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12화 (212/225)
  • < 212. 16강 >

    “아, 재혁이 왔냐. 어디 좀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봐.”

    “앉으라고 말씀하셔도···.”

    “대충 아무데나 앉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임종철 감독의 말에 대꾸하며 주변을 훑은 재혁.

    그는 정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방 안을 둘러보면서 머리를 긁었다.

    쌓여있는 서류들과 자료들, 아직 치워지지 않은 식기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마치 외계 침공이라도 당한 방을 둘러보면서 과연 어디에 앉아야할지, 그로선 도저히 임감독이 말을 한 ‘아무데나’라는 장소를 찾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나마 하나 더 있는 여분의 의자 위에도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기에 차라리 서 있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재혁은 그나마 침대가 깨끗한 것을 발견하고 그 위에 엉덩이를 내렸다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임종철 감독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

    “감독님, 혹시 안 주무셨어요?”

    “잠? 잤어.”

    “그런 것치곤 침대가 너무 멀쩡한데요?”

    “자긴 잤다니까. 장소가 침대가 아니라 의자였을 뿐이야. 필요할 때 잠깐씩 눈을 붙였어.”

    “그 정도로 누가 잤다고 해요? 잠깐 졸았다고 하지.”

    “그럼 어떡해. 당장 이틀 뒤에 브라질을 상대하게 생겼는데. 네가 내 상황이면 발 뻗고 침대에서 편하게 잘 수 있겠냐?”

    브라질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 길게 늘어지는 한숨을 토해낸 임종철 감독.

    그는 잔뜩 떡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최전방에 제수스, 양옆으로 윌리안과 네이마르. 그 뒤를 받쳐주는 선수들이 카세미루, 쿠팅요, 파울리뉴야. 공수의 균형, 신체적인 밸런스, 그리고 각자의 능력에 맞춘 커버링까지. 도저히 어떤 식으로 막아야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고.”

    “흐음. 확실히 네임 벨류만 따져도 엄청나긴 하죠.”

    “그렇다고 수비가 약한 것도 아니잖아. 중앙을 지킬게 티아고 실바와 미란다, 양옆은 필리페 루이스와 파그너···, 백업으로 포진한 선수들을 살펴도 절대 쉽게 뚫어낼 수 있는 방패가 아니지. ‘브라질’이 ‘브라질’답지 않게 수비까지 두터우니···. 후우.”

    암담한 현실에 또 한 번 한숨을 토해내던 임종철 감독은 머리를 긁던 손을 내려 다시 펜을 쥐고 중얼거렸다.

    “역시 계획대로 조 1위로 탈출을 했어야 했어. 조금 더 욕심을 부렸어야 했는데. 후우,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좀 더 욕심을 부리지 않은 내 실수다.”

    “하긴, 말씀처럼 건너편 동네가 좀 더 쉬워보이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남자라면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기 보다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지! 그래야 하는데···.”

    자신에 찼던 목소리는 금세 활력을 잃었고, 늘어지는 말꼬리를 간신히 붙잡은 임감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역시 브라질은 브라질이란 말야. 하루 밤낮을 고민을 해봐도 도저히 파고 들 수 있는 틈이 보이질 않아.”

    “감독님. 우리 독일도 이기고 올라왔잖아요. 브라질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독일 때랑은 달라. 독일은 강점과 약점이 확실했으니까. 오히려 파고들 곳을 찾기 쉬웠지. 하지만 브라질은 너무 흐려. 마치 물길을 헤매는 것처럼, 뭔가를 찾았다 싶으면 매복하고 있던 급류가 배를 침몰시키려 한단 말이지. 정말 골치 아파.”

    “흐음.”

    임종철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한 재혁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였다.

    독일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브라질이 강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양팀의 지니고 있는 전혀 다른 특색 때문에 대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리라.

    창의적이지만 선이 굵은 축구를 자신하는 독일과 그 창의성을 십분 활용해 선 자체를 지우는데 특화된 브라질은 분명 같은 강팀이지만 다른 스타일의 강점을 지닌 강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같이 상대의 뚜렷한 약점을 파고 들어 공략할 계획을 세우는 팀들에게 있어서 브라질은 그 어떤 팀들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약점에 현혹되는 순간 브라질의 칼날에 자신들의 목이 떨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또 한동안 전술지를 노려보던 임종철 감독은 해결되지 않는 복잡함에 머리를 헝클더니 냉수를 찾았고, 재혁은 냉수를 단번에 들이키는 임감독을 빤히 바라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감독님. 간만에 그거나 해볼까요?”

    “그거? 뭐?”

    “그거요. 축구 장기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씨익 미소를 떠올린 재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술지와 펜을 찾았고, 종이 위에 가로와 세로 선들을 죽죽 그어대며 턱짓으로 비어있는 자신의 건너편 자리를 가리켰다.

    이에 눈썹을 꼬았던 종철은 어깨를 으쓱인 뒤 재혁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더니 나랑 놀자는 거냐?”

    “뭐 어때요. 옛날에도 같이 자주 했잖아요?”

    “그거야 네가 경기를 못 뛸 상황이었으니까 전술 훈련의 일환으로 그랬던 거지. 그래서 어떤 팀들로 하자고?”

    “당연히 한국과 브라질이죠. 참고로 제가 한국입니다.”

    “진심이냐?”

    툭, 툭.

    선수명들이 적힌 말들을 판 위에 내려놓는 재혁을 향해 임감독이 물었고, 이에 재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머리도 식힐 겸 가볍게 하는 거잖아요? 재미로 하는 거죠, 재미로.”

    “후, 그래. 내가 얼마나 골치를 썩고 있었는지, 너도 좀 겪어봐라.”

    그렇게 시작된 축구 장기의 룰은 비교적 간단했다.

    선수 말들을 포메이션에 맞게 내려놓고, 축구공을 소유한 팀의 선으로 공격자 3번, 수비자 4번의 행동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 축구에 비하면 정말 단순하고 간단했지만, 3번과 4번이라는 행동 제한 안에 원하는 플레이를 만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으니.

    간단한 룰에 비해 나름 머리와 상황을 읽는 분석력을 요하는 게임이었다.

    임종철 감독은 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말들을 움직였다.

    “파울리뉴가 윌리안한테 패스를 주고 그 사이에 네이마르가 안쪽으로 컷인.”

    “그럼 저는 최재혁과 김수용을 뒤로 빼고 고영훈을 위로 올릴게요. 골키퍼 위치도 재조정하고요.”

    “그걸로 되겠어? 윌리안의 패스가 네이마르한테 향하면 최소 한 명은 넘어갈 거야. 그럼 바로 슈팅 공간이 열릴 거고.”

    “알고 있어요.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허세 부리긴.”

    일단은 게임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행동을 선택할 때 나름의 능력치란 게 존재했다.

    임종철은 그 점을 유의하면서 자신의 이어지는 3번의 행동들을 선택했다.

    먼저 패스를 네이마르에게 연결시켜주고, 상대의 중앙에서 공간을 찾은 뒤 달려드는 김수용을 제친 후 슈팅을 때린다.

    완전히 열린 코스에서 때린 슈팅이었으니 제법 위협적인 행동들이었는데, 이에 재혁은···.

    탁, 탁, 타악!

    “이러면 막히죠?”

    “어?”

    임감독의 예상과 다르게 너무도 가볍게 슈팅 코스를 막아냈다.

    이에 입술을 매만지면서 눈썹을 꼬았던 종철이 재혁의 행동을 지적했다.

    “잠깐만. 이건 말이 안되잖아.”

    “뭐가요?”

    “이 위치에 있던 최재혁 말이야. 4번째 줄에 있던 말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윌리안이 네이마르한테 패스를 주는 타이밍에 움직이면 충분히 늦지 않고 태클까지 가능해요.”

    “아니.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체력적으로 말야.”

    임종철은 현실적인 부분을 연신 지적하며 말들을 역순으로 내려놓았다.

    재혁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눈으로 보여주며 설명해주기 위함이었다.

    “하나의 말을 여러번 움직일 수야 있지만, 전반 초반부터 계속 최재혁은 행동력을 2개씩 사용했잖아? 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그럼 당연히 이번엔 체력적으로···.”

    “네이마르를 따라갈 수 없을 거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재혁이 언급하자 임감독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재혁은 빙긋 미소를 보이면서 말을 계속 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지속적으로 행동을 두 번씩 취한다면 그만큼 남들보다 느끼는 피로감이 두 배, 많게는 세 배까지도 많아지겠죠.”

    “단순히 신체적인 피로도만 쌓이는 게 아니야. 이만한 행동력을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훨씬 자세하게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는 이야기니까. 평범한 선수라면···.”

    “평범한 선수라면 진즉 퍼졌겠죠.”

    “!”

    임감독이 하려는 말을 대신 끝맺은 재혁.

    그런 재혁의 말에 의아함이 담긴 두눈을 반짝인 임감독이었으나, 재혁은 그런 종철을 향해 떠올린 미소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전 할 수 있어요.”

    “너라면 할 수 있다고?”

    “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전 자신합니다. 저라면 이 말판 위에서 보여준 행동들을 그대로 해낼 수 있다는 걸요. 그러니까···.”

    꾸욱.

    최재혁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말에 힘을 주어 눌렀다.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네이마르.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파악한 임감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혁과 시선을 맞추었고, 재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종철 감독을 향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전술을 구상해보세요. 저를 굴릴 수 있을 때까지 굴려보시라고요.”

    “굴릴 수 있을 때까지라···.”

    “아무리 못해도 감독님께서 아직까지 끌고 다니시는 중고차보단 훨씬 더 잘 달릴 걸요?”

    “이 멍청아. 쏘렌타를 무시하지마. 앞으로 못해도 3년은 더 현역이야.”

    “폐차장에서 현역이라는 걸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죠?”

    “폐차장으로 가려면 6년은 더 있어야 되고.”

    “부디 6년동안 사고 없이 살아 계시길 빌게요.”

    농담과 덕담을 기분좋게 나누던 두 사람.

    그러던 중 임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책상 의자에 앉았고, 덕분에 쏟아진 말들을 내려보던 재혁은 조용히 주변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종철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른 것 같았으니, 그가 집중할 수 있도록 침묵을 지켜준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볼펜볼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만이 감돌았고.

    “···됐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마침내 펜을 내려놓은 임종철 감독의 몸이 의자 위로 축 늘어졌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듯,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진 임종철 감독.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재혁을 불렀고, 감독의 손짓을 좇아 책상 곁에 선 재혁은 전술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뒤 쓰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뛰면 정말 죽겠는데요.”

    “그래도 할 순 있잖아?”

    “물론 못 할 건 없죠.”

    “그럼 해 봐.”

    긍정적인 대답과 함께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따라 미소를 떠올린 임종철 감독.

    그는 재혁의 대답에 힘을 얻었는지 빛이 떠오른 두눈을 깜빡이며 읊조렸다.

    “좋아, 그럼 브라질전은 이걸로···, ‘허리 부수기’로 간다. 후우, 그럼 이제 마음 편히 좀 잘 수 있겠어. 이건 네가 강철우 코치한테 전달 좀 해줘. 나는···, 침대에서 눈 좀···, 붙일 테니까···.”

    털썩.

    말인지, 잠꼬대인지.

    헷갈리는 한 마디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진 임감독.

    그렇게 순식간에 코까지 골며 숙면에 들어간 임감독의 몸을 고쳐주고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서야 재혁은 허리를 펼 수 있었고, 방의 불을 끄면서 잠든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인 재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몸을 혹사해가며 임감독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제부턴 그가 할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복도를 따라 걷던 재혁은 주문을 걸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길거다. 이번에도 반드시 이길 거야.”

    누구를 향해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솔직한 감정을 담아 재혁은 중얼거렸고, 그렇게 건물을 빠져나와 강철우 코치에게 전술지를 건넸다.

    해당 전술지를 확인한 강철우 코치의 얼굴이 기울어졌고.

    “정말 이렇게 뛸 수 있겠어?”

    “못 뛰면 지는 거예요.”

    그런 강철우 코치를 향해 재혁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전 지는 걸 정말 싫어하잖아요? 그러니까 죽는 한이 있어도 막을 거고, 브라질의 이번 월드컵은 16강에서 끝이 날 거예요.”

    ***

    “과연 한국의 월드컵은 16강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

    마침내 찾아온 경기날.

    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 212. 16강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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