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203화 (203/225)
  • < 203. 믿고 있다 >

    “하하.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그’ 독일이지 않습니까? 그런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건 독일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요?”

    “실례요? 최선을 다할 두 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한 쪽에게 실례가 될 일입니까?”

    “···!”

    “혹시라도 만약, 독일 쪽에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경기에서 독일이 패배했을 때의 원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일 겁니다.”

    가벼운 어조로 웃으면서 말을 건넸던 백인 해설자는 히딩크의 단호한 대답에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설마하니 저정도로 진지하게 대답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들이 겨우 7%였다.

    결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도박사들의 승리 배당 차이도 7배가 넘었다.

    말이 시합이지, 모든 통계들은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두 팀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의미였거늘, 그런 경기에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반응할 줄이야.

    그렇게 대화가 끊어져 차갑게 식은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만년설이라도 내려 앉은듯 녹을 줄 몰랐다.

    이에 중계자가 용기를 내 큰소리로 웃으며 공기를 환기시켰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어가기 위해 히딩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히딩크 해설께서는 오늘 경기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에 대해 한 번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과거 2002년 한국 대표팀을 지도하셨던 경험도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그때 4강이라는 역사적인 대기록을 작성하셨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현재 한국 대표팀은 어떤 것 같습니까?”

    “1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한국 대표팀과 지금의 한국 대표팀을 비교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요.”

    그런 중계자의 말에 잠시 감정을 누그러뜨린 히딩크 해설.

    하지만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눈빛은 여전히 밝게 빛내면서 계속 말했다.

    “허나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선수들도 아니고, 코칭스태프들도 아니죠. 바로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점입니다.”

    “!”

    “제가 경험한 한국 선수들은 분명 완벽하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모자란 구석들이 많았죠. 하지만 그들은 그 모자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열정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끈기를 가지고 인내할 줄 아는 선수들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바뀌었어도, 그 한 가지를 지킬 수 있다면···. 한국은 분명 독일을 상대로 멋진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믿음이 현실이 되었을 때···.”

    스윽, 잠시 말을 끊은 히딩크.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와 같은 7%들은 모두 같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겠지요. 저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경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현장은 관중석에 자리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내지르는 함성 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은 끊임없이 응원 구호를 외쳤고, 손에 쥐고 있는 태극기를 펄럭이며 자국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런 현장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 커진 안토루는 진심으로 놀라 중얼거렸다.

    “예선 마지막 경기라서 특히 더 그런가? 열기가 엄청난데?”

    “토너먼트 진출이 달려 있는 경기잖아. 당연한 거지. 어제 우리도 그랬다고. 물론 경기는 아쉽게 졌지만···. 아, 오빠 태극기 잘못 들었어. 빨간색이 위로 가야 해.”

    “아, 그래? 너 그런 것도 알아?”

    “공부하다 보니 이것저것 알게 된 거야.”

    “공부?”

    대학 시험에 태극기에 관한 문제라도 있던 건가?

    안토루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였고, 그런 안토루를 향해 얼른 따라오라며 케이트가 소리쳤다.

    그렇게 자리를 찾아 이동한 케이트는 익숙한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었다.

    “또 만났네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저희가 더 일찍 왔지요. 헤헤. 편히 앉아요. 옆에 비었어요.”

    “아하하, 고마워요.”

    재혁의 여동생 최재희와 그의 할머니.

    어떻게 된 일인지 두 일행은 이번에도 서로를 옆에 두고 앉게 된 것이다.

    재희가 손을 뻗어 빈 의자를 가리키자 고맙다며 웃는 얼굴로 감사의 말을 전한 케이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안토루도 케이트의 뒤를 쫓아 의자에 앉은 후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그게···.”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던 안토루가 던진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진 케이트.

    이걸 알려줘도 괜찮으려나?

    케이트는 한 곳에 모은 검지 손가락들을 콕콕 찌르면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쉰 다음 조그만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저기 앉아 있는 사람···, 재혁이 여동생 같아.”

    “재혁이 여동생? 최재혁의 여동생이라고?”

    “응. 그런데 확실한 건 아니야. 저번에 봤을 때 옆에서 하는 말을 조금씩 주워 들었는데, 아직 내 한국어 완벽하지가 않아서 제대로 이해를···, 잠깐만 오빠! 지금 어디가?!”

    “헤이, 꼬마 아가씨. 꼬마 아가씨가 재혁이 가족이라면서?”

    “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 유명해요?”

    “오, 맞췄는데? 케이트 너 대체 언제 한국어를 따로 배운 거야?”

    “그, 그만 하라니까! 얼른 자리로 돌아 와!”

    “어? 언니 한국어 할 줄 알아요? 대박!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

    망했다.

    역시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케이트는 신이 난 얼굴로 재희와 떠들고 있는 안토루를 지켜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런 식의 현실 도피도 오래 이어지지 못 했다.

    “어머, 안토루. 아는 분들이니?”

    “엄마. 글쎄 이 꼬마 아가씨가 재혁이의 동생이라는 거 있지? 재혁이랑 엄청 닮았지?”

    “재혁이라면 너랑 같은 팀에 뛰었다는 그 꼬마 친구? 어머, 귀엽게 생긴 게 정말 똑 닮았네.”

    “오빠를 아세요?”

    “호주에 있을 때 가끔 경기장에서 보곤 했지. 호호호. 덕분에 재밌는 경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단다. 케이트! 재혁이랑 너도 많이 친하지 않았어?”

    ‘맞다···. 오늘은 부모님도 와계셨지.’

    안토루를 응원하기 위해 호주에서 러시아까지 오신 부모님들.

    두 분 또한 오늘 경기를 함께 관람하기 위해 이곳에 와계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케이트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의 만남을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역시 혼자 올 걸 그랬다며, 케이트는 작게 쥔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찧다가···.

    “언니. 오빠랑 친해요?”

    “아, 그게···.”

    두 눈을 반짝이며 곁에 다가온 재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고 말았다.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얼굴 위로 떠올랐고, 그런 케이트를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안토루는 씨익 장난기가 깃든 미소를 떠올리더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정도면 그냥 친한 게 아니지. 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고, 가끔 만나기도 하고, 진지한 대화도 나누고···.”

    “연락하고, 가끔 만나고, 진지한 대화도 나눠요? 어, 그렇다면···.”

    짧은 영어로 안토루가 한 말을 단어들로 쪼개 이해하던 재희의 뺨이 확 붉어지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쳤다.

    “혹시 오빠랑 연인 관계?!”

    “큭큭큭, 이 꼬마 아가씨는 누구랑 다르게 눈치가 빠른데?”

    “세상에, 대체 어떻게요? 아니? 왜요? 언니가 엄청 아깝잖아요?! 언니는 모델처럼 예쁘게 생겼는데!”

    “에이, 그건 아니지. 사실 따지고 보면 재혁이가 아깝지. 재혁이 정도 되는 선수면 케이트가 아니라 진짜 모델들이 줄을···.”

    “언니 모델 아니었어요? 난 진짜 모델인 줄 알고 친구들한테 자랑했는데.”

    “···.”

    이건 산 넘어 산이다.

    케이트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부모님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확실히 재혁이 정도면 대단한 아이죠. 그보다 난 둘이 그냥 친한 학교 친구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네?”

    “당신 그렇게 눈치가 없어? 나는 호주에서 진즉 알아 봤지. 케이트가 그 친구를 바라보던 시선이 벌써 달랐었다구. 마치 우리 고등학생 때처럼 말야. 하하하.”

    “어머, 당신도 참···.”

    “···.”

    두 분이 어떤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 지를 기억해내곤 포기했다.

    처음 만난 사이면서 죽이 척척 맞는 안토루와 재희.

    이젠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또 하나의 이야기를 꽃피우고 계신 부모님들.

    아군이라곤 단 한 명도 없는 이곳에 더 머물고 있다간 본인만 힘들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케이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고, 그렇게 출구를 향해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는 낯선 손길에 케이트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녀의 눈동자 끝에서 조용히 앉아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계시는 재혁의 할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고···.

    “예쁜 아가씨. 재혁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우이.”

    주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 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던 할머니의 짧은 감사 인사에 케이트는 그만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조그만 목소리로 ‘네···’라는 대답을 남긴 후 다시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그런 케이트를 지켜보고 있던 안토루는 실실 웃는 낯으로 동생의 곁에 다가가 물었다.

    “도망 가려던 거 아니었어?”

    “···시끄러.”

    “···네.”

    안토루의 물음에 한기가 서린 목소리로 대답한 케이트.

    그런 케이트의 반응에 꿀꺽 침을 삼킨 안토루는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제야 주변이 조용해진 것에 케이트는 숨을 고르면서 진땀을 식혔다.

    사실 마음 같아선 이미 이곳에서 도망친지 오래였다.

    하지만 평소 재혁이가 했던 말을 기억하면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게 많은 가족을, 특히 할머니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케이트는 할머니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를 떠날 수 없던 것이다.

    후우, 숨을 고르면서 평소의 총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돌아온 케이트.

    케이트는 얼마남지 않은 경기 시간을 확인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최재혁. 네가 날 여기 남게 만들었으니까. 꼭 모두가 웃을 수 있게 이겨. 지기만 해봐. 지면···, 안 받아줄 거야.’

    ***

    “···방금 한기가.”

    “에어컨이 너무 쎘나? 걸칠 거 줄까?”

    “아뇨. 괜찮아요. 기분 탓이겠죠.”

    락커룸에 앉아 유니폼을 걸치던 중 재혁이 부르르 몸을 떨자 곁에 있던 코치가 그의 몸상태를 걱정하며 물었고, 재혁은 이에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런 후 반쯤 걸쳤던 유니폼을 다시 입었고, 잠시간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재혁은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했다.

    발목은 더 이상 문제가 없을 정도로 멀쩡했고, 부족했던 체력도 지난 며칠간 특별히 신경써서 확실히 키웠다.

    잠도 잘 잤고, 먹을 것도 잘 먹었다.

    그렇다면 이제 유일한 문제는 단 하나.

    ‘과연 오늘은 선발로 뛸 수 있을 것인가.’

    꿀꺽.

    괜스레 침을 삼키면서 또 한 번 깊게 삼켰던 숨을 천천히 토한 재혁은 감고 있던 눈을 떴고, 곧 쇳소리와 함께 락커룸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온 임종철 감독을 쫓아 고개를 들었다.

    임종철 감독은 락커룸에 앉아 있는 선수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고, 애써 헛기침을 몇 차례 토한 뒤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선발 명단을 발표하겠다. 먼저 골키퍼로 정형우. 왼쪽 풀백 김용구, 오른쪽 풀백으로 최태성이 들어간다. 센터백 두 명은···.”

    감독의 입술을 타고 오늘 경기를 선발로 뛰게 될 11명의 선수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면 그 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선수들은 경기를 뛰게 될 선수들을 위해 있는 힘껏 박수를 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날이었으니까, 후회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렇게 6명, 7명···, 총 10명의 선수들이 정해졌다.

    이제 남은 건 한 명.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에 긴장한듯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감싸고 있던 재혁은 굳은 얼굴로 임감독을 바라보았고···.

    “마지막으로···, 최재혁. 자리는 중앙 미드필더다.”

    자신의 출장이 확정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예! 이겨서 꼭 16강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죽어라 뛰겠습니다!”

    재혁을 시작으로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친 선수들.

    그런 선수들을 한 명씩 살펴 보면서 피식 실소를 흘린 임종철 감독은 머리를 벅벅 긁적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러라고 뽑은 거야. 무조건 이기자.”

    “네!”

    “회의는 이상이다. 준비되는 대로 모두 밖으로 나오고, 벤치에 앉게 될 선수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태를 점검하면서 임감독은 분주히 움직였고, 선수들과 코치들도 그런 감독의 말에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모든 선수들의 준비가 끝났을 때,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복도에 줄을 맞췄다.

    재혁 또한 그곳에 스며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고···.

    “드디어 만났다···!”

    그런 재혁을 뒤에서 지켜보던 사네도 열의가 잔뜩 깃든 눈동자를 불태우며 자리를 지켰다.

    < 203. 믿고 있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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