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06화 (206/225)
  • < 206. 단 한 번 >

    ‘이긴다. 이길 수 있다!’

    선제골의 주인공인 사네는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띠며 경기장 위를 달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지쳐가던 모습이 역력하던 사네였으나, 자신이 터트린 득점으로 경기의 흐름을 가져왔다는 기쁨에 그는 피로를 잊은 것처럼 쉬지 않고 달렸고, 그런 사네의 움직임은 주변 선수들에게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

    덕분에 여유와 집중력을 확실히 되찾은 크로스와 외질의 패스들은 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날카로워졌으며 골문을 직접 노리는 베르너와 루이스의 돌파에는 자신감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효과들이 사네가 성공시킨 한 골 덕분이었으니.

    ‘이 기세를 끌어 올려 쐐기를 박아야 한다.’

    뢰브 감독은 끊임없이 선수들에게 움직일 것을 주문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이 기회를 확실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 때였다.

    단순히 16강 진입이 목적이 아닌, 조 선두를 목표로 경기를 운영할 생각을 한 것이다.

    1위로 조를 탈출하는 것과 2위로 탈출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 차이가 16강 상대가 브라질이냐, 아니냐로 나눠지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1위로 통과하는 게 미래를 위한 길이었다.

    토너먼트가 시작되면 예선과 달리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기는 비기지 말고 무조건 이겨야만 했는데···.

    ‘최재혁을 내렸다라.’

    한국의 전술 변화를 발견한 뢰브 감독은 찌푸린 얼굴로 턱을 괴고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저 선택은 수비적인 운용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전술적 노림수가 있는 것인가?

    이번 경기는 자신들에게도 중요했지만 한국에게도 진출과 탈락이 걸린 경기였는데, 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공격 옵션인 최재혁을 내리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지?’

    오늘 경기를 위해 한국에 대해 많은 것들을 분석한 뢰브 감독.

    그들의 평가전 내용부터 월드컵 예선 경기들까지, 하나도 빠짐 없이 살핀 뢰브 감독은 적어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한 가지를 기억하며 입술을 씹었다.

    지금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임종철 감독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 노리는 수가 있을 것이다.’

    후우.

    필드 위의 흐름을 읽기 위해 호흡을 고르면서 자세를 고쳐 앉은 뢰브 감독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어차피 고민은 거듭해봐야 고민일 뿐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는게 가장 빠르겠지.’

    상대가 속에 품고 있는 칼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뢰브 감독은 한 선수를 찾은 뒤 유의깊게 그를 살폈다.

    한국의 18번, 최재혁.

    때마침 그가 막 공을 잡은 참이었다.

    ***

    ‘빽빽하네.’

    공을 잡은 재혁이 독일 진영을 살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무게 중심을 뒤로 낮추었을 때, 독일도 그에 반응해 곧장 진영을 변경했다.

    포메이션은 그대로 유지하되, 우리들이 뒤로 물러난 만큼 소폭 전진한 것이다.

    그 의도가 너무 뻔했기에 그들이 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차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추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한 골을 지키는 것보다 그 차이를 더 벌리는게 안전할 테니까. 그래서 우위를 점했음에도 지키지 않고 이렇게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거겠지.’

    투웅!

    재혁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어깨를 괴롭히며 그의 발밑에 있는 공을 노리는 베르너를 노려보았다.

    공을 조금 길게 소유하고 있었거니, 이정도로 거침없이 몸싸움을 걸어오다니.

    재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만약 독일이 한국을 그들과 대등한 수준의 팀이라고 판단했다면 이런 식으로 공격적인 진영으로 바꿀 리 없으리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흘린 실소였다.

    그리고···, 지금 이 플레이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한 재혁은 혀를 차며 계속 공을 몰았다.

    아마 지금 뢰브 감독은 우리들을 ‘테스트’ 해보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가 준비한 전술이 무엇인 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영의 무게 중심을 내렸을 때, 우리가 ‘원하는’ 움직임에 맞춰 장기말들을 준비한 거겠지.

    재혁은 그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곤 쓰게 웃었다.

    ‘이건 확실히 얕보이고 있군.’

    너희들이 준비해온 것이 무엇이든, 우린 그걸 막을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한 번 보여 봐라.

    뢰브 감독은 재혁에게 그렇게 묻고 있던 것이다.

    그런 뢰브 감독의 질문에 재혁은···.

    “후우.”

    천천히 호흡을 토해냈다.

    느릿하게, 여유롭게, 독일의 공격수가 당장이라도 공을 빼앗을 기세로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란 것을 잊을 정도로 느긋하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속에 담고 있던 호흡을 모두 토해냈을 때.

    터엉!

    “!”

    안색을 바꾼 재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재혁을 압박하던 베르너는 갑자기 달라진 재혁의 기세에 눈을 크게 떴다.

    ‘뭐지? 템포를 올리려는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최재혁을 경계해라.

    오늘 경기를 준비하면서 감독과 코치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게 들은 말이었다.

    가장 어리지만 그 누구보다 기술적인 선수.

    처음엔 그 말을 의심했지만, 직접 경기장에서 맞부딪쳐 보니 과장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설명이 부족했다.

    최재혁은 단순히 기술만 좋은 선수가 아닌, 그 누구보다 위협적인 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수가 무언가 변화를 꾀하려 하는 것에 베르너는 잔뜩 긴장하며 이어질 순간을 준비했다.

    분명 무언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지만, 절대 쉽게 녀석이 자신을 통과하게 두지 않겠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던 베르너는···.

    투웅, 퉁!

    “헉?!”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헛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언가 일어난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재혁은 자리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월 패스야!”

    베르너가 돌파 당하는 장면을 뒤에서 확실히 지켜보았던 케디라가 크게 소리쳤다.

    처음엔 드리블을 하려는 것처럼 공을 발등으로 밀었으나, 찰나의 순간 발등에 붙어 있던 공은 재혁의 발을 떠났다. 그리고 떠났던 공은 동료의 발을 빌려 다시 재혁의 발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핏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저 행동 속에 담겨 있는 ‘특별함’을 발견한 케디라는 충격에 빠진 것처럼 눈을 떨었다.

    ‘사전 동작이 전혀 없었어!’

    드리블 중 패스를 할 것인지, 혹은 계속 드리블을 칠 것인지, 그 짧은 행동의 변화 사이엔 뒤로 이어질 행동을 위한 사전 동작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야 보다 정확히 패스를 건네줄 수 있었고, 확실히 공을 가지고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재혁이 보여준 움직임 사이엔 그 사전 동작들이 생략되어 있던 것이다.

    베르너의 눈엔 재혁이 마치 사라졌던 것처럼 보인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케디라는 계속해서 공을 몰고 이동하는 재혁을 노려보며 침을 삼켰다.

    ‘그 사이에 또 진화했구나!’

    유럽 대회에서 만났을 때로부터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거늘.

    이 괴물같은 놈은 대체 뭘 먹고 성장하는 것인지 만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재혁에게 두려움을 느낀 케디라는···.

    ‘···그래야 꺾을 맛이 나지!’

    또 한 편에서 떠오르는 호승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입꼬리를 말았다.

    비록 챔피언스 리그에선 본인이 꺾였지만, 이곳에선 다를 거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공을 몰며 이동하는 재혁을 상대하기 위해 독일 선수들도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베르너에 이어 이번엔 외질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이미 영국에서 재혁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던 외질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방심하는 순간 베르너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돌파당할 게 분명했기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자세를 낮췄으나.

    파앙!

    “···마, 말도 안되는?!”

    외질 또한 베르너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도 허망하게 재혁을 놓치고 말았다.

    충격에 빠진 외질은 재혁이 지나간 자리를 노려보며 고개를 돌렸으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바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이었다.

    그들의 눈엔 독일 선수들이 수비를 하는 게 아니라 재혁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켜주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흥분한 관중들의 목소리를 높아졌고, 덩달아 한국 관중들의 함성 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터진다.

    그런 기대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쥐었다.

    그렇게 이제 하프 라인을 넘은 최재혁의 눈앞으로 두 명의 독일 선수들이 등장했다.

    크로스와 케디라.

    이 이상 파고드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은 얼굴로 재혁의 앞을 가로 막은 둘은 재혁의 행동을 살핌과 동시에 주변 상황을 읽었다.

    ‘사전 동작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결국 최재혁은 월 패스를 선택할 거다!’

    ‘그렇다면 이 주변 선수들의 위치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분명 막을 수 있을 터···!’

    자, 어느 길을 뚫고 이동할 거냐?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재혁을 노려보았고.

    “···?!”

    계속해서 파고드는 재혁을 노려보면서 눈썹을 꼬았다.

    분명 이쯤에서 패스를 시도해야 할 것인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재혁의 월 패스를 막을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은···.

    투웅···!

    “뚜, 뚫렸다! 최재혁이 드리블로 크로스와 케디라까지 뚫었어!”

    오히려 속도를 내 그 둘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재혁을 막을 타이밍을 놓치면서 그대로 돌파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뚫리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차렸다.

    재혁의 패스 타이밍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드리블 타이밍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베르너, 외질, 크로스와 케디라.

    순식간에 중앙에 커다란 공간이 뚫려버린 독일 선수들은 당황했다.

    그런 선수들을 향해 뢰브 감독도 흥분한듯 소리쳤다.

    어떻게든 막으라고.

    최재혁의 발밑에 있는 공을 뺏으라고 말이다.

    그런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마치 감상하듯 눈을 감고서 듣고 있던 임종철 감독은 씨익 웃었다.

    “방심이 아니라 예방이 목적이었겠지.”

    상대가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방어를 다지기 위한 대책은 필수적이다.

    찌르면 막고, 베려면 쳐내고, 내려치면 피하는 것처럼.

    뢰브 감독은 장기말을 옮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를 읽으려 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기회를 허용했다.

    ‘완벽’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게 오늘 너희들이 지는 이유가 될 거다. 그 한 번의 기회도 주면 안 됐어. 우리가 오늘까지 해온 축구···, ‘최재혁 쉬프트’의 완성은 그 한 번의 기회를 살리는데 있으니까!”

    파앙!

    임종철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혁이 공을 찼다.

    최종 수비벽의 방어 라인이었던 크로스-케디라 라인이 무너진 탓에 센터백인 쥘레가 재혁의 진행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온 틈, 그 좁은 틈을 노려 재혁이 침투 패스를 찔러 넣은 것이다.

    마치 자를 대고 그린듯, 깔끔한 선을 남기면서 굴러간 재혁의 패스는···.

    ‘드디어 왔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독일의 뒷공간 노리고 있던 신형민에게 정확하게 연결됐다.

    등을 돌리고 있던 훔멜스가 그런 신형민의 뒤를 쫓았으나, 재혁이 패스를 찔러줄 때 어떤 동작을 취할지 진즉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형민은 트래핑과 동시에 바로 슈팅을 때렸고, 슈팅 각을 좁히기 위해 달려들던 노이어는 형민의 슈팅이 넓게 벌린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무너졌다.

    그렇게 잔디를 훑으며 굴러간 슈팅은 정확히 골대 중앙에 박혔고, 경기의 균형이 다시 맞춰진 것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던 좌절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등불을 켠 것이다.

    그런 한국의 득점 과정을 쭉 지켜보던 치치 감독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코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게 바로 ‘미래’의 축구야. 점유율도, 패싱 게임도, 측면을 파는 것도 아닌, 주어진 기회를 완벽하게 살리는 축구. 필요한 숫자는 오직 점수판에만 있는 그런 축구 말야. 한국은 그걸 최재혁이란 꼬마를 통해 완성시켰군.”

    큭큭, 재밌다는 듯 연신 웃음을 참지 못 한 치치 감독.

    그는 실점 이후 망연자실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 뢰브 감독을 살피며 읊조렸다.

    “어쩌면 이번 대회에선 독일이 가장 먼저 떨어질 수도 있겠는 걸?”

    < 206. 단 한 번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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