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10화 (210/225)
  • < 210. 절대 안 잊어 >

    재혁이 때린 슈팅이 허공에 떠올랐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발끝을 떠나는 공으로 향했다.

    떠오른 슈팅이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엔 다들 긴장했고, 그 슈팅이 수비수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가만히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둘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슈팅을 향해 손을 뻗던 노이어의 장갑이···.

    틱···!

    공이 아닌 허공을 움켜쥐었을 때.

    그렇게 마침내 공이 골대로 향하는 여정을 끝냈을 때.

    참고 있던 함성 소리가 전역에서 폭발했다.

    “고오오올! 골입니다! 최재혁 선수의 중거리 슛에 노이어 골키퍼가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당하면서 마침내 골이 터졌습니다! 무려 25미터 밖에서 시도한 중거리 슛이 골로 연결 됐어요!”

    “대체 우리가 지금 뭘 본 거죠?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월드컵 무대에서 독일을 상대로 한국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최재혁 선수가, ‘어린 괴물’이 또 한 번 흐름을 바꿨습니다!”

    “엄청났습니다. 정말 엄청난 골이었어요!”

    “태극기를 손에 쥔 현지 관중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고 있네요.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아직 경기 안 끝났어요!”

    자신을 향해 몰려든 선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팔을 펼친 재혁이 소리쳤다.

    경기가 끝나기까지 아직 5분 여.

    추가 시간까지 포함하면 넉넉히 10분은 더 남은 상황이다.

    재혁은 잔디 위에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면서 선수들을 향해 재차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했다.

    “당장의 기분에 취해서 흥분하지 마세요. 겨우 1, 2분을 기뻐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래. 재혁이 말이 맞아. 다들 진정하라고. 미쳐 날뛰는 건 경기가 다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다들 자리로 돌아가! 냉정하게 생각해, 냉장하게! 이기고 있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기뻐했던 것도 잠시, 침착을 되찾은 선수들은 서로의 기운을 북돋아주며 자리로 돌아갔고, 진영을 가다듬으면서 호흡을 골랐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남아 있는 체력을 모두 짜내 상대를 막을 생각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독일 선수들은 크게 흥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공 빨리 보내!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지만 공간이···.”

    “일단 우겨 넣어! 어떻게든 전방으로 연결해 주란 말야! 이대로 질 생각이야?!”

    4년을 기다렸다.

    전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으로 끝이 아닌, 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4년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4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불과 3분여를 남겨두고 말이다.

    “그렇겐 안 돼!”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달리기 시작한 사네.

    최재혁의 중거리 슈팅을 눈앞에서 지켜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감지한 패배감이 그의 몸을 지배했지만,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세대, 다른 팀의 영광이 아닌, 지금부터 시작된 그의 세대의 영광은 아직 제대로 된 한 걸음도 떼지 못 했으니까.

    어떻게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자신의 손으로 열겠다며 사네는 꺼져가던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측면을 따라 공간을 파고 들면서 손을 흔들었고, 그런 사네를 발견한 귄도안은 가지고 있던 공을 곧장 그를 향해 붙여주었다.

    어차피 경기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믿을만한 녀석은 결국 저놈 뿐이지.’

    귄도안은 가장 가능성 높은 승부수를 믿고 배팅을 걸었고, 그런 귄도안의 도박같은 패스를 이어 받은 사네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가속했다.

    남은 시간 따윈 이제 머릿속에서 잊었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일단은 너부터 뚫는다!’

    ‘망할···! 이 시간 대에 저런 움직임이라고?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체력이야?!’

    파고드는 사네를 상대하게 된 이최민이 인상을 구겼다.

    이녀석이나, 최재혁이나.

    맨체스터 시티에서 온 놈들은 죄다 괴물들 밖에 없는 건가?

    범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놈들뿐이라며 혀를 찼던 이최민은 눈동자를 빛냈다.

    비록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이번 플레이를 막으면 자신들이 경기에서 이길 거라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자, 어떻게 올테냐!’

    사네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자세를 낮춘 이최민.

    어떤 방향을 노리든, 기필코 상대를 막겠다며 열의를 불태우던 그의 눈에···.

    퉁!

    “!”

    발등으로 공을 짧게 꺾는 사네의 움직임이 들어왔고, 이최민은 방향을 읽기 무섭게 곧장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왼쪽을 파고 드는 그 행동에 맞대응 하기 위해 얼른 몸의 중심을 공을 쫓아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등으로 공을 왼쪽을 빼냈던 그 행동 직후, 사네는 다시 발 안쪽으로 공을 끌어 당겨 반대 방향으로 전환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모션 페인팅 후 이어지는 플립플랩.

    이최민은 말도 안되는 걸 본 탓에 눈을 크게 키웠다.

    설마하니 몸의 중심을 완전히 넘긴 다음 그걸 다시 반대로 돌려놓을 줄이야.

    저러고도 밸런스가 멀쩡하다고?

    ‘···역시 망할 괴물들이 너무 많아!’

    쿠당!

    결국 사네를 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이최민.

    사네는 쓰러지는 이최민의 옆을 뚫고 지나가면서 한 층 더 속도를 높였다.

    지금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모두에게 확실히 선보인 것이다.

    그런 사네를 막기 위해 한국 수비수들의 몸놀림이 분주해졌다.

    이번엔 자신들이 지키는 상황에 놓인 만큼, 어떻게든 이 리드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최태성이 사네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들이밀었다.

    달리기에 자신이 있던 만큼, 속도에 승부를 건 사네를 자신이 기필코 막아보겠다는 듯 가뿐히 몸을 맞부딪쳤으나···.

    “무, 무슨···?!”

    전력을 쏟기 시작한 사네의 속도는 그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아니,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었다.

    순간적인 반응속도와 민첩성.

    어깨를 맞댔다가 잠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허용한 허점을 사네는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고, 그대로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이걸로 두 명.’

    이최민에 이어서 최태성, 그리고 세 명째를 눈앞에 둔 사네.

    상대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재혁.

    후방을 보조하기 위해 내려온 재혁이 지금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섰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망설이지 않고 상대에게 달려들던 사네의 발끝이 멎었다.

    복잡한 감정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두려움’이 그의 발을 굳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감정들을 털어낸 사네는···.

    “후욱!”

    퉁, 퉁, 퉁!

    폐 깊은 곳에 머금고 있던 호흡들을 모두 끌어내면서 드리블을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를 넘어서는 것도 제법 괜찮은 마무리겠지!’

    투콱!

    공을 가지고 이동하던 사네와 재혁이 충돌했고, 원하는 방향을 뚫으려는 자와 그 방향을 막으려는 자들의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화려한 듯 우직한, 어떻게든 재혁을 뚫어보겠다며 공을 컨트롤 하는 사네는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그런 사네를 상대하는 재혁도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과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야···!’

    시즌을 함께 해왔던 만큼, 그 누구보다 사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재혁이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네는 그동안 그가 알던 사네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보다 발전했고, 더 치명적이었다.

    조그만 틈만 허용하면 바로 파고들 기세였으니.

    어떠한 실수도, 방심도 허용치 않는 상대가 된 사네를 노려보던 재혁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네의 움직임을 쫓았고···.

    “!”

    그런 재혁의 행동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사네의 두눈이 빛을 발했다.

    아주 희미한 재혁의 수비 습관.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공이 이동하는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양발 끝을 향하게 하는 그의 잔발 습관을 사네가 발견한 것이다.

    분석은 빨랐고, 행동은 과감했다.

    재혁을 뚫어낼 돌파구를 발견했다는 것에 사네는 망설임 없이 공략을 시도했고, 그런 사네의 움직임을 쫓으면서 재혁은 신중히 반응했다.

    그리고 그 신중함 속에 깃들어 있는 약점을 노리고.

    “···!”

    사네가 재혁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양발 끝이 계속해서 공을 향한다면···.

    ‘그 방향을 읽지 못하게 한다면 분명 길이 열릴 것이다!’

    투웅, 투웅, 퉁!

    재혁의 몸에 바짝 달라붙어 연신 공을 굴리던 사네.

    그는 화려함 드리블 속에 공을 숨기다가 마지막에 재혁의 다리 사이로 공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틈이 열려 있는 옆을 뚫고 들어가 재혁의 다리 사이로 빠져 나온 공을 잡았다.

    이걸로 성공이다.

    결국 마지막에 최재혁을 뚫어냈다!

    그런 환희에 찼던 감정이 북받쳤던 사네는···.

    “···아!”

    그의 눈앞에 펼쳐진 배경을 확인하곤 충격에 입을 벌렸다.

    자신은 재혁을 뚫은 게 아니었다.

    재혁이 ‘뚫려주었던’ 것이다.

    본인을 필드 구석에 가두기 위해서 말이다.

    재혁의 다리 사이, 뒤쪽에 위치해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코너 플래그가 기다리고 있던 필드 구석이었으니.

    사네는 서둘러 공의 방향을 꺾어 골대로 향하려 했으나···.

    “제, 제기랄···!”

    그 사이 다가와 길목을 막아선 재혁의 존재가 그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구석에 붙잡혀 있을 순 없었다.

    다시 한 번 재혁을 뚫어보겠다며 공을 가지고 이동하던 사네였지만···.

    ‘뚫어낼 틈이 없어···!’

    오히려 무겁게 찾아온 좌절감이 그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왼쪽도, 오른쪽도, 그리고 중앙도.

    어느 방향을 노리고 들어가도 재혁이 완벽하게 그를 틀어막고 있었으니.

    그렇게 억지로 공과 함께 공간을 찾아 들어가던 사네는 결국 재혁이 먼저 공을 잘라내고 걷어내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고, 하프 라인 뒤쪽으로 뻗어나가는 공을 노려보면서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그는 양팔을 크게 휘저으며 얼른 공을 보내달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삑, 삑, 삐이이이익!

    그보다 먼저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90분의 경기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휘슬이 말이다.

    마침내 경기가 끝이 나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지금까지 참고 있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자력으로 얻어낸 2승으로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으니, 모두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기쁨에 취해 경기장 전역을 뛰어다니면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쉬지 않고 토해낸 것이다.

    그 중에서 몇몇은 감정이 넘쳐 흘러 눈물을 쏟아냈고, 몇몇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쳐댔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재혁은 조심스레 걸어서 사네의 곁에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말을 붙였다.

    “괜찮아?”

    그런 재혁의 목소리에 땅을 향하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올린 사네.

    그는 여전히 재혁이 아닌 다른 곳을 지켜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거 알아? 연습 경기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널 이겨보지 못 한 거?”

    “몰랐는데.”

    “그렇겠지. 원래 이런 건 패자들이 기억하는 거니까.”

    큭큭큭, 짧게 웃으면서 어깨를 들썩인 사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꼭 네게 남겨주고 싶었어. 내가 이기는 모습 절대 잊지 못하게 말야. 하지만 결국 또 이렇게 됐네.”

    “···.”

    “고생했다. 그리고 이긴 거 축하해.”

    마지막에 고개를 돌리면서 악수의 의미로 손을 뻗은 사네.

    재혁은 그런 사네의 손을 빤히 내려보다가···.

    “!”

    악수가 아닌 그를 끌어 안는 포옹을 선택했다.

    재혁의 선택에 사네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재혁은 사네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절대 안 잊을 거야. 오늘 네 모습은 그 누구보다 밝았거든. 그 누구보다 힘들었던 적이지만,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인 네 모습을 난 절대 안 잊을 거야.”

    “···고맙다.”

    “그리고 귄도안, 그쪽도 안 잊을 게요.”

    “난 덤이야?”

    “질투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사네가 먼저 안겼다고요.”

    “···그래, 그래. 하지만 이 말은 전해야겠지.”

    재혁의 말에 큭큭 웃으면서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귄도안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16강에 올라간 거 진심으로 축하한다.”

    < 210. 절대 안 잊어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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