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16화 (216/225)

< 216. 흐름 >

후반전도 전반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 속에서 진행됐다.

브라질은 끝도 없이 공세를, 한국은 어떻게든 버티기 위한 수세를 펼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5분, 10분, 그리고 15분.

시간이 흐를수록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국 관중들이었다.

경기에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안색은 공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 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 것이다.

지금처럼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을 땐 희망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움켜쥐었다가···.

뻐엉!

“아···!”

신형민이 때린 슈팅이 골대를 크게 빗나가면서 득점 기회가 무산되자 다들 똑같은 탄식을 흘리면서 움켜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젠 정말로 득점이 필요한 순간이거늘.

남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손톱을 물어 뜯던 사람들이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30분도 안 남았어···. 하아, 정말 여기서 끝인가?”

“브라질을 상대로 이만큼 버텼으면 대단한 거긴 한데,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왔으면 이기는 걸 보고 싶은데···.”

독일을 꺾고, 브라질을 상대로 나름 선전하고 있는 한국 대표팀.

이것도 대단한 성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8강이라는 욕심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며 관중들은 손을 모았다.

부디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길, 그런 생각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이어지는 경기를 지켜보며 침을 삼켰고···.

“무너져라···, 얼른 무너져!”

같은 한국인이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조강연 부회장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조별 예선을 통과해 16강에 진출했을 때 받았던 충격.

그런 충격은 한 번이면 족했다.

설마 이 대표팀으로 8강이라니.

조강연 부회장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쓰게 웃었다.

“애초에 16강에 올라온 것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었지. 큭큭큭, 임종철이. 네 선수 시절 때처럼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 이번에도 꺾이는 건 너다. 탈락이 정해지는 순간 뒷방 늙은이랑 같이 그대로 사라져주면 되는 거야. 그래, 그래주면 돼.”

다가올 미래를 위해 브라질이 꼭 힘내주길 바라며 비릿하게 웃어 보인 조강연은 때마침 브라질이 또 한 번 한국의 골문을 노리는 장면이 화면에 떠오르자 불끈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엔 제발 승리를 확정지을 추가 골을 터트려주길.

그런 조강연의 기세를 이어 받은 것인지 브라질의 공격은 더 날카롭게 예기를 뿜으며 한국의 수비수들을 베어 넘겼고, 그 중심에 선 제수스는 파고들 공간을 찾아 고개를 흔들다가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재혁을 발견하곤 낯빛을 굳혔다.

‘지친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최재혁이야.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재혁과 같은 팀으로 활약하며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이해한 제수스였다.

다른 선수들은 몰랐어도 최재혁 만큼은 보이는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제수스는 지친 재혁을 상대로도 만전을 기했다.

윌리안의 패스가 자신에게 이어지자 가장 먼저 최재혁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고, 제수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장 공을 옆으로 굴리면서 빈 공간을 찾아 빠졌다.

공을 잡고 있는 자신이 옆으로 빠지니 자연히 재혁도 그를 따라 외곽으로 이동했고, 재혁이 이동하면서 한국의 수비 진영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제수스의 두눈이 반짝였다.

수비의 핵인 재혁의 위치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국의 수비 진영.

그 뛰어난 조직력 때문에 브라질은 아직까지 추가 득점을 성공시키고 있지 못 했지만, 상대의 조직력이 잘 조립된 태엽들처럼 뛰어났던 덕에···.

‘이제 열린다!’

파앙!

정확한 타이밍에 열리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던 제수스는 갖고 있던 공을 안으로 찔러 넣어주었다.

그렇게 공이 굴러가면서 노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에게 패스가 연결 됐고,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플레이가 이루어진 것에 다들 기대에 찬 시선으로 공을 받은 선수를 지켜보았다.

브라질의 10번, 네이마르.

한국의 수비 진영 정중앙에서 공을 받은 그는 제수스의 미끼 플레이에 엮여 측면으로 빠져나간 재혁을 슬쩍 살핀 뒤 드리블을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우리가 너를 피하는 것이라 말하겠지만, 그건 틀렸어! 우린 11명이서 하는 축구를 하는 거다!’

최재혁을 포함한 한국의 수비는 뚫기 쉬운 상대가 아님을 네이마르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피했다고 생각하면 태클이 날아왔고, 뚫었다고 생각하면 어깨를 부딪치며 몸싸움을 걸어왔으니.

마치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발이 빠진 것처럼,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항상 재혁의 존재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녀석의 존재를 시작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면···.

‘적어도 반대 공간은 우리가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어!’

파앙!

“크윽!”

생각을 끝내며 행동에 들어선 네이마르가 드리블에 속도를 붙였고,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한국 선수는 갑자기 빨라진 네이마르의 방향 전환을 쫓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걸로 우선 한 명.’

네이마르는 쓰러지는 선수의 곁을 지나치면서 다음 대상을 찾았고, 측면 수비수와 중앙 수비수 사이에 벌어진 틈을 발견한 뒤 미소를 떠올렸다.

마치 층을 이루듯, 벌어져 있는 두 선수의 간격.

아마 자신의 드리블 돌파를 견제하기 위해 나름 머리를 써 간격을 벌려둔 것이리라.

하지만 저런 수비 방식이 통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실력이 자신과 대등할 때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런 수비는···.

‘얼른 뚫어 달라고 재촉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지!’

마음을 정한 네이마르의 두 다리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앞길을 막아서는 이장호를 상대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장호.

그가 머릿속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네이마르는 옅게 웃으면서 공의 양옆을 발끝으로 이리저리 건드렸다.

‘드리블 방향을 강제하고 싶겠지. 기왕이면 뒤에 위치한 수비수와 협력 수비하기 적당한 위치로 말야.’

공이 꺾이는 방향에 따라 이장호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으니.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못 알아차리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슬쩍, 슬쩍 거리를 좁히면서 돌파를 준비하던 네이마르는 곧 마음을 정한듯 표정을 지웠고.

투웅!

오른 발등으로 공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네이마르의 드리블에 속도가 붙자 이장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침을 삼켰다.

‘···드디어 온다!’

그동안 뒤를 봐주던 재혁이가 잠시 반대쪽 측면으로 빠진 상황이었다.

이번 공격은 어떻게든 자신이 막아야 한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 이장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달려드는 네이마르의 드리블이 그가 가장 이상적으로 예상했던 수비 코스 안쪽으로 들어오자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런 코스라면 자신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 쳤고, 자신감은 곧 행동으로 나타났다.

토끼를 몰듯, 직선 코스는 내주지 않고 네이마르를 서서히 안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 이장호.

그는 곁눈질로 자신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최태성의 위치를 확인했고.

‘조금만 더 오면 돼! 조금만 더 오면 네이마르의 코스를 완벽히 틀어막을 수 있어!’

‘좋아, 그 상태로 조금만 더···!’

최태성도 그런 이장호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고 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네이마르가 둘 사이에서 포개지는 시점.

그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고 달려든다면 이번 수비는 재혁이가 없어도 둘만으로 충분할 것이리라.

그렇게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드는 네이마르를 노려보던 둘은···.

‘바로 지금이다!’

기다리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오자 각자 다리와 어깨를 걸었다.

이걸로 일단 하나 성공이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네이마르의 발밑에 있는 공을 노리던 두 사람은···.

‘이걸 기다렸다!’

파앙!

“?!”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라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헛숨을 삼켰다.

분명 내미는 어깨에 몸이 걸려 흔들리고, 뻗는 다리엔 공이 걸렸어야 했는데.

그들이 상상했던 행동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어진 게 없던 것이다.

레인보우 플릭.

구르는 공을 양발 사이에 끼워 허공으로 띄웠던 네이마르는 태클의 압박에서 벗어났고, 몸을 밀고 들어오는 상체 몸 싸움은 떨어지는 공을 향해 가슴을 뻗으면서 피한 것이다.

이장호와 최태성은 그렇게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면서 넘어졌고, 화려한 기술로 수비수들을 벗겨낸 네이마르를 향해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이스! 역시 네이마르다!”

“세상에, 봤어? 네이마르의 드리블 돌파를 봤냐고?! 저게 우리의 슈퍼스타야!”

“가라! 얼른 골까지 넣어버려!”

아찔했던 상황을 뚫어내면서 방금까지 그를 긴장시켰던 감각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은 쾌감이 되어 온 몸을 휘감았고, 사방에서 터지는 함성 소리는 지쳐가는 그의 근육에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렇게 박스까지 다가간 네이마르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이걸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이 미소라는 형태로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다.

최종 수비수인 고영훈과 지금까지 멋들어진 선방들을 선보였던 정형우가 자신이 때릴 슈팅에 대비하기 위해 발을 모으는 게 보였지만, 네이마르는 오히려 그런 상대들의 움직임을 바로 읽으면서 또 다른 자신감을 형태로 만들었다.

오른발 인프론트 슈팅.

정확하게 감긴 공은 골대 오른쪽 구석 상단을 노리고 날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네이마르의 슈팅이 그리는 포물선을 확인한 두 선수들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다리를 뻗어도 안 닿는다···!’

‘몸을 날린다 해도 내가 저걸 막을 수 있을까?’

왼쪽 측면에서 골대의 오른쪽 상단 구석을 노리고 때릴 때 그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프론트 슈팅 코스.

이대로 슈팅이 완성된다면 저건 무조건 골로 연결될 것이리라.

한국의 선수들도, 관중들도, 그리고 중계진들도, 모두 똑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결국 여기서 무너지는 구나.

그동안의 고생이 8강이란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떨구던 사람들은···.

파앙!

“?!”

큰소리와 함께 네이마르의 슈팅이 크게 꺾이는 걸 확인하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당황한 사이에서 주심은 휘슬을 불어 코너킥을 가리켰고, 중계진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크게 소리쳤다.

“최재혁! 최재혁 선수가 몸을 날려 네이마르의 슈팅을 몸으로 막았습니다!”

“이건 큽니다! 꼼짝없이 당하는 줄 알았거든요! 슈팅을 때렸던 네이마르 선수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죠?”

“하마터면 2골 차이로 무너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난 대표팀! 집중력을 잃지 말고 코너킥 수비를 준비해야겠습니다!”

***

“저게 또 안 들어간다고?!”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저걸 막을 수 있냐고?!”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국 스태프들과 달리 브라질의 벤치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이번엔 분명 들어갈 거라 예상했었는데, 그걸 또 막아냈다는 것에 다들 침착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 어떤 때보다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모은 티테 감독은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위험하다. 방금 저건 어떻게 해서든 넣었어야 했는데.’

축구엔 흐름이란 게 있다.

흐름을 타는 팀은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게 되고, 그 분위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경기 결과가 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브라질은 그 흐름을 잃고 말았다.

저 한국의 어린 선수.

최재혁이라는 꼬마 한 명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 바뀐 흐름은···.

뻐엉!

“···!”

경기장 위에서 바로 영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216. 흐름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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