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07화 (207/225)
  • < 207. 우세한 불안 요소 >

    500인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 서울 광화문.

    매 월드컵마다 수만 관중이 몰려 뜨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은 이번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찍이 모여들어 자리를 잡았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진행된 행사에 현장은 시끌벅적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은 연신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외쳐대며 어려운 상대지만 승리를 기원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다.

    사네의 단독 돌파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선취골.

    수십 미터를 드리블하고 골키퍼까지 넘은 사네가 공을 골대에 집어넣자 광화문에 모여든 4만 관중들은 일제히 탄식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했고,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독일 선수들이 기뻐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관중들은 울상이 되었다.

    다른 팀도 아닌 독일이 상대인 만큼, 빼앗긴 1점을 되찾아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다들 좌절한 것이리라.

    몇몇 사람들은 욕설을 뱉었고, 몇몇은 경기를 다 봤다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대한민국 유니폼을 입고 있는 대학생 축구팬 백동일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이미 취해 있는 중년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뭐여, 학생? 안 보이잖어. 좀 앉어!”

    “어차피 봐야 먼지털이로 후두려 맞는 것처럼 탈탈 털리는 모습뿐이겠지만, 그래도 볼 건 봐야 할 거 아녀? 좀 비켜 봐!”

    “···.”

    성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중년인들의 기세에 밀려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런 동일의 옆구리를 쿡 찌른 이재민이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야, 잘 참았어. 축구 경기 보다가 싸움나서 다치면 누가 손해겠냐? 다같이 재밌게 보러 온 거잖아. 괜히 취한 사람한테 시비 걸리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가자고.”

    “···알고 있지만, 후우.”

    재민의 말에 애써 숨을 고르면서 속을 다스린 동일.

    그는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이 돌아오자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보았다.

    그곳엔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11명의 선발 선수들과 12명의 후보 선수들이 있었다.

    K리그부터 유럽 4대 리그에, 필요하면 하부 리그들까지 챙겨보는 진성 축구팬인 백동일이 모르는 선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저들이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아내 저곳에 올라가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덮어놓고 내리는 사람들의 냉혹한 평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국가대표니까.’

    동일은 출정식에서 주장인 김수용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팬들이 쓴 말을 하는 건 우리들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팬들에게 동정과 응원을 구걸할 수 없다. 벌써 몇 번이고 실망감을 안겨드렸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모두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담아 응원할 수 있는 경기를 펼칠 것이니 꼭 지켜봐달라.]

    자신들의 플레이에 모자란 점이 있다면 기꺼이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그 말이 어째서인지 동일은 너무도 슬프게 들렸다.

    아마 더 이상 물러설 구석이 남지 않은 사람의 필사의 각오처럼 들렸기 때문이리라.

    그런 선수들의 각오를 동일은 비웃을 수 없었기에···.

    “힘내라, 한국! 할 수 있다, 한국!”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부정적인 대화들을 모두 삼켜버릴 정도로 큰소리를 내 선수들을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동일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은 곧 서로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직 경기 끝나려면 한참 남았어! 동점 가자! 아니, 역전해서 16강으로 가자!”

    “이길 수 있다! 끝까지 힘내라, 한국!”

    동일이 그런 것처럼 입을 모아 응원의 함성 소리들을 내질렀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그리고 곧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입을 모았고,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는데, 예의 중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혀를 차며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지나. 실력 차이라는 게 있잖어, 실력 차이가.”

    “그러니까 말여. 아마 이대로 계속 뚜까 맞다가 끝나겠지. 기왕이면 3대0 정도가 좋겠는데. 나 거따가 돈 걸었거든.”

    “클클클. 3대0으로 되겠어? 난 7대0으로 하나 사놨지. 크하, 얼른 좀 끝나면 좋겠네. 딴 돈으로 한 잔 더 꺾으려면 시간이 모자란데 말여.”

    “내 말이. 왜 축구엔 콜드 패가 없는 거야? 시간 아깝게시리. 크흐흐.”

    “···.”

    뜯고 있는 마른 오징어로도 모자라 선수들을 안줏거리로 삼은 중년인들.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백동일은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둘을 향해 한 마디를 해주려 했는데.

    그 순간 공을 잡았다.

    한국의 18번, 최재혁이.

    뒤로 고개를 돌리려던 동일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재혁이 공을 몰고 이동하기 시작하자 침을 삼켰다.

    그렇게 한 명을 넘고, 두 명째, 순식간에 하프 라인을 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동일은 꽉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언가 터진다.

    그런 기대감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로 스크린을 노려보던 동일은···.

    [뻐엉!]

    [최재혁 선수가 공을 찼습니다! 빠르게 굴러가는 땅볼 패스! 쥘레 선수가 발을 뻗지만 닿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이 향하는 곳엔···.]

    [신형민 선수! 신형민 선수가 최재혁 선수의 패스를 이어 받았습니다! 완벽한 패스! 훔멜스가 따라붙지만 신형민 선수의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계속해서 달리고 있어요! 기회에요, 한국! 노이어 골키퍼가 튀어나오고 있죠? 신형민 선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땅볼 슛!]

    [노이어 선수의 다리 사이로 공이 빠졌습니다! 노이어 골키퍼가 신형민 선수의 슈팅을 막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골이에요! 한국이 동점골을 터트렸어요!]

    [이야아! 신형민 선수! 엄청난 슛이었어요! 훔멜스하고 노이어 사이에서 굉장히 침착했거든요? 역시 한 방이 있는 선수에요!]

    [그 전에 최재혁 선수의 패스도 대단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이 패스를 한 번 보십시오. 마치 모든 걸 읽었다는 듯, 쥘레 선수가 나오는 타이밍을 노려 정확하게 공을 찔러 넣어줬어요! 이건 거의 최재혁 선수가 떠먹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흥분한 선수들을 주장인 김수용 선수가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직 우린 이긴게 아니에요. 선수들은 진정을 하고···.]

    해설자가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고 말했으나, 떨리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해설자 또한 동점골에 잔뜩 취해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패배의 수렁에서 팀을 끄집어낸 동점골은 과정도 그랬지만 결과 자체도 모두를 흥분시키기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그 흥분감은 거리 응원을 나온 사람들을 집어 삼켰다.

    한 차례 거대했던 함성 이후 사람들을 서로를 얼싸안으면서 동점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플레이에 다들 감격한 것이다.

    백동일도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을 끌어안거나 팔을 걸치면서 신이 난 듯 고함을 내질렀고.

    “설마 우리 나라가 한 골도 못 넣을 거라고 예상한 바보들은 없겠지!”

    “···.”

    “캬, 맥주맛 좋다! 이대로 역전해보자!”

    누구보고 들으라는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렇게 치열했던 경기는 하프 타임이 찾아오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하프 타임이 시작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동안 참고 있던 화장실이라던가, 비어버린 맥주 잔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면서 주어진 15분을 사용했는데,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마치 고민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프랑스의 감독, 데샹.

    데샹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기자는 긴장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데샹에게 물었다.

    “휘유, 엄청났네요. 지금까지 경기를 지켜보신 느낌이 어떤가요?”

    “···음.”

    그런 기자의 물음에 데샹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론 머리를 긁적이면서 생각에 잠겼고, 그렇게 한참을 생각한 뒤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지금 점수가 1대1이죠?”

    “네. 독일이 한 골, 한국이 한 골을 넣었죠.”

    “운이 좋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 한국이 독일을 상대로 이렇게 선전할 줄은···.”

    “아뇨. 제 말은 한국에 대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

    데샹 감독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던 기자의 말끝이 올라갔다.

    이 경기에서 선전하고 있는 대상이 한국이 아니라니.

    설마···,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기자는 미간을 모았고, 데샹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을 끝맺었다.

    “오늘의 한국을 상대로 아직까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니. 역시 독일은 독일이군요.”

    “도, 독일이요? 데샹 감독께선 이 경기에서 독일이 불리하다고 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런 데샹 감독의 대답에 당황한 기자는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들은 탓이었다.

    다른 팀도 아니고 독일이 한국을 상대하면서 선전하고 있는 중이라니.

    기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노, 농담이시죠?”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다시 한 번 되물은 기자를 향해 데샹 감독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기록으로 본다면 분명 독일의 우세처럼 보일 겁니다. 지금 경기에서 독일이 지키고 있는 점유율은 70%. 한국이 유지한 30%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니까요. 그리고 점유율이 높으면 자연히 다른 기록들도 따라 오는 법이죠.”

    “그거야 당연하지요. 공을 오래 소유하고 있을 수 있고, 그만큼 기회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모든 기록에서 독일이 한국을 크게 앞서고 있는 걸요. 그런데도 감독님께선···.”

    “하지만 한국이 우세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요.”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관자놀이를 짚은 기자.

    그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냉수를 찾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에 혼란이 온 것이리라.

    그런 기자를 슬쩍 살핀 데샹 감독은 한숨을 흘리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격할 기회가 많은 팀이 유리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공적인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라가야 합니다.”

    “성공적인 공격이요?”

    “기록지 가지고 계시죠?”

    “아, 예.”

    “그럼 전반전 동안 독일이 때린 슈팅 횟수가 총 몇 번이었습니까?”

    “13번이었네요.”

    “그 중 유효 슈팅은?”

    “4번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인 겁니다.”

    “···?”

    데샹 감독이 슈팅 횟수를 지적한 것에 잠시 고개를 갸웃인 기자.

    그는 골이 패인 미간을 긁으면서 생각했다.

    13번의 슈팅들 중 골문으로 직접 향한 게 4번이라면 분명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나쁜 수치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문제라니.

    여전히 데샹 감독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생각에 잠겨 있는 기자를 향해 감독은 힌트를 하나 더 건넸다.

    “벗어난 슈팅을 보실 게 아니라, 몸에 맞은 슈팅 횟수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몸에 맞은 슈팅 횟수요? 대체 그게 왜···, 어?!”

    감독의 조언에 기록지를 다시 살피던 기자.

    그는 마침내 데샹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고, 충격에 입을 벌리고 있는 기자를 향해 데샹 감독이 말했다.

    “시도한 슈팅 횟수에 비해 유효 슈팅이 적은 것도, 그 슈팅들이 빗나간 것도 문제가 아니에요. 바로 몸에 맞은 슈팅 횟수. 13번을 때렸는데 그 중 8번의 슈팅들이 모두 몸에 맞았다는 건 한국의 수비수들이 독일의 공격 전개와 슈팅 코스를 확실히 읽고 있다는 의미지요.”

    “하지만 그걸론 승리를 확신할 수 없어요. 점유율 상으론 독일이. 분명 우세···.”

    “글쎄요. 전반전에 확실히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떨리는 눈동자로 계속해서 기록지를 살피며 반박하려던 기자의 말을 데샹이 잘랐다.

    기자는 그런 데샹 감독의 말에 마른 침을 삼켰고, 감독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을 오래 가지고 있는게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나 ‘확실한 한 방’을 꽂아 넣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리고 오히려 공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건 이번 경기에서 불안한 요소로 작용할 겁니다.”

    “불안한 요소요···?”

    “공을 자주 만진다는 건 공격을 자주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수를 범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의미니까요.”

    “···!”

    “게다가 그 18번이 적으로 있는 중원이라면···.”

    와아아아···!

    마침내 하프 타임이 모두 지나고 선수들이 다시 경기장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선수들을 향해 관중들은 환영의 함성을 내질렀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한국의 선수, 최재혁을 확인하면서 데샹 감독이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끝냈다.

    “아무리 독일이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45분이 지났을 때, 과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후후후, 낮은 웃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데샹 감독은 입을 닫았고,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물병을 찾았다.

    그런 데샹 감독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그가 해준 말을 되뇌던 기자.

    그 또한 긴장으로 마르기 시작한 목을 적시기 위해 물을 삼켰다.

    과연 이 경기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일지,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품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마침내 울린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 207. 우세한 불안 요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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