가 잔뜩 눌린 머리를 가리키자 과르디올라 감독은 가볍게 웃었고, 재혁도 그를 따라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제가 축구를 해온 건 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어요. 그렇게 성공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말예요.”

    이제 20살 짜리가 하는 말치곤 제법 무거웠지만, 그동안 재혁을 경험하면서 그가 평범한 20살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웠기에 과르디올라 감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재혁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오늘 감독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잘못된 목표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이건 감독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할 건 확실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해야 할 것?”

    “네.”

    되묻는 과르디올라를 향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인 재혁은 과르디올라 감독 뭇지 않을 정도의 진지함을 담아 물었다.

    “감독님께서 목표로 하시고 계신 건 단순히 저 하나를 붙잡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그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저도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

    재혁의 말을 들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두 눈에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다.

    정말 뜻밖의 한 마디를 재혁에게서 듣게 된 탓이었다.

    설마 이 어린 선수가 도리어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할 줄이야.

    보통의 20살 짜리 어린 선수가 저런 말을 했던 것이라면 누구라도 당돌하다 했을 발언이었지만,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히려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내가 사람을 보긴 제대로 봤어! 그래,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야지!”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후후, 무슨 소릴. 오히려 이걸로 더 확신이 섰어. 어떻게 해서든 최재혁, 너를 설득해야겠다는 그 확신이 말야.”

    “그래요? 그러면 말씀을 한 번 들어볼까요?”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연신 미소를 떠올리던 두 사람.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더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로 대화를 멈춘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혹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아 그런 것이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최재혁, 맨체스터 시티와 5년 재계약!]

    [주급만 40만 파운드! 리그 최고 수준의 대우! 최연소 선수로서 프리미어 리그 역대 연봉 랭킹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과르디올라 감독, “최재혁과 재계약을 맺을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

    [최재혁 “감독님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재계약에 싸인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고의 파트너가 이번 시즌에도 뭉쳤다!]

    며칠 뒤 스포츠 신문사들의 헤드 라인에 도배된 기사들이 둘의 대화가 잘 풀렸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

    “흐흑···, 흑···. 흐윽···.”

    “울지 마. 최선을 다 했잖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하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국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잔디 위에 무너져 눈물을 흘렸다.

    강호 벨기에를 상대로 펼친 8강전.

    그 결과가 3대1이라는 완패였기 때문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다들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 것이다.

    그나마 주장인 김수용이 묵묵히 선수들을 위로하며 등을 쓸어주었지만, 그 또한 속이 편치 못했다.

    벨기에의 핵심 선수인 케빈 데 브루위너가 그에게 다가와 전한 말 한 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아마 재혁이가 있었더라면 우리도 위험했을 겁니다.”

    “···.”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한국이 8강까지 올라올 수 있었고, 힘들게 올라온 8강에서 완패를 당했는 지를 말이다.

    부상을 당해 경기장이 아닌 관중석을 지키게 된 재혁에게 당당하게 선언했지만, 자신들은 재혁이 없으면 세계와 겨루기엔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지만, 실제로 경험하기 제법 가슴이 쓰렸다.

    그 쓰라림을 같이 공유하고 있던 신형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수용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또 다른 걱정이 하나 더 얹혀 있었고, 형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형. 오늘이 마지막인 거지···?”

    “···.”

    “미안해. 마지막 월드컵이었는데···.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수용이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예정이라는 것을 은연 중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쉬워하며 신형민이 그의 유니폼을 붙잡고 계속 물었다.

    “그치만 조금만 더 뛰면 안 돼? 4년 뒤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계속 선수로 남아 있을 거면, 은퇴는 좀 더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지 않아?”

    김수용은 유니폼 끝에 매달려 있는 형민의 손을 살폈다.

    이제 자신이 떠나고 나면 팀을 이끌고 가야 할 고참이 될 신형민.

    수용은 그런 형민이 안쓰러웠지만, 이 또한 필요한 경험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되뇌었고,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형민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주며 말했다.

    “형민아. 아쉽지만 그건 함께 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지금도 기량이 떨어지는 게 바로 느껴지는 상황이야. 4년 뒤엔 어떻게 될 지 더더욱 장담할 수 없겠지.”

    “···.”

    “어쩌면 지금은 네게 무거울 지도 몰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고 싶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네가 이 무게를 분명 버텨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까 울지말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이제부턴 네가 선두를 맡아야 되니까. 그리고 그에 걸맞는 실력도 꼭 키워라. 알겠지?”

    수용의 말에 형민은 울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계속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형민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여준 수용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한 번 겪은 일이었으니까.

    아마 오늘을 마지막으로 형민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 층 더 성장한 선수가 될 것이다.

    수용은 그런 미래를 기대하면서 형민의 등을 쓸어주었고,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찾았다. 그곳에 앉아 있는 재혁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수용이 또 한 번 웃었다.

    자신은 비록 팀을 떠나지만, 최고의 조력자가 남아 있을 것이니.

    마음 편히 국가대표팀을 떠날 수 있음에 안도한 미소였다.

    하지만 또 한편에 떠오르는 아쉬움에 수용은 하늘을 보았다.

    ‘너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정말 아쉽구나.’

    재혁과 함께 뛰면서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수준 높은 축구가 무엇인 지를 경험할 수가 있었다.

    그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수용은 도무지 식지 않는 가슴을 때리면서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같이 뛰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현실을 직시한 수용은 진하게 남아 있는 아쉬움 만큼, 앞으로 성장할 재혁과 팀을 기대하며 굳어 있던 발을 움직였다.

    ‘그럼 앞으로 뒤를 부탁한다, 최재혁. 너라면 분명 나보다 더 잘할 수 있겠지.’

    대한민국의 러시아 월드컵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며칠 뒤 정오.

    인천 공항에 한국 대표팀이 도착했다.

    < 221. 떠나는 자, 남는 자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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