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공은 둥글다 >
“아···, 축하 고마워요.”
“응? 뭐야? 그게 고마워하는 사람의 반응이야? 뭔가 되게 억울한데? 사네, 생각해보니 우리가 졌는데 얘를 축하해 줘야 해?”
“그러게요. 그냥 우리끼리 구석에서 눈물이나 짤까요?”
“아녜요, 아녜요! 진짜 고마운데, 뭔가 실감이 안나서···.”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재혁이 황급히 손을 터는 것에 귄도안이 쓴웃음을 띤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우리가 조별 예선을 통과하지 못 할 줄이야. 진짜 실감 안나네.”
“어? 독일 떨어졌어요?”
“너네가 이겼잖아. 저쪽 동네에선 스웨덴이 이겼고. 그럼 당연히 우린 떨어지는 거지. 뭐야, 진짜 모르는 눈치네?”
“하프 타임때 스웨덴-맥시코 쪽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듣질 않았거든요. 오직 이 경기에만 집중하려고요.”
“큭큭. 그랬구나. 그게 차이를 만든 거구나.”
재혁의 짧은 한 마디를 통해 ‘각오’를 느낄 수 있었던 귄도안.
그는 연신 고개를 주억이며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생각해보면 클럽에서도 그랬으니까.
모두가 엄습해오는 패배감에 좌절하고 있을 때, 최재혁, 이 꼬마만큼은 죽을 각오로 자신을 불살라가며 경기에 임했으니까.
챔피언스 결승전에선 마지막 순간, 프리킥을 차기 위해 부상까지 숨기지 않았던가.
자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존경심이 솟아나는 ‘선수’를 바라보면서 귄도안은 다시 한 번 손을 뻗으며 말했고.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한다, 재혁아.”
“고맙습니다. 두 사람 몫까지 더 힘낼게요.”
재혁은 그의 손을 맞잡으면서 확신에 찬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
찰칵, 찰칵, 찰칵!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울려댔다.
벌써 몇 장이나 찍었는지 모를 정도였지만, 기자들은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댔고, 그 소리는 뢰브 감독이 입을 열고 나서야 간신히 그쳤다.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지난 대회 챔피언이 이번 대회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결과를 성적표로 받게 되었는데요,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 같습니까?”
첫질문부터 스트레이트로 바로 꽂혔다.
하지만 이게 패장의 업이었으니.
뢰브 감독은 침착한 목소리로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줬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모자랐던 겁니다.”
“팬들의 분노와 실망이 굉장합니다. 아직 대표팀과의 계약이 2년이 남았는데, 남은 기간의 행보가 어떻게 될 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제 부족함이 모두를 실망시켰습니다. 지난 성공과 이번의 실패 사이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2년은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팀과 새로운 기반을 쌓는데 사용하겠습니다.”
“첫 골을 넣었을 때까진 괜찮았지만 결국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감독님께선···.”
다양한 내용들이 오가는 기자 회견이었다.
원래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법이니.
기자들도, 그런 기자들을 상대하는 뢰브 감독도 평소보다 말이 길어지면서 자연히 회견 시간도 늘어났다.
아직 탈락이라는 결과를 수긍하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월드컵 무대에 남아 있는 아쉬움 때문일까.
그렇게 계속해서 자리가 쭉 이어지던 중···.
“저도 하나 여쭙고 싶은데 말이죠, 뢰브 감독님.”
연신 입술을 씰룩이고 있던 한 기자가 손을 들었고, 그 기자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뢰브 감독의 미간이 살며시 꼬였다.
기자가 목에 걸고 있는 주간지의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뢰브 감독의 예상처럼 기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회장 분위기를 차갑게 식혔다.
“이제 겨우 20살짜리 선수한테 팀이 무너지다니. 이건 그냥 모든 게 문제였던 거 아닙니까?”
“···겨우 20살짜리요?”
“아,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말이죠. 사네는 왜 데리고 온 겁니까? 평가전에서 그렇게 죽을 쒔는데.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선수를 데리고 왔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선수 누구요?”
“글쎄요. 그건 감독님께서 생각하셔야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봅니까?”
뢰브 감독의 말에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기자.
그런 기자의 건방진 행태에 오히려 주변 기자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 연예 가십 거리나 찾으러 다니던 놈이 월드컵이라고 기자 행세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며 몇몇이 해당 기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으나, 뢰브 감독은 손을 뻗어 그들을 말렸다.
그리고 나름 재치를 발휘해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무래도 세계의 축제인 월드컵이다보니, 월드컵을 관람하기 위해 러시아까지 온 연예인들을 쫓다 자리를 잘못 찾아오셨을 수도 있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뭐요?”
“그럼 축구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제가 좀 설명을 해드리지요. 첫째로 우리는 평범한 20살 선수한테 당한 게 아닙니다. ‘세계 최고’가 될 20살 선수에게 당한 겁니다. 그 점을 확실히 해주시는게 좋겠군요. 그건 최재혁 선수에게도, 그를 상대로 전력을 다한 우리 선수들에게도 불쾌한 발언이거든요.”
“···.”
“그리고 둘째, 사네가 본선에서 뛴 3경기를 제대로 보신 게 맞습니까? 평가전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점을 확실히 보완해서 돌아왔어요. 매 경기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팀을 위해 활약한 게 바로 사네 선수인데, 그런 사네 선수의 존재를 의심한다고요? 하.”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실소를 흘린 뢰브 감독.
그는 짧은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을 축약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여긴 세계 무대입니다.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실력만 충분하다면 최재혁처럼 최고가 될 수 있고,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출전한다면 누구라도 우리처럼 조별 예선에서 짐을 싸야 되는 곳이란 말입니다.”
“···.”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는 이쯤에서 파해야겠군요. 다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죄송합니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괜찮을까요?”
자리를 떠나려는 뢰브 감독을 향해 어색한 독일어로 말을 건 한 남성.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옮기자 그 남성이 한국인 기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본 뢰브 감독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국인 기자는 더듬거리는 독일어로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국을 직접 상대해본 입장에서 16강 이후 성적을 어떻게 예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16강 이후라, 흐음.”
기자의 질문에 잠시간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던 뢰브 감독.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거듭했고, 한동안 말없이 턱끝을 매만지다가 빙긋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조 2위로 진출하게 된 한국이 만나게 될 상대는 우승 후보들 중 하나인 브라질이지요?”
“브라질이 E 조에서 1위로 16강에 진출한다면 말이지요.”
“솔직히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우리도 나름 우승 후보들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게 생겼지만 말이죠. 누구 때문인지 참···.”
농담이 섞인 뢰브 감독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고, 뢰브 감독도 그들을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호흡을 정리하며 얕은 한숨을 토했던 뢰브 감독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만큼 우승 후보라는 타이틀이 참 덧없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누구라도 이길 수 있고, 누구라도 질 수 있는 무대니까요. 만약 한국이 우리를 꺾은 것처럼 또 다른 우승 후보인 브라질을 이길 수 있다면···, 그들도 충분히 대회에서 우승할 자격을 갖고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좋은 말이 아니죠. 쓰라린 경험에서 나온 말이니까요. 하하,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기왕이면 챔피언에게 진 걸로 남으면 참 좋겠군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난 뢰브 감독.
전 대회 화려했던 챔피언의 퇴장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씁쓸한 퇴장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기에 그늘이 있는 법.
세상은 새로운 기대의 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영했다.
***
[대한민국, 강호 독일을 꺾고 16강 진출을 확정!]
[‘투혼.’ 벼랑 끝에서 자력으로 올라온 대표팀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진) 역전골을 터트리는 최재혁의 슈팅.]
[(사진) 마침내 울린 종료 휘슬과 함께 기뻐하는 한국 선수들.]
[(사진) 붉은 물결로 물들었던 광화문, 그리고 카잔 경기장.]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 눈물을 쏟는 축구팬들의 ‘대한민국!’]
[‘칭찬 일색’인 외신 반응. “간절함의 차이가 변화를 만들었다.”]
전반전 45분, 하프타임 15분, 그리고 후반전 45분.
다 합쳐서 겨우 2시간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겨우 2시간이었던 것이다.
독일이 압승을 할 것이라는 수많은 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한국이 승리를 차지했을 때, 처음 나온 반응은 ‘이게 현실인가’였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독일이 상대였거늘.
오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실제 경기 화면을 통해 결과를 확인했고, 16강에서 독일이 빠졌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사람들은 곧 충격적이었던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 속에 담겨 있는 이유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기 시작했다.
바로 최재혁이라는 존재를 말이다.
[한국과 독일의 가장 큰 차이는 다른 무엇보다 최재혁이었다. 이제 20살인 어린 선수는 공이 둥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실력으로 증명해냈다.]
[한국의 16강 진출의 일등공신, ‘최재혁.’ 패스 성공률 93%, 키패스 6회, 태클 성공 13회로 공수 전반에 걸쳐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전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히딩크 해설의 짧은 한 마디. “이게 한국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간단하지만 책임이 따르는 한 마디를 최재혁은 자신의 실력으로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냈으니.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그를 주목했다.
처음엔 맨체스터 시티, 이어 이번엔 한국을 구해낸 그의 실력에 거품은 없었다며 잔뜩 흥분한 사람들은 이어질 매치업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바로 또 다른 축구 강국인 브라질과의 경기를 말이다.
하지만 브라질을 직접 상대해야 할 당사자인 임종철 감독은 어두운 방안에서 머리를 싸맨 채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벌써 몇 시간 째 내려보고 있는 자료들을 한 장씩 넘기면서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틈이 없어. 제기랄, 도저히 틈이 보이질 않는다고.”
세계적인 스타 네이마르를 필두로 팀을 짠 브라질.
그들을 분석하기 위해 오늘로 며칠 째 밤을 지세웠지만 뾰족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던 임종철 감독의 고민은 날로 깊어져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흘렀을까.
벌써 수십 장째 구겨진 전술지를 또 하나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던 임종철 감독은 노크 소리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감독님. 전데요. 부르셨어요?”
오전 훈련을 끝마친 재혁이 그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 211. 공은 둥글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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