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19화 (219/225)
  • < 219. 내기와 운 >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에 어안이 벙벙했던 선수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서로를 향해 계속 소리쳐 물었다.

    정말 우리가 이겼냐고.

    브라질을 꺾고 8강에 오른 게 우리가 맞냐고 말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관중석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대신 들려주었다.

    “이겼다아! 우리가 이겼어!”

    “선수들 정말 고생했어요!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이게 꿈이야, 생시야?! 크아아! 정말 미칠 거 같네! 나 오늘 돌아버리면 어떡하지?”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네가 도는게 문제겠냐? 돌고 싶으면 돌아버려! 모든 게 뒤집어진 마당에, 돈 사람이 정상인이야!”

    선수들보다 더 크게 기뻐하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치고 있는 관중들.

    몇몇은 단순히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관중석 담을 넘어 경기장에 난입했고, 진행 요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내달린 그들은 최재혁을 향해 달려간 뒤 그를 끌어안고 크게 외쳤다.

    “사랑합니다, 최재혁 선수! 정말 사랑해요! 8강까지 올려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저 해외 축구 처음 볼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었어요! 클럽은 쿼드러플, 대표팀은 8강이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하하···, 저 혼자 한 일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재혁이 웃으며 대답했지만, 뒤늦게 둘을 잡으러 온 진행 요원 때문에 말이 과연 제대로 전해졌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끌려가는 와중에도 기쁜듯 웃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숨을 토하면서 잔디에 뒷통수를 맞대고 드러누운 재혁이 하늘을 보았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90분 동안은 볼 수 없었던, 푸르고 높은 하늘이었다.

    그걸 이제야 볼 수 있게 된 재혁은 베시시 웃으며 슬쩍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를 세워 V자를 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은 한 말은 꼭 지킨다고, 아주 조그맣게.

    그런 재혁의 혼잣말을 주워들은 것인지, 케이트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사실 입모양도 보이지 않을 거리였지만, 재혁이 무슨 말을 했을 진 바로 짐작이 갔으니까.

    “저런 걸 보면 마냥 귀여워 해주고 싶어도 귀여워해줄 수 없다니까.”

    케이트는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린 후 남들 몰래 물기가 남은 눈가를 찍었고, 재혁이 그런 것처럼 똑같이 손으로 V자를 그렸다.

    ***

    [한국이 이겼습니다! 우리 나라가 브라질을 꺾고 8강에 진출합니다!]

    [선수들, 정말 대단했습니다!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 꺼지지 않는 열정! 경기를 지켜보는 제가 다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선수들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이게 무슨 개같은 경우야?!”

    꽈앙!

    경기를 중계해주던 TV 화면을 향해 책상 의자를 집어 던진 조강연 부회장.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콧바람을 씩씩거렸다.

    액정이 깨지고 바닥에 떨어진 TV는 지직거리는 잡음을 쏟아냈고, 사무실 안에서 큰소리가 나자 밖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찾아와 물었다.

    “부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이게 지금 괜찮은 걸로 보여?”

    “헉! TV가···. 그, 금방 치우겠습니다.”

    “치우긴 뭘 치워!”

    “그렇지, 그렇지. 치워야 할 게 TV만이 아니지.”

    “?!”

    부회장의 거친 한 마디를 비서가 아닌 낯선 목소리가 대신 받았고, 노인이 끌끌거리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강연 부회장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뒤 볼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잊기 힘든, 아니.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고명준 명예회장.

    늙은 여우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설렁설렁 사무실 안으로 기어들어온 고명준 명예회장은 창가에 위치한 책상 자리로 향하더니 조강연 부회장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상부터 시작해서 의자에, 수납장들···. 전부 개인 물건들이었지? 가지고 가려면 빼야 할 물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비서 혼자 그 일을 다 하는 건 무리가 아니겠나?”

    “···정말 이렇게 일을 하셔야겠습니까?”

    “흐음, 글쎄. 내기는 내가 하자고 했던 게 아닌 거 같은데.”

    뿌득뿌득, 이를 갈며 간신히 한 마디를 토해낸 조강연 부회장을 향해 능글맞은 얼굴로 으쓱인 고명준 명예회장은 책상 끝에 놓여 있는 명패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목각에 바른 금칠이 유난히 반짝이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명패였다.

    “알기로 조강연 부회장이 먼저 시작했던 내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걸 물러보시겠다?”

    “세상에 어느 누가 직함을 걸고 내기를 하겠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임감독의 책임감과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농담이었습니다. 실제로 8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니, 실없는 농담이 제법 요긴하게 작용한 거지요.”

    꿀꺽, 말을 끝내며 큼직하게 목울대를 꿀렁인 조강연 부회장은 미간을 타고 흐르는 땀 한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누가 보면 추하다 할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추해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기에 조강연은 체면따윈 진즉 버렸다.

    그런 조강연의 얼굴을 명패 너머로 뚫어져라 지켜보던 고명준 명예회장은···.

    “어허, 그럼 조강연 부회장은 나와 임종철 감독, 그리고 이사진을 포함한 사람들을 상대로 단순 농.담.을 이용해 기만을 한 것인가?”

    “···!”

    “이래서야 내 꼴이 많이 우스워지겠는 걸? 새파란 젊은 중년 둘이서 나눈 농담 따먹기에 주제를 모르고 끼어든 것 같잖은가?”

    “그···, 그건···!”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 듣고 있나? 대체 부회장직은 뭘로 어떻게 따고 먹은 건지···.”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조강연.

    그런 상대를 향해 쯧쯧 혀를 찬 고명준은 짧은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일축했다.

    “지랄 그만하고 방 빼.”

    ***

    “그렇게 간만에 돌아온 뒷방 늙은이가 새파란 놈 하나를 찍어내 버린 거지. 적어도 그 아비한텐 이래저래 유용하게 빼먹을 구석이 많은 친구였는데 말야.”

    “그럼 계속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했어야지. 여기에 나온 게 내 탓인가? 나오게 만든 그쪽들 탓이지!”

    “쯧쯧, 하여간 저 늙은 놈은 저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성질 하나를 못 죽이고 있네. 한동안 조용히 지낸 게 용하구만, 용해.”

    고명준 명예 회장을 포함해 둥그런 탁자에 모여 앉은 세 사람.

    세 사람은 하나같이 머리가 세고, 이마엔 나이에 견줄만한 주름이 잔뜩 져 있었으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고집은 그들의 나이를 잊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하연종 명예 회장과 이용정 자문위원.

    평범하지 않은 이력의 소유자들은 연신 서로를 헐뜯으며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히려 그건 이쪽에서 해줄 말이야! 어느날 갑자기 쥐죽은듯 살겠다면서 칩거 생활을 하다가 툭 튀어나와서, 뭐? 조강연이랑 내기? 이 친구야, 지금까지 나이를 내기 따먹기로 해먹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추태야?”

    “내가 추태를 부리고 싶어서 부렸나? 불문율이 깨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화가 나서 그랬지.”

    “불문율이 깨진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야, 진짜 몰랐던 거야?”

    “우리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가 언젠데. 그러니까 더더욱 자네의 행동이 모나 보였던 거지.”

    선수들이 세대에 맞춰 교체되듯, 협회도 마찬가지다.

    고이면 썩고, 썩으면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으니.

    저들은 그걸 구색 좋게 세대 교체라고 칭했지만, 고명준의 눈엔 방임한 걸로 보이지 않았기에 잔뜩 비죽인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말했다.

    “내가 이 곳을 그냥 떠났어? 장문구 전회장, 그 놈이 하도 지랄을 해대니까 정리를 하려고 책임 지고 같이 나간 거지!”

    “뭐, 그거야 우리도 알지. 그리고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니까.”

    “고맙게 생각하면 제대로 굴리고 있어야 할 거 아냐? 조강연이 그놈이 따로 선수 명단까지 뽑아서 다녔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자네들만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긴가?”

    “···.”

    “정신 똑바로 차리게. 적어도 이곳에서 자연스런 순환과 방관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니. 한 번 썩기 시작하면 파내는 정도론 안 돼. 전부를 들어내야 한다고.”

    고명준의 말에 현실을 통감한 것인지 두 노인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2002년 이후 꾸준히 성장하던 한국 축구는 2010년을 기점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2011년을 기점으로 바닥을 향해 달렸다.

    일명 ‘히딩크의 유산’들이 모두 대표팀을 떠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7년.

    자신들이 아직도 답보 중인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고명준의 말에 서로 눈치를 살피던 둘은 지난 경기를 떠올리며 넌지시 운을 뗐다.

    “그래도 이번 대회에서 8강까지 올라간 것은···.”

    “염치도 없이 그걸 협회의 작품이라고 떠들려는 건 아니겠지?”

    “···.”

    “정신 차리게들.”

    따끔한 한 마디에 다시 고개를 떨군 둘은 눈만 굴렸고, 고명준은 습관처럼 혀를 찬 뒤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우린 한 게 아무 것도 없어. 다른 협회들에 비해 포상금이라도 제때 넣어주는 거? 그거마저 못 했으면 대체 뭘하고 있었을 생각이었는데? 이번 일은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기적을 발한 기형적인 선수들의 작품이야. 그걸 괜히 탐내려 하지 말고, 우리 걸 할 생각을 하라고!”

    “후우!”

    두 노인의 입 밖으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나 틀린 말이 없었기에 반박할 구실이 없어 그저 숨만 토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졌던 것일까.

    나름 최선을 다해온 것 같았는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니. 둘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뚫어져라 책상을 노려보았고,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고명준이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슬며시 입술을 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앞으로 그 일을 해줄 인재가 있다는 거겠지.”

    “인재가 있다고?”

    “임종철 감독. 감독 계약이 끝나면 협회에 자리를 하나 내달라더군.”

    “임감독이 협회에 자리를?”

    “이번 8강 진출을 토대로 계속 감독직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서로를 마주보며 물은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였다.

    8강이란 대업을 달성한 걸 보면 분명 능력이 있는 감독이었고, 예정대로라면 당연히 재계약을 제의하는 게 옳았던 것이다.

    그런데 협회직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두 노인을 향해 고명준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수술해야 할 곳이 내부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본 게지. 눈처럼 감도 좋은 놈이야.”

    “!”

    “원하는 직함도 벌써 생각해두었더군. 일단은 유소년 쪽부터 체계를 다듬어 볼 생각을 하고 있던데, 그러라고 했어.”

    “그걸 벌써 약속했다고?”

    “그럼 자네들은 월드컵 8강이란 업적을 달성한 감독이 원하는 진출을 막을 힘이 있나? 협회 아래 이사진들이야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무시할 수 있어?”

    “···!”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야. 마침 조직도를 개편을 해야 할 때였으니, 시기가 좋았지.”

    “하지만 당장 다음 대회 감독 자리가 공석이···.”

    “그것도 미리 생각해 두었네. 임감독 밑에서 오랫 동안 같이 생활한 강코치가 있는데, 대행 정도론 충분히 쓸만 하다더군. 써보고 괜찮으면 그 친구로 다음 4년을 보내면 되겠지.”

    “···.”

    고명준의 말을 모두 들은 두 사람의 머릿속엔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했다.

    이 늙은 여우는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하고 움직였던 것이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늙은 여우가 어떤 인간이었는 지를 기억해내고 침을성을 삼켰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을 치르기 전까지 부진한 성적으로 여론과 언론, 그리고 불만에 찬 몇몇 협회인들의 뭇매를 맞으며 흔들릴 때 강력하게 그를 지지하며 지키던 인물이 바로 고명준이었으니.

    이 또한 처음부터 치밀하게 설계된 인사였으리라.

    다만 두 사람은 그런 고명준을 향한 불만은 있었지만, 불쾌해 하진 않았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오히려 다시 돌아온 그를 반기며 헤어지기 전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렇게 사무실 문밖으로 떠나려는 고명준을 향해 이용정 자문위원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8강 준비는 어떻다던가? 상대가 아마 벨기에였지?”

    “아, 8강.”

    무려 브라질을 꺾고 8강까지 올라갔으니, 더 높은 성적을 기대해도 괜찮겠냐는 의미가 담긴 물음이었다.

    그런 이용정 자문위원의 말에 고명준 쓰게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게도 여기서 운이 다했다더군.”

    “운이 다해?”

    ***

    “단순 근육통인줄 알았는데 경골 쪽의 피로골절이래.”

    “···.”

    “조기에 발견해서 푹 쉬면 금방 회복 될거라는데, 이래서야 다음 경기는 무리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재혁을 향해 케이트가 손에 쥐고 있던 신분증을 던졌다.

    < 219. 내기와 운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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