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믿음 >
전반전 45분의 결과는 1대0.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브라질은 한국을 상대로 한 점을 앞서 나가며 8강을 향해 한국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단순히 한 걸음을 앞서 있을 뿐, 양 팀의 차이가 고작 1골이라는 점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일 수밖에 없었다.
45분동안 브라질이 겨우 1골밖에 성공시키지 못하다니.
“거의 기적이라고 봐야지요.”
브라질의 낙승을 예상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백인 해설자는 하프 타임동안 진행되는 분석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열심히 피력했다.
“네이마르를 위시로 한 브라질의 공격을 겨우 한 점으로 막아내다니. 이건 운이 좋았다고 밖에 따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당장 경기 지표를 한 번 살펴보세요. 어느 누가 이런 경기에서 한국이 겨우 한 점밖에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 예상하겠습니까?”
말을 끝내며 손을 뻗어 스크린을 가리킨 남성.
스크린 위에는 전반전 동안 기록된 양팀의 기록들이 떠올라 있었다.
7할로 크게 앞서는 점유율, 14번의 슈팅 횟수, 7번의 결정적인 득점 기회, 4배 이상 차이가 나는 패스 횟수와 그 외 등등.
지표상으로 오늘의 브라질은 단순히 압도적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으니.
백인 해설자 외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긍정을 표했다.
“한국을 응원하는 시청자분들껜 죄송한 말이지만, 이런 걸 보고 수준 차이가 느껴진다고들 하죠. 오늘 브라질은 한국을 상대로 한 수준 높은 축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이마르 선수도 대단했지만, 중원을 지배한 카세미루 선수와 쿠팅요 선수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죠.”
“맞습니다. 공격을 할 땐 한국 수비수들의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패스를, 수비를 할 땐 정확한 예측으로 공이 향할 길들을 요소마다 적절하게 끊어내고 있어요. 이런 점들이 오늘 브라질이 중간에 힘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대를 공략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지요.”
“단순히 공격만 뛰어난 게 아니라 공수의 밸런스를 토대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니, 후반전에서도 이만한 경기력을 계속 보여준다면 분명 브라질의 대승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칭찬일색.
추가골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브라질이 이어질 후반전에서 골대 앞에서의 디테일에 조금만 더 신경쓴다면 분명 대량 득점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얼굴에 떠오르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남자는 뚱한 얼굴로 지표를 지긋이 지켜보다가 뺨을 쓸어내렸다.
“글쎄요. 브라질이 분명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 맞습니다만···, 그걸 막고 있는 한국이 단순히 운에 기댄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예?”
“이쪽을 좀 자세히 살펴보시죠.”
툭툭, 스크린을 건드려 몇몇 특정 부분들을 확대한 남성.
그는 이후 전반전 주요 장면들 중 몇 장면들을 따로 뽑았고, 대체 무엇을 준비하고 있냐는 패널의 질문에 간단히 답했다.
“한국의 수비 지침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
한국의 수비 지침들이라니.
남성의 짧은 대답에 당황한듯 서로를 바라보았던 패널들은 계속해서 설명이 이어지자 목소리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틀린 말씀들은 아니었습니다. 브라질은 대단했고, 한국은 그에 압도당했죠. 하지만 브라질의 파죽지세를 단순히 운으로 막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 증거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는 선수···.”
탁!
“바로 최재혁 선수가 그 증거입니다.”
“최재혁 선수요?”
남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패널들이 눈썹으로 그림을 그렸다.
미간을 모아 찌푸리거나, 이마에 걸칠 정도로 높게 떠올리거나, 다들 남성의 설명이 기이하다며 각양각색의 표정들은 선보인 것이다.
그런 패널들을 대표해 처음에 목소리를 냈던 백인 해설자가 말했다.
“최재혁 선수가 물론 많이 뛰어주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브라질의 공세를 혼자 막고 있다고 설명하는 건 무리가 아닙니까?”
“저도 최재혁 선수 혼자서 전부를 막고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증거’라는 거였지요.”
“그 말씀도 잘 이해가 안 되는게···.”
수비란 결국 조직력이다.
개인적인 기술이 뛰어나 특정 선수를 막아내는 종류의 수비도 존재했지만, 일반적인 수비라 함은 팀과 팀 단위의 싸움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을 남성도 알고 있었기에 패널들의 의아함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한 선수의 영향력이 뛰어나도 한계라는 게 분명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런 반응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걸 보시면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실 겁니다.”
“이건···.”
“일단 먼저 보실 건 히트맵이죠. 전반전 동안 최재혁 선수의 활동 반경을 정리한 자료입니다.”
“굉장히 많이 뛰었네요.”
“엄청 뛰었죠.”
특유의 활동력으로 공이 있는 장소엔 어김없이 등장했던 재혁.
농담조로 점유율에선 뒤졌지만, 공이 있는 장소에 등장하는 중계 화면 점유율에선 재혁이 이겼다며 짧게 웃었던 남성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오늘 한국이 3백을 준비한 것은 단순히 브라질의 기형적인 톱3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3백의 앞에 최재혁을 배치하기 위해 그들은 3백을 선택했던 것이죠.”
“3백 앞에···, 최재혁을 배치하기 위해서요?”
“한국은 오늘 김정수, 고영훈, 최태성이라는 3백의 앞에 최재혁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양옆으로 조세정과 이장호라는 사이드 백들을 붙였고, 그 위론 김수용 선수를 포진시켰죠. 이게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바로 최재혁 선수에게 ‘커맨더’ 역할을 위임시킴과 동시에 ‘백업’의 역할도 함께 부여한 겁니다.”
“···?!”
“브라질이 어느 방향으로 뚫고 들어오든, 그들은 무조건 최재혁을 거쳐야 합니다. 최재혁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전개해도 백업으로 최재혁이 버티고 있죠. 그리고 그 결과 최재혁은 전반전에만 38회라는 스프린트 횟수를 기록했어요.”
“3···, 38회요?!”
“잠깐만요. 그거 진짭니까?”
상위급 팀들의 평균 스프린트 횟수가 보통 40회를 웃도는 정도였으니.
최재혁은 전반전에만 그에 근접한 횟수를 선보였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랐으나, 남성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순 스프린트 횟수에 벌써 놀라시면 곤란하죠. 그건 아직 최재혁 선수에 대한 설명에 반밖에 되질 않으니까요.”
“반밖에 되질 않는다고요?”
“말씀 드렸었죠. 백업 역할과 함께 커맨더 역할도 맡고 있다고. 저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시도한 공격의 대부분이 최재혁의 발끝에서 시작됐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술의 핵, 그 자체라고 설명할 수 있겠죠.”
꿀꺽.
침을 삼키면서 한 차례 말을 멈추었던 남성은 땀이 흥건한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공격과 수비, 어느 쪽에서든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브라질도 곤란했던 거겠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최재혁에게 걸어둔 고삐가 풀리는 순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최재혁 선수에게 걸어둔 고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셨습니까? 브라질은 파울리뉴에게 최재혁을 전담시켰습니다. 어떻게든 저 재능이 빛을 발하려는 것을 티테 감독이 틀어막으려고 안간힘을 쓴 거죠. 그리고···, 파울리뉴 선수는 전반전 내내 최재혁 선수를 쫓아다녔습니다.”
“그게···, 중요한 가요?”
“평범한 선수의 맨마킹이었다면 특별할 게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 선수가 전반전에만 38회의 스프린트를 기록한 선수라면 어떨까요?”
“‼”
“물론 파울리뉴 선수가 잘 활약해줘서 전반전은 무난하게 잠글 수 있었지만, 후반전은 과연 어떻게 될지. 이것도 경기를 지켜보는 나름의 관전 포인트가 되겠죠.”
***
“후욱···, 후욱···, 후욱···.”
젖은 수건을 머리에 올리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파울리뉴.
코끝에 매달린 땀방울들이 그를 간지럽혔지만 손을 올려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파울리뉴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호흡을 돌리고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호흡에만 온 정신을 쏟았던 파울리뉴는 옆에서 들린 티테 감독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괜찮은가?”
“예···, 그럭저럭.”
“전혀 그럭저럭인 얼굴이 아닌데? 뛸 수 없으면 언제든 말해. 바로 교체해줄 테니까.”
“후우,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슬슬 숨도 돌아오고 있고, 후반전을 뛸 체력도 남아있으니까요.”
그런 파울리뉴의 대답에 티테 감독은 빙긋 웃었다.
다른 누구보다 최재혁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던 그가 파울리뉴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경기에 임했는 지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헌신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모했는지 바로 알아본 티테 감독은 파울리뉴의 한 마디에 깃든 허세에 또 한 번 웃었다.
티테 감독은 위아래로 들썩이는 파울리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믿고 있겠네.”
선수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
지금은 그 믿음을 발휘할 때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티테 감독은 파울리뉴를 뒤로 한 채로 경기장으로 향했고, 때마침 후반전을 위해 걸어 나오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발견하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는 곁을 지나치는 최재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넌지시 말을 붙였다.
“힘들지 않은가?”
“저요?”
그런 티테 감독의 물음에 주변을 살핀 뒤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은 재혁.
티테 감독은 이에 고개를 끄덕였고, 재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오히려 안 힘든 게 이상한거죠. 경기를 설렁설렁 뛰었다는 말밖에 되질 않잖아요?”
“그것도 그렇겠군.”
“하지만 솔직한 말로 오늘 경기는 진짜 죽겠어요. 후반전엔 파울리뉴 선수 좀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하하하! 그랬다가 우리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브라질정도 되는 팀이면 그런 자신감도 보여주셔야죠.”
“자신감과 자만은 다른 거네. 실력을 통해 증명하는 건 자신감이지만, 과신해 자멸하는 건 자만이지. 그리고 그러는 최재혁 자네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최선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미소를 지은 티테 감독.
그만큼 파울리뉴가 압박 마킹 중이라면 적당히 체력 안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매순간 전력으로 질주한 재혁의 플레이를 지적한 한 마디었다.
그런 티테 감독의 의도를 바로 읽은 재혁 또한 씨익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야 저도 이기고 싶으니까요.”
“아직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건가?”
“‘아직도’가 아니에요. 저는 ‘항상’ 그래왔어요.”
“!”
이 또한 믿음이라.
재혁의 대답에 티테 감독의 두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그런 티테 감독을 향해 미소를 보이던 재혁은 시간을 확인하고 터널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슬슬 올라가볼게요. 대화 즐거웠어요.”
“나도 그랬어. 그럼 기대하고 있겠네.”
도저히 적장과 나눈 대화라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정했던 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 티테 감독은 재혁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그만의 ‘맹목적 믿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연 누구의 믿음이 더 강할지, 서로의 믿음이 어떤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지 기대하는 얼굴로 말이다.
그렇게 경기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후반전을 준비했고.
“하아, 후우.”
센터 서클 중심에서 서서 호흡을 고른 재혁은 고개를 들어 뒤지고 있는 점수판을 확인한 뒤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좋아, 그동안 잘 참았어.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한 번 날뛰어 보자.”
그리고 그런 재혁을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케이트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길 수 있는 거 나는 다 알아. 그러니까 보여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줘.”
< 215. 믿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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